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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62권, 영조 21년 7월 14일 갑신 1번째기사 1745년 청 건륭(乾隆) 10년

도성 수축을 반대한 홍중효의 상소

부수찬 홍중효(洪重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도성(都城)을 수축(修築)하는 역사(役事)는 결코 시행할 수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경도(京都)를 지킬 수 없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성(城)이 견고하지 않은 것은 거기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둘레가 넓고 군령(軍令)이 상응하지 않은 것이 첫째입니다. 사람과 가축은 많은데 저장된 식량이 적어서 양식을 대어주지 못하고, 땔감이나 꼴을 주지 못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사람이 태반은 성외(城外)에 사는데 성내(城內)에 적(賊)이 들어와서 근거지로 삼을 때 적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안현(鞍峴)·팔각현(八角峴)·만리현(萬里峴)·우수현(雨水峴)이 성중(城中)을 부압(俯壓)하여 적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네 번째입니다. 두모포(豆毛浦) 위쪽으로는 강세(江勢)가 급하고 높은데, 동교(東郊)는 평탄하여 막혀 있는 장애물이 없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이는 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바로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이니, 비록 손무(孫武)·오기(吳起) 같은 이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성조(聖租)께서 여기에 국도(國都)를 정한 지 거의 4백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로 정한 것은 도리(道理)의 균일함을 취하였고, 형세의 편리함을 근거하였을 뿐이요, 이 한 성(城)으로써 지킬 만하다고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축성(築城)하던 초기에 8로(八路)의 백성을 역사시켜 수년 뒤에 이루었지만, 오히려 높낮이가 같지 않고 소밀(疎密)한 것이 서로 섞여서 사치스럽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왕공(王公)이 설험(設險)하는 것이 성황(城隍)에 있지 않다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영릉(英陵)157)선릉(宣陵)158) 께서는 성군(聖君)을 이어 오면서 나라의 법도와 기강을 세움에 있어서 규모가 넓고 원대하여 무릇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지붕을 잇는 방법에 있어서 빠뜨림이 없이 모두 갖추었지만 도성을 개축(改築)하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어찌 성지(聖智)가 못미쳐서 그러하였겠으며, 재력이 모자라 그러하였겠습니까? 우리 숙고(肅考)에 이르러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 거듭 빛나는 운회(運會)를 이어받아 지혜가 만물에 골고루 미치고 덕화(德化)가 모든 백성에게 널리 펴져서 임어(臨御)하신 지 50년 동안에 장원한 규모와 큰 계획으로 흔들리지 않는 터전을 세우고, 무궁한 왕업을 전하여 주는 일들을 순차적으로 닦고 실천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마는, 성을 수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장상(將相)과 기구(耆耉)들의 깊은 뜻과 장원한 계획이 오늘날에 비교할 수 없는데도 여기에 대하여 진청(陳請)한 자가 없었습니다. 유독 고 상신(相臣) 이유(李濡)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하여 급할 때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논한 자들은 옳지 못한 계획이라고 말하였으니, 이 어찌 당시의 조정 의논도 역시 도성은 기필코 지킬 수 없음을 안 것이 아니겠습니까? 큰 역사(役事)의 뒤에 정유년159) ·무술년160) 의 기근과 여역(癘疫)을 거듭 당하여 사망자들이 서로 연달아 거의 떨쳐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도 족히 징계할 만하고, 또 옛사람과 지금 사람들이 기술이 서로 미치지 못합니다. 신이 고성(古城)의 축조한 흔적을 보니, 석체(石體)가 튼튼하고 제도가 절박하여 갑자기 움직일 수 없는데, 지금의 축성(築城)한 돌은 대부분 머리는 크고 끝은 뾰족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비록 아름다우나 그 중간이 흔들리기 쉬위니, 장단점이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더군다나 다시 성지(城池)로써 나라를 견고하게 하려는 것은 계획 중에 하책(下策)입니다. 다듬지 않은 서까래와 흙으로 쌓은 계단이 좋습니다. 우공(禹貢)161) 에서 오복(五服)162) 에 문교(文敎)를 펴고 무위(武威)를 떨친 것이 내외(內外)에 따라 제도를 달리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외어(外御)를 폐지하고 내비(內備)에 힘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아른 봄에 무지개가 해를 꿴 이변과 한여름에 상설(霜雪)이 내린 재앙은 모두 옛날에도 드물었던 변괴입니다. 옛날의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정(靜)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고 동(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전하께서 비록 조석으로 부지런하고 삼가하여 일심으로 천지 신명(天地神明)을 대하시고, 수성(修省)으로써 재앙을 그치게 하고, 안정(安靜)으로써 진정(鎭定)시키려 하나, 오히려 천심(天心)을 즐겁게 하지 못하고, 민정(民情)을 동요시킬까 두려운데, 지금 도리어 천명(天命)을 어기어 재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백성을 부려 원망을 쌓으려고 하십니다. 가령 혹시 높은 성을 완성하지 않았는데 국고(國庫)는 탕진되고 백성은 피곤하며, 외구(外寇)가 이르기 전에 내환(內患)이 먼저 싹튼다면, 그때에 비록 뉘우치더라도 또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이 거사가 잘못된 계획이라는 것을 어찌 진실로 모르겠습니까마는,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였으나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성을 쌓자는 의논을 드리는 자들이 적극성을 띠고 있고, 성명(聖明)께서는 그 말을 경청(傾聽) 때문에 중노(重怒)를 범하여 성지(聖旨)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니, 신은 그윽이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삼군문(三軍門)에 내린 절목(節目)은 도성을 축조하려는 것이 아니고 수즙(修葺)하려는 것이다. 나의 뜻은 백성을 위하는 데 있어 비록 백 사람이 흔들더라도 결코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진달한 바는 매우 오활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6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87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軍事)

