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국 당상이 모여 강화도의 길목에 있는 문수 산성과 주위의 방비를 논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이 강도(江都)에 가는 길에서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지형을 보았는데 밖은 좁고 안은 평평하며, 동쪽과 서쪽은 강이요, 북쪽은 철벽(鐵壁) 같은 높은 봉우리이며 남쪽은 치첩(雉堞)이 빙 둘렀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는 통진(通津)을 독진(獨鎭)으로 하여 산성으로 읍(邑)을 옮기고 부평(富平)과 양천(陽川)은 합쳐서 한 고을로 삼는 것이 가할 줄로 여깁니다. 또 부평은 서쪽으로 해변(海邊)에 가깝고 돌곶[石串]은 진소(津所)로 삼아 첨사(僉使)를 둠이 마땅하니, 덕포 첨사(德浦僉使)를 돌곶으로 옮긴다면 부평은 비록 이읍(移邑)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이는 모두 영상(領相)·우상(右相)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덕진(德津)은 인천(仁川) 땅에 있는데 당초에 설치한 뜻이 있으니 무기(武器)와 환곡(還穀)을 조치하여 수어(守禦)와 군량에 충분히 대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효묘조(孝廟朝) 때부터 이미 보장(保障)의 중요한 땅이 되었습니다. 문수 산성은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의 계사(啓辭)에, ‘만약 의자(椅子)에 앉아서 바둑판을 보는 듯하여 그 곳을 적이 점거하면 강도 사람들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산성을 쌓았던 것인데, 신에게는 별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문수 산성으로 이읍(移邑)하여 나무를 기른 후에 적이 점거해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든다면 장차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수목이 자라고 백성들이 조밀하게 살면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기 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대로 두고 때에 임하여 굳게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의 생각도 역시 적을 길러주는 밑천이 될까 염려됩니다. 통진은 그 형세가 반드시 다투게 되었는데, 통진을 만약 잃으면 이는 강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였으며, 이종성이 말하기를,
"덕포(德浦)를 옮기는 일은, 갑곶(甲串)이 얼어붙어 뱃길이 막히면 광성(廣成)이 손돌목[孫石項] 아래에 있어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날 때 뱃길이 광성을 거치게 되니 당초 덕포(德浦)를 설치한 뜻이 있습니다. 덕진을 조치한 데에 대해서는 신의 의견 역시 이와 같으며, 양천(陽川)·부평(富平) 고을을 합치는 것은 신이 하고자 하던 바입니다."
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이 말하기를,
"강화(江華)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면 문수 산성을 버려서는 안 되는데, 한 별장(別將)으로서 지키게 한다면 매우 허술하니 군정(軍丁)을 만약 변통할 수만 있다면 통진을 독진(獨鎭)으로 하여 고을을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산성(山城) 안에는 끝내 배치하기 어렵고 성 밖 장항(獐項)이 넓어 고을을 수용할 수 있고, 만약 위급한 일을 당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삼군문(三軍門)에서 성을 쌓을 때 도형(圖刑)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들 모두가 ‘문수 산성은 반드시 다툴 땅이 되는데 외따로 떨어진 성에 후원(後援)이 없으면 곤란하다.’