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이 있는 정언섭·유세복·홍치기 등의 처벌을 청하는 문학 이중조의 상소문
문학(文學) 이중조(李重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언섭(鄭彦燮)은 부임한 지 반년도 못되어 함부로 죽인 사람이 10인이 넘으니 그가 형장을 잔혹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監司) 심성희(沈聖希)의 소장에는 대단한 기세로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벗어나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사람을 죽인 것의 다과(多寡)는 그 숫자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자복한 것만으로도 또한 많이 죽였다고 이를 만합니다. 더구나 신이 들은 바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만일 전하께서 특별히 다시 조사하게 하여 진실로 나란히 죽은 사람들이 원통해 할 만한 것이 없고 참으로 도신(道臣)이 한 말과 딱 들어 맞는다면 신은 망언을 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삼가 듣건대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유세복(柳世復)·홍치기(洪致期)가 분산(墳山)을 파서 옮긴 데 대한 당부(當否)를 하문하시니, 수령이 경내의 산을 점유한 경우에는 나처하게 되어 있는데도 파서 옮긴 데 대한 조항은 없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경내의 빈 땅도 오히려 모점(冒占)하는 것을 금한다면 법을 설립하면서 파서 옮기거나 파서 옮기지 않는 데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사리상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세복·홍치기처럼 강제로 백성의 무덤을 파내게 한 다음 법을 무시하고 입장(入葬)했는데도 산을 점유한 율(律)을 인용하여 오늘날처럼 끝내 무사하게 조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소중한 것인데 함부로 살해한 수령에게 전하께서 조금도 죄를 가하지 않으시며, 무덤을 파낸 것은 잔인한 해독을 가한 짓인데도 금령을 무시한 수령을 전하께서 왜곡되게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니, 옛 성왕(聖王)이 백성을 사랑하는 은혜와 드러난 뼈를 묻어 준 인자함에 견주어 보건대 어찌 혐의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 소장을 보고 나서 대신에게 하문하니,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 소장에 이미 ‘들은 것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한 조항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중조에게 함문(緘問)해야 합니다. 유세복·홍치기의 일에 대해서는 그 사실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산가(山家)의 말에 동요되어 가끔 근거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뒤로 만일 수재(守宰) 가운데 경내의 산을 점유한 자가 있을 경우 반드시 파서 옮기는 것을 통렬히 금한 연후에야 잔약한 백성이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니, 이 한 조항은 마땅히 영갑(令甲)에 드러내어야 합니다."
했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중조의 함답(緘答)이 온 데 이르러 금부(禁府)에서 아뢰기를,
"정언섭의 처음 공초에 이미 10인이 쓰러져 죽었다고 자수했으니 지금 10인 이외에 더 조사하여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죄명이 숫자에 따라 증가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장(杖) 1백에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금년에는 호중(湖中)에 비가 상당히 흡족하게 왔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천안(天安)·직산(稷山) 두 고을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 형옥에 원통한 것이 있어 위로 천화(天和)를 간범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는 한(漢)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의 일122) 과 같은 것이다."
하고, 이어 어사(御史)를 보내어 살피게 할 것을 의논하였다. 조현명이 수찬 윤광소(尹光紹)를 천거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윤광소를 호서(湖西) 두 고을의 염찰사(廉察使)로 삼았다. 인견하여 한(漢)나라 때의 우공(于公)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효유하고, 또 말하기를,
"기전(畿甸)을 지나는 길에 호서(湖西)와 가까운 고을에 만일 불법을 저지른 일이 있으면 듣는 대로 돌아와서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59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3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풍속-예속(禮俗)
- [註 122]한(漢)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의 일 : 한나라 때 동해군에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부(孝婦)가 있었는데, 뒤에 시어머니를 살해한 것으로 무고(誣告)되어 지독한 형장(刑杖)을 받다가 무복(誣服)하여 처형되었음. 그런데 그날부터 3년 동안 가뭄이 들어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효부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제사를 지내 주니 비로소 비가 내렸다고 함.
○文學李重祚上疏, 略曰:
鄭彦爕之莅任未半年, 濫殺過十人, 則其刑杖之殘酷可知。 而監司沈聖希之疏, 盛氣張皇, 惟恐其伸脫不力。 殺人多寡, 厥數雖差, 所已自服者, 亦可謂多殺。 而況臣所聞, 不止於此? 倘殿下特更行査, 苟使駢斃者無可冤, 而眞有符於道臣之言, 臣請伏妄言之罪。 且伏聞頃日筵中, 下詢柳世復、洪致期墳山掘移之當否, 則有以守令之占山境內者有拿處, 而無掘移爲對云。 境內空曠之地, 猶禁冒占, 則設法之不及掘不掘, 理固當然矣。 曷嘗如世復、致期之勒掘民塚, 冒禁入葬, 而引用占山之律, 卒乃無事如今日之爲耶? 人命至重也, 而守令之濫殺者, 殿下不少加罪, 掘塚殘害也, 而守令之冒禁者, 殿下曲加寬貸, 其視古聖王愛民之恩、掩骼之仁, 豈不歉乎哉?
上示其疏, 問于大臣, 右議政趙顯命曰: "其疏旣曰 ‘所聞不止於此’, 此一節, 當緘問於李重祚。 柳、洪事, 雖未知其何如, 而世人動於山家之說, 往往爲無據事。 今後如有守宰之占山境內者, 必痛禁掘移, 然後可保殘民, 此一條, 宜著爲令甲也。" 上允之。 及重祚緘答, 禁府以: "彦爕初供, 旣以十人致斃自首, 今雖査出於十人之外, 罪名似不至於隨數增加。 以杖一百奪告身奏當。" 顯命又曰: "今年湖中雨澤頗洽, 而聞天安、稷山兩邑, 點雨不滴云。 或者有刑獄之冤, 上干天和乎?" 上驚曰: "此如漢之東海事也。" 仍議遣御史審察。 顯命薦修撰尹光紹, 上特命光紹爲湖西二邑廉察御史。 引見諭以效漢 于公之意, 又曰: "畿甸歷路, 湖西近邑, 若有不法事, 隨聞歸奏。"
- 【태백산사고본】 44책 59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3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