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60권, 영조 20년 10월 19일 임술 1번째기사
1744년 청 건륭(乾隆) 9년
임금의 병후가 회복된 것을 경축하는 정시의 문과 전시에 친히 나아가다
임금이 정시(庭試)의 문과 전시(文科殿試)에 친히 나아갔는데, 바로 임금의 병후가 회복된 것을 경축하는 과거였다. 이때 홍봉한(洪鳳漢)이 왕실과 혼인을 맺었으므로 조정에서 반드시 그를 물색(物色)하고자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고관(考官) 등에게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정성을 다하면 쇠와 돌도 뚫을 수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세도를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내가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번에 ‘호석(虎石)을 쏘았다. [射虎石]’라는 제목을 명한 것도 그 뜻이 여기에 있었다."
하였다. 승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무릇 사알(司謁)이 하교(下敎)를 구전(口傳)하는 것은 곧바로 봉행(奉行)하기 위한 것인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을 알겠습니까? 마땅히 주서(注書)로 하여금 조례(條例)에 의거하여 글로 써서 바치게 하고 다시 성상의 예람(睿覽)을 거친 다음에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여러 도에서 올리는 장계(狀啓)는 인신(印信)을 찍지 아니하므로 허술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연·월·일이 있는 곳에 마땅히 인신을 찍도록 정식(定式)하여 대신들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일이 불경한 데 관계된다고 하여 이를 중지하도록 아뢰었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58면
- 【분류】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