라고 하였으니, 통진을 독진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읍기(邑基)는 장항(獐項)이 좋지 않아서 1년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통진 부사(通津府使)에 중군(中軍)이 있으니 만약 군졸을 조련하여 성을 지킬 방도를 하게 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제 만약 양천과 부평을 합친다면 군정(軍丁)을 변통할 길이 있으니, 통진을 독진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강화에는 대선(大船)이 4척에 불과한데 삼남(三南)에 있는 배가 1백 척에 가까우니, 만약 조운(漕運)한 후에 올려 보내고 바람이 높을 때에는 강화에 머물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공조 판서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문수 산성은 수목을 기르기가 어렵고 수유현(水踰峴)은 바로 천험(天險)의 요새이니 만약 5리의 성을 쌓으면 관부(官府)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양천을 공암(孔巖) 진두(津頭)에 둔 것은 오로지 강도 땅을 위해서인데, 불행하게도 병자년107) 같은 변이 있게 되면 나루에 배가 없으니 어떻게 급히 건너겠습니까? 나룻배 10여 척을 양화도(楊花渡)에서 더 준비해 내야 합니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수성(守城)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방도가 있으니 장수(將帥)·군사(軍士)·지형(地形)·기계(器械)·양식(粮食)이 그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수성을 하기가 어려운데 주위 2백 리나 되는 성 안을 채우지 않고서 다만 빈 성만 쌓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수성하는 방도는 마땅히 윤탁(尹鐸)이 그 호수(戶數)를 줄인 도리108) 를 다해야 하는데, 근래에는 유수(留守)를 문득 명관(名官)이 승자(陞資)하는 계제(階梯)를 삼거나 아니면 나이 든 재상(宰相)이 병을 요양하는 장소를 삼아 이렇게 자주 교체되니, 어떻게 성을 지키겠습니까? 만약 수성을 하고자 한다면 성을 지키고 성을 쌓을 만한 자를 가려서 오래 재임시켜 혹 10여 년, 혹은 5, 6년을 한정해 효과를 이루기를 책임지워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관방(關防)에 관계되니, 통진 부사(通津府使)를 불러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후일 등대(登對)할 때에 강정(講定)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본조(本曹)의 저축이 고갈되어 공가(貢價)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듣건대 관서(關西)의 도신(道臣) 김시형(金始炯)이 비용을 절약하여 별도로 돈 2만 냥과 무명 3백 동(同)을 준비해 본조의 불시의 수용에 대비하고 있다 합니다. 또 지난해 북관(北關)에 진구(賑救)를 실시할 때 기영(箕營)에서 호조에 돈 2만 냥을 보내어 우선 북관에 빌려 주기를 허락하였었는데, 이제 듣건대 그 때의 도신(道臣)이 돈을 주조(鑄造)하여 요리해 수만 냥을 만들어 두었다고 합니다. 이 두 곳의 별비전(別備錢) 4만 냥과 무명 3백 동을 우선 가져다가 목전의 급함을 구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어영청의 별초군(別抄軍)은 거둥 때와 습진(習陣) 때 이미 편곤(鞭棍)을 쓰는데 상시사(賞試射) 때에 이르러서는 편곤을 시험하지 않으니, 지니고서도 시험하지 않음은 매우 뜻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금군(禁軍)의 예(例)에 의해 시험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본영(本營)의 군기(軍器)가 많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청컨대 군작미(軍作米) 2천 곡(斛)을 얻어 바로 수리해 