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59권, 영조 20년 3월 7일 을유 4번째기사
1744년 청 건륭(乾隆) 9년
사친의 구호(舊號)를 높여 묘호(廟號)는 육상, 묘호(墓號)는 소령으로 고치다
임금이 대신과 예조 당상·과각(館閣)의 당상 및 유신(儒臣)을 불렀다. 하교하기를,
"남의 아들이 되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그 은혜를 갚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전에 사호(賜號)함으로써 존봉(尊奉)하는 도리로 삼았으니 어찌 대소(大小)의 문자(文字)에 항상 일컬음에 있어 사묘(私廟)의 호칭을 당저(當宁)에게만 쓰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묘호(廟號)와 묘호(墓號)를 정하는 것은 바로 전에 내린 바를 공경히 받들어 사친(私親)의 구호(舊號)를 높이는 것이 되니, 경 등은 즉시 의논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송인명,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 참판 서명빈(徐命彬), 참의 윤급(尹汲), 관각 당상 오광운(吳光運), 응교 김상적(金尙迪), 부응교 윤광의(尹光毅) 등이 묘호(廟號)는 육경(毓慶)이라 하고 묘호(墓號)는 소령(昭寧)이라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육경은 장릉(章陵)067) 의 옛날 원호(園號)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곧 육상(毓祥)으로 고쳤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5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29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註 067]장릉(章陵) : 원종(元宗)의 능(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