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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58권, 영조 19년 12월 20일 기사 2번째기사 1743년 청 건륭(乾隆) 8년

정원 등에서 청대하니, 신하들을 불러 마음을 털어 놓고 유시하는 윤음을 내리다

정원에서 청대(請對)하였는데, 수찬 이창의(李昌誼)·장령 심익성(沈益聖)·정언 유언호(兪彦好) 또한 함께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대유(大諭)를 전하고자 하니, 청대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합문(閤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오히려 풀리지 아니하여 신료들을 인접하지 않고, 기무를 수응하지 않은 지 이미 10여 일이 되었다. 세 상신은 도성 밖으로 물러나갔고, 승지와 삼사(三司) 및 재신(宰臣)들이 다시 나아가 청대하였으며 번갈아 소장을 올려 진계(陳戒)하였으나, 일체 응답하지 않았었다. 이날 여러 신하들을 합문 밖에 불러들이고 윤음(綸音)을 내려 마음을 털어놓고 화하게 유시했는데, 무룻 수천마디에 이르렀다. 이에 전후로 유중(留中)하였던 차자와 소장 수십여 도에 대해서도 모두 비답을 내리고, 또 사관을 보내어 세 대신에게 돈유(敦諭)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그 윤음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창업한 임금이 있고 중흥(中興)시키는 임금도 있으며, 번저(藩邸)에서 들어와 승통한 임금도 있는데, 승통한 임금은 왕위를 이어받은 데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창업이나 중흥시킨 임금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승통한 사람이다. 나의 경력한 바를 어찌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수수(睢水)에서 고난을 격은 것이나227) 광무제(光武帝)가 맥반(麥飯)으로 요기한 데228) 에 비길 수 있겠는가? 아! 이관후(李觀厚)의 소장은 지금까지도 마음이 괴로우니, 임금된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그러나 부탁의 소중함을 돌아보고 원량의 나이 어림을 생각하여 억지로 마음을 억제해 왔다. 아! 저 당론은 신축년229) ·임인년230) ·무신년231) 으로 이미 은감(殷鑑)을 삼았었다. 합문(閤門)을 닫고 수라를 물리친 것은 그 근본이 어디에 연유한 것인데, 배달(排闥)한 것이 몇 차례이고 관(冠)을 벗고 대죄한 것 또한 몇 번이었던가? 대훈(大訓)을 한번 반포하니 흑백이 분명하였고, 훈유(訓諭)를 몸소 내리니 저 하늘에 맹세(盟誓)할 수 있었는데, 아! 오늘날 여러 신하들은 무슨 마음을 먹고 이를 심상하게 보아 이 고심(苦心)을 막으려 하는 것인가? 전에는 윤득화(尹得和)가 있었고 뒤에는 조중회(趙重晦)가 있어서 대신을 쫓아내려 하니, 그 마음은 곧 편당(偏黨)하는 것이다. 아! 내가 일찍이 옛날 조심하던 덕(德)을 본받아 털끝만큼도 지나치게 받든 예가 없었다. 사묘(私廟)에 전배하여 심회(心懷)를 펴고자 함은 아들된 도리이니, 또한 어떻게 지나친 예라고 하겠는가? 앞의 김유(金濰)의 무리나 뒤의 조중회 또한 명류(名流)를 배운 자들이었던가? 합문을 닫은 일은 내가 어찌 즐겨 했겠는가? 김상적(金尙迪)의 임금을 위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배달(排闥)하는 일은 후일의 그 폐단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이목(耳目)의 직임을 맡은 관원이 서로 머뭇거리는데, 조태상(趙台祥)의 해괴한 거조와 허채(許采)의 미봉책(彌縫策)은 또한 무슨 마음이었는가? 기무(機務)를 정지하고 한번 유시하려 한다. 원량의 가례(嘉禮)가 이미 가까웠고 이해도 또한 곧 바뀌게 되었다. 무룻 조신(朝臣)들은 이런 의리를 깨닫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우리 원량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58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20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註 227]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수수(睢水)에서 고난을 격은 것이나 :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수수(睢水)에서 항우(項羽)에게 크게 패하여 10만 명의 군사가 죽으니 수수가 흘러내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고조도 초(楚)나라 군사에게 완전히 포위당해 위급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는데, 마침 대풍(大風)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사석(砂石)이 나는 틈을 타서 도망하여 죽음을 모면한 고사(故事).
  • [註 228]
    광무제(光武帝)가 맥반(麥飯)으로 요기한 데 : 광무제(光武帝)가 일찍이 경시(更始)의 부하로 있었을 적에 계주(薊州)에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마침 적추(賊酋) 왕낭(王郞)에게 내응한 자가 있어 성중이 크게 어지러운 까닭에 성중에서 피해 나와 남궁(南宮)에 이르렀으나, 큰 풍우(風雨)를 만나 길가의 빈집에 들어가 불을 피워 놓고 젖은 옷을 말린 다음 맥반을 지어 요기한 고사(故事).
  • [註 22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230]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23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政院請對, 修撰李昌誼、掌令沈益聖、正言兪彦好亦同爲求對, 敎曰: "欲傳大諭, 求對諸臣, 皆詣閤。" 時上怒猶未解, 不引接臣僚, 不酬應機務, 已十餘日。 三相逬出城外, 承旨、三司、宰樞更進求對, 交章陳戒, 而皆一切不答。 是日命召諸臣於閤外下綸音, 洞諭心腹, 凡數千言。 於是, 前後留中箚疏數十餘度, 皆賜批, 又遣史官敦諭三大臣, 使入來。 其綸音曰:

自古帝王, 有創業之君, 有中興之君, 有藩邸承統之君, 而其承統之君不過繼體, 奚比於創業中興之君? 而予亦承統者也。 予之所經歷, 豈 睢水光武麥飯之比哉? 噫! 觀厚之章, 尙今心酸, 南面何樂? 顧付托之重, 思元良之幼, 强抑于心。 而噫! 彼黨論, 辛、壬、戊申已爲殷鑑。 閉閤却膳, 其本由何, 排闥爲幾次, 免冠亦幾遭? 大訓一頒, 黑白皎然, 親授訓諭, 可質彼蒼, 而噫! 今諸臣抑何心腸, 視若尋常, 欲沮苦心? 前有得和, 後有重晦, 欲逐股肱, 其心則黨也。 噫! 予嘗體昔日小心之德, 無一毫過奉之禮。 而歷拜伸懷, 人子之道, 抑何越禮? 而前之金濰輩、後之重晦, 其亦學名流者? 閉閤之事, 豈予樂爲? 非不知金尙迪爲君之心, 而排(閽)〔㧀〕 之擧, 後弊勝言? 耳目之官, 互相依違, 趙台祥之駭擧、許采之彌縫, 亦何心哉? 停其機務, 將欲一諭。 元良執贄之期已近矣, 此歲亦將改矣。 凡我廷臣, 曉此義理, 精白一心, 輔我元良。


  • 【태백산사고본】 43책 58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20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