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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0권, 영조 20년 10월 11일 갑인 4번째기사 1744년 청 건륭(乾隆) 9년

산림의 초치, 대신들의 식견과 사려, 언관 석방 등에 관한 윤광천의 상소문

장령 윤광천(尹光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의 사류(士類)들이 혹은 물러가서 전야(田野)에 살면서 도학(道學)을 강구(講究)하기도 하고, 혹은 산수(山水)를 즐겨 편안하게 지내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걱정하지 아니합니다. 이들은 정말로 그 걱정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마는, 지금은 모두 이와 같으니,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러한 사람을 말할 것 같으면 이재(李縡)·이하원(李夏源)·김진상(金鎭商)이 바로 그들입니다. 전하께서 구차스럽게 찬동하고 있는 자 십여 명과 이들 한 사람을 바꾼다면, 나라가 그래도 나라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초치(招致)하는 것은 전하께서 처치하심이 그 적당함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싫어하여 박대하시고 그 마음을 의심하고는 멀리하다가 매양 한 통의 상소가 들어가면 문득 대신(大臣)들에게 나아가서 이것을 결제하는데, 이러한 법이 한번 행해지면 언자(言者)들은 군상(君上)의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먼저 묘당(廟堂)의 대신들에게 잘못될까봐 염려할 것입니다. 옛날 한나라 위상(魏相)이 부봉(副封)의 제도를 아주 없애버렸으니,221) 대신의 도량을 깊이 얻었고, 대각(臺閣)의 체모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고 이를 만한데,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대신들은 그 식견과 사려가 위상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전하께서는 일의 시비는 캐내지 아니하고 먼저 이편저편의 당파에서 찾으십니다. 박치륭(朴致隆)이 양전(兩銓)을 논란한 것과 이사조(李師祚)가 전조를 공격한 데에 있어서 그들의 죄를 받은 것이 진실로 가볍고 무거운 차이가 있는데, 엄한 하교가 당파의 습성에 먼저 미쳤으니,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다면 이사조정석오(鄭錫五)를 공격하고, 박치륭윤급(尹汲)을 공격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그들이 협잡(挾雜)하지 아니하였다고 이를 만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유배시키고 언관에게 죄준 것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사색 당파가 어떠한지를 논하지 말고 진실로 명의(名義)를 간범하지 않은 자들은 일체 모두 석방하여 이미 지나간 뉘우침을 깊이 베푸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날 옥당(玉堂)의 여러 사람을 어필(御筆)로 지워서 없애 버린 것은 실로 대성인이 할 바가 못되니, 빨리 반한(反汗)하시어 성덕(聖德)을 빛내도록 하소서. 박성원(朴聖源)의 계청은 진실로 너무나 망령되고 경솔하였으나, 그 부도(不道)한 마음과 같은 것은 결단코 반드시 없었을 것이며, 오광운(吳光運)의 말은 정말로 그 본정(本情)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소식(蘇軾)범공(范公)222) 의 소장을 보고 마침내 그 아래에다가 서명하였었는데, 신은 그 봉장(封章)을 일찍이 알아보고서 그 소장 아래에다 서명하지 못한 것을 한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이 시상(時象)에 관계되는 것은 엄격히 그것을 방비하고 막아야 하는데, 어찌 느슨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광천은 본래 품행이 절도가 없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시론(時論)을 따르고 붙쫓아서 비로소 대간(臺諫)의 선임에 통과하였었다. 그 상소의 뜻은 이재김진상에게 있었으나, 이하원을 아울러 거론한 까닭은 그들의 행적을 숨기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5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註 221]
    옛날 한나라 위상(魏相)이 부봉(副封)의 제도를 아주 없애버렸으니, : 위상(魏相)은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상(名相). 옛 제도에 모든 상소(上疏)는 두 봉(封)을 만들어 그 한 봉에는 부봉(副封)이라고 써서 올리면, 대신(大臣)이 먼저 뜯어 보고 거기에 말한 것이 좋지 않을 때에는 물리쳐 버리고 임금께 아뢰지 않았었는데, 위상이 어사 대부(御史大夫)가 되어 처음으로 그 부봉 제도를 없애 버려 언론의 막히고 가리어짐을 방지하였음.
  • [註 222]
    범공(范公) :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킴.

○掌令尹光天上疏, 略曰:

今之士類, 或退伏田野, 講究道學, 或優游山水, 進退無憂。 此非果忘者, 而今皆如是, 是誰之過也? 若言其人, 則李縡李夏源金鎭商是已。 殿下以苟同者十輩, 易此一人, 則國其庶乎? 其所以招致者, 在殿下處置之得其宜也。

又言

殿下厭薄言官, 疑阻其心, 每一疏入, 輒就大臣而決之, 此法一行, 言者不畏忤旨於君上, 先慮見非於廟堂。 昔者魏相白去副封, 可謂深得大臣之度, 不輕臺閣之體, 惜乎今之大臣, 識慮不及魏相也。

又曰:

今殿下不究其事之是非, 先索黨目之彼此。 朴致隆之論兩銓、李師祚之攻銓地, 其被罪固有輕重, 而嚴敎先及於黨習, 信如聖敎, 師祚鄭錫五, 致隆尹汲等, 然後方可謂不挾雜耶? 殿下之竄言者罪言者, 未知其爲幾人, 而勿論色目如何, 苟不干於名義者, 一幷疏釋, 深陳旣往之悔焉。

又言:

向日玉堂諸人之御筆抹去, 實非大聖人所作爲, 亟賜反汗, 以光聖德。 朴聖源之啓, 誠萬萬妄率, 而若其不道之心, 斷斷必無之, 吳光運之言, 誠得其本情矣。 昔 蘇軾范公疏, 遂署名其下, 臣恨不能早知其封章, 署名於疏下也。

批曰事關時象者, 嚴其隄防, 何可弛也?

【史臣曰: 光天素無行檢, 爲世所棄, 趨附時論, 始通臺選。 其疏意在於鎭商, 而幷擧夏源者, 欲以掩其跡云。】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5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