음우(陰雨)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가을 보리가 이미 흉년이 들고 농사도 풍년이 들기를 보장하기 어려우니, 저축하는 방책을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관(西關)의 돈과 무명을 이미 이급(移給)하기를 허락하였고, 군작미를 또 획급해 주었는데 이는 비단 외방이 지탱하지 못할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단서가 있게 될 것이니, 마땅히 절약하는 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어서 이종성(李宗城)에게 명하여 관북 심리사(關北審理使) 윤용(尹容)이 올린 옥안(獄案)에 대하여 경중을 분간해 차등을 두어 작처하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런 의옥(疑獄)을 여러 해 동안 판결하지 못하고 이제 심리사가 간 후에야 비로소 조진(條陳)하였으니 전후의 도신(道臣)을 아울러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6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77면
- 【분류】군사(軍事)
○上引見大臣, 備堂。 左議政宋寅明曰: "臣於江都之行, 見文殊山城地形, 外狹而內平, 東西爲江, 北鐵壁高峻, 南雉堞周遭, 故臣意則通津爲獨鎭, 移邑山城, 富平 陽川, 可合爲一邑。 且富平西薄海曲, 石串爲津所, 宜置僉使, 德浦僉使移置石串, 則富平雖移邑亦無不可, 此皆領右相所知。 而德津在仁川地, 當初設置, 意有在焉, 措置戎器還穀, 以備守禦足食之資宜矣。" 上曰: "諸臣各陳所見也。" 刑曹判書李宗城曰: "江都自孝廟朝, 已爲保障重地。 文殊則故相臣金錫冑之啓有曰, "若坐椅觀棊, 爲敵所據, 則江都之人食不下咽’, 故築此山城, 而臣有別見。 文殊山城移邑養樹後, 爲敵所據, 伐木爲茷, 則將何以禦之乎? 樹木長養, 人民稠密, 則易爲必爭之地。 臣意則置之爲便, 臨時堅守宜矣。" 寅明曰: "臣意亦以資敵養寇爲慮。 而通津在所必爭, 通津若失, 則是無江都也。" 宗城曰: "德浦移置事, 甲串氷時阻路, 則廣成在(爭石項)〔孫石項〕 之下, 倉卒之變, 路由廣成, 當初德浦設置之意有在。 德津措置, 臣見亦如此, 陽, 富合邑, 臣之所欲爲者也。" 訓鍊大將金聖應曰: "欲固江華, 則文殊不可捨, 一別將守之甚虛踈, 軍丁若變通, 則通津爲獨鎭, 移邑爲好。 而山城內終難排置, 城外獐項廣可容邑, 若當緩急, 則入處山城好矣。" 戶曹判書徐宗玉曰: "三軍門築城時, 圖形以來, 則人皆謂 ‘文殊爲必爭之地, 而孤絶之城, 無後援則難矣, 通津不可不爲獨鎭, 而邑基則獐項不好, 難支一年。 通津府使有中軍, 若使之組練軍卒, 爲守城之道, 則便好矣。 今若以陽、富合邑, 則軍丁有變通之路, 通津可爲獨鎭。 而江華大船不過四隻, 三南所在船近百隻, 若使之漕運後上送, 風高時則留置江華爲好矣。" 工曹判書柳儼曰: "文殊則樹木難養, 水踰峴, 卽天險之處, 若築城五里, 則可容官府矣。 陽川之置之孔巖津頭者, 專爲江都地, 而不幸有丙子之變, 則無津船而何以急渡乎? 津船十餘隻, 加出於楊花渡爲宜矣。" 御營大將朴文秀曰: "守城之道有五, 將帥、軍士、地形、器械、糧食是已。 五者不備, 則難以守城, 城內周廻二百里, 其內不能充, 則不宜但築空城。 守城之道, 宜盡尹鐸損其戶數之道, 而近來留守便作名官陞資之階, 否則爲老宰相養病之所, 數遞如此, 而何以守城乎? 若欲守城, 則擇其可以守城築城者久任, 或十餘年或五六年, 責其成效宜矣。" 上曰: "事係關防, 招見通津府使, 作爲節目, 後日登對講定宜矣。" 宗玉曰: "本曹所儲匱竭, 貢價不敷, 聞關西道臣金始炯, 節用省費, 別備錢二萬兩、木三百同, 以待本曹之不時取用。 且頃年北關設賑也, 箕營上送戶曹錢二萬兩, 姑先許貸於北關, 今聞其時道臣, 鑄錢料理, 辦置屢萬兩云。 兩處別備錢四萬兩、木三百同, 宜先取用, 以濟目前之急。" 上許之。 文秀又曰: "御營廳別抄, 於擧動時及習陣, 旣執鞭棍, 而至於賞試射時, 則不試鞭棍, 持而不試, 事甚無義。 一依禁軍例許試宜矣。" 上允之 文秀曰: "本營軍器多未備, 請得軍作米二千斛, 劃卽修治, 以爲陰雨之備。" 上從之。 兵曹參判金尙星曰: "秋牟已判大歉, 穡事難保登熟, 蓄儲之策, 惟當預究。 而西關錢木, 旣許移給, 軍作米又爲劃給, 此不但爲外方難支之弊, 此路一開, 必有不堪之端, 宜思撙節之道矣。" 上稱善。 仍命宗城, 講關北審理使尹容所上獄案, 分輕重酌處有差。 敎曰: "此等疑獄, 積年不決, 今於審理使後, 始乃條陳, 前後道臣, 幷重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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