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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9월 9일 계미 1번째기사 1744년 청 건륭(乾隆) 9년

세자를 거느리고 창덕궁·육상묘·기로소를 거둥하고 백성들의 상언을 받들게 하다

임금이 세자를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을 배알하고, 이어서 기로소(耆老所)에 거둥하였다. 영수각(靈壽閣) 뜰의 동쪽에 나아가서 4배례를 행하고 영수각의 안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향하여 영내(楹內)에 앉고, 왕세자는 영외(楹外)에 앉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기로 제신(耆老諸臣)·예관(禮官)·승지와 사관은 계단 위에서 모시었다. 기사(耆社) 당상관 신사철(申思喆)이 나아가서 영수각 안의 감실(龕室)을 열고,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과 예방 승지 조명리(趙明履)가 어첩(御帖)을 받들어 꿇어앉아 어전에 올리니, 임금이 친히 어첩에 ‘지행 순덕 영모 의열왕(至行純德英謨毅烈王)’이라고 썼다. 예관이 궤장(几杖)을 받들어 승지에게 주니, 승지가 이를 받아서 올렸다. 임금이 친히 이를 받아서 내시(內侍)에게 주고, 이어서 육상묘(毓祥廟)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묘(私廟)에 가서 배알하는 것은 이것이 사묘를 영광스럽게 하는 예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옛날의 전장을 뒤따랐으므로, 감회와 기쁨이 한데 모였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하고, 어가가 돌아올 때에 광화문(光化門)에서 흥화문(興化門)에 이르러 경조(京兆)로 하여금 백성들의 상언(上言)을 받들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옛 마을로 다시 돌아온 것은 곧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패(豊沛)184) 의 고사이다."

하고, 명하여 연추문계(延秋門契)의 8, 90세 노인들을 불러서 각기 그 나이와 구실[役] 이름을 물어보고, 해조로 하여금 쌀과 포목을 주게 하였다. 밤에 환궁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50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윤리(倫理)

  • [註 184]
    풍패(豊沛) : 유방(劉邦)의 고향.

○癸未/ 上率世子, 詣昌德宮, 謁璿源殿, 仍幸耆老所。 就靈壽閣庭東, 行四拜禮, 陞御閣內西向, 坐楹內, 王世子坐楹外。 時ㆍ原任大臣、耆老諸臣、禮官、承、史, 侍於階上。 耆社堂上申思喆進開閣內龕室, 禮曹判書李宗城、禮房承旨趙明履奉御帖, 跪進于前, 上親書于帖曰至行純德英謨毅烈王。 禮官奉几杖, 以授承旨, 承旨受而進之。 上親受而授之內侍, 仍幸毓祥廟。 上曰: "往拜私廟, 此是榮廟之禮也。" 又敎曰: "追踵舊典, 感幸交集, 宜施特恩, 以達下情。" 回駕時自光化門興化門, 令京兆捧上言。 又敎曰: "今日復還故里, 卽漢祖 豐沛故事也。" 命召延秋門契八九十歲人, 各詢年歲、役名, 令該曹給米、布。 夜還宮。


  •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50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윤리(倫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