  • [註 157]
    영릉(英陵) : 세종(世宗).
  • [註 158]
    선릉(宣陵) : 성종(成宗).
  • [註 159]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 [註 160]
    무술년 : 1718 숙종 44년.
  • [註 161]
    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 [註 162]
    오복(五服) :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周圍)를 5백 리씩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區域)으로,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을 말함.

○甲申/副修撰洪重孝上疏, 略曰:

竊以爲都城築役, 決不可行也。 臣聞京都之不可守有五, 而城不堅完不與焉。 周回闊大而軍令不相應一也。 人畜多而積儲少, 糧餉不支, 薪芻不給二也。 城外人居殆半, 城內賊來有據, 而客反爲主三也。 鞍峴八角峴萬里峴雨水峴, 俯壓城中, 賊窺我虛實四也。 豆毛浦以上江勢駛高, 而東郊平衍, 無有陂障之阻五也。 此非臣創言, 乃古來傳言, 雖復起, 不可易也。 自我聖祖定鼎于玆, 殆四百年矣。 取道里之均, 據形制之便而已, 非以一城之地爲可守也。 故築城之初, 役八路之民, 數年而後成, 猶高低不等, 踈密相錯, 而不之侈也。 豈不以王公設險, 不在於城隍故耶? 曁我英陵宣陵, 以聖繼聖, 立經陳紀, 規模宏遠, 凡於堂搆墍茨之方, 靡有遺缺, 而獨未聞都城之改築。 此豈聖智有未及, 財力有不博而然哉? 至若我肅考, 以上聖之姿, 履重熙之運, 智周萬物, 德洽群黎, 臨御五紀之間, 凡所以宏規大猷, 建不拔之基, 垂無窮之業者, 靡不次第而修擧, 至於修城一事, 則不爲效力。 彼時將相耆耉, 謀深而慮遠者, 非比近日然, 又未有以此而陳請者。 獨故相臣李濡建議築北漢城, 以爲緩急之歸。 議者謂爲非計, 豈非曩時廷議, 亦知都城之必不可守耶? 大役之後, 荐遭丁、戊飢ㆍ疫, 死亡相藉, 殆不自振, 旣往之事, 亦足可懲, 且古今人技巧不相及。 臣見古城遺築, 則石體完而制度朴, 猝不可動, 而今之築城之石, 則率皆頭(夫)〔大〕 末銳, 面勢雖美, 其中易撓, 利害又相懸也。 況復固國以城池, 計之下也。 采椽土階尙矣。 至若《禹貢》五服敷文奮武內外異制, 未聞廢外禦而專內備也。 噫! 春初虹貫之異、盛夏霜雪之災, 俱係罕古變怪。 驗諸前昔, 宜靜而不宜動。 殿下雖朝勤夕惕, 一心對越, 修省而弭之, 安靜而鎭之, 猶恐天心未豫, 民情或搖, 今反欲違天而慢災, 役民而築怨。 設或崇墉未完, 而國竭民困, 外寇未至, 而內患先萌, 則雖欲悔之, 亦無及矣。 顧今在廷之臣, 亦豈無眞知此擧之非計者, 而側聽多日, 無一爲殿下言之者, 誠以議者銳意, 而聖明傾聽, 故不欲犯衆怒而忤聖旨耳, 臣竊惜焉。

批曰: "三軍門節目, 非築都城, 乃修葺也。 予志在民, 雖百人撓之, 決不可撓。 其陳迂矣。"


  • 【태백산사고본】 46책 6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87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