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태가 이정보 형제가 사당한데 대해 상소하다
장령(掌令) 이선태(李善泰)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수십 년 동안 반드시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황극(皇極)을 세우고자 하시며 공평(公平)·인협(寅協)한 디스림을 이룩할 것을 기약하셨으니, 뭇 신하의 감열(感悅)과 조정의 화협(和協)을 바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몇 백 년이나 된 습속은 변화시키기 어려워 한두 당(黨)의 고집과 억셈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몰래 명로(名路)를 통색(通塞)하는 권병(權柄)을 쥐고 전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다스림을 무너뜨리려 하니, 이는 참으로 청명(淸明)한 조정의 큰 좀인 것입니다. 다만 그 세력이 성립되고 권병이 무거워서 사람들이 누구도 어찌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은 이미 발로(發露)된 것을 가지고 한 번 진달하려고 합니다. 옛날부터 인주(人主)가 크나큰 다스림을 이룰 적에는 반드시 아래서 받들어 돕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만, 오늘날 전하께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몇 이나 됩니까? 권주(眷注)189) 하는 하교가 전후 찬성(贊成)의 의망(擬望)에 여러 번 나와 멀리 중외(中外)에 전파된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원경하(元景夏)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원경하는 출신(出身)한 초기부터 전하께서 칙려(飭勵)하시는 하교를 받고 전하의 지치(至治)를 구하시는 정성에 감격한 나머지 자기 한 몸으로 세상 일을 담당하여 들어가서는 연석(筵席)에서 진달하고 나와서는 조정에서 논의(論議)했던 것이니, 성주(聖主)를 보좌하여 지치를 이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 이정보(李鼎輔) 형제는 그의 평생 동안의 오랜 벗으로서 이에 총애가 치우치게 높음을 도리어 시기하고 언의(言議)가 혹 다름을 미워한 나머지 스스로 청론(淸論)을 주장한다고 청탁하고 극력 그의 언의를 배척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사사로운 혐의(嫌疑)를 끌어대어 편지를 보내어 절교(絶交)하더니, 끝에 가서는 또 친당(親黨)을 발탁했다고 노골적인 말로 배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암암리에 사주하고 부탁하여 서척(書尺)이 벗들 사이에 낭자한가 하면 대각(臺閣)에서는 소장(疏章)이 번갈아 나오게 되었고, 심지어는 ‘남의 집과 나라에 화(禍)를 끼치고 염치로 남을 경계한다.’는 말이 과연 그의 죽은 벗과 압객(狎客)190) 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전후에 걸쳐 탄핵을 당한 것이 모두 몇 차례나 되었는데, 그 하는 말들이 모두 한 꿰미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그것이 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전하의 참소를 미워하는 밝으심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찌 오늘날까지 보전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저 턱짓으로 삼사(三司)를 지휘하고 선비들을 마구 부린 자에 대해서 전하께서 또한 어떻게 그 정상을 죄다 통촉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아! 뿌리가 깊고 굳어서 갑자기 동요시키기 어렵고 언론(言論)이 준엄하게 나오니 충분히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합니다만, 염치없이 영화(榮華)만 탐하는 무리를 꾀어 불러모으고 한마음으로 사사로운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을 모아들여서 곧 스스로 과장(誇張)하기를, ‘아무개는 이 일을 처리하였으니 아무 벼슬에 통의(通擬)해야 하고, 아무개는 내 말을 배반하였으니 청로(淸路)를 막아야겠다.’고 하매, 이해(利害)가 즉시 판별되고 득실(得失)이 환해지니, 저 빌붙어 따르는 무리로서 앞을 다투어 공을 세우려는 자가 온 세상을 통틀어 보건대, 거의 반이나 됩니다. 그리고 한천(翰薦)을 처음 고쳤을 때에 구례(舊例)를 끌어대며 강력히 다투고 소시(召試)를 회피하여 군명(軍命)을 무시한 자야말로 어찌 모두 사당(私黨)에게 명예를 구하고 국론(國論)에 배치(背馳)된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 저 무리들은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경하입니다. 원경하가 은총을 받음이 어떠하였으며 스스로 기약했던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비록 저 무리들이 백방으로 동요시킨다 해도 원경하의 도리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을 믿고 앞으로 곧장 나아가 뜻을 지키며 동요되지 않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도리어 두려워 위축되고 기가 꺾여서 눈치를 보며 불쌍히 보아줄 것을 애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탈을 달리던 말이 반드시 잠시 멈추고자하고 활에 놀란 새가 빈 시위에 깜짝 놀라는 것처럼 거조(擧措)는 타당성을 벗어나고 정주(政注)는 중망(衆望)을 잃게 되어 전후가 판연히 양단(兩斷)한 것처럼 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저번에 춘궁(春宮)이 입학(入學)할 때의 일입니다.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괴귀(怪鬼)한 무리들을 모아서 입학 때의 집사(執事)를 패악한 말로 모욕하고, 심지어 지나간 해에 원경하의 유벌(儒罰)을 풀어준 유생들을 끌어 넣어 극벌(極罰)을 베풀고 심지어, ‘감히 상묵(庠墨)을 풀어주었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이정보 등의 풍지(風旨)를 승망(承望)하여 원경하를 원수처럼 본다 할지라도 또한 어찌 감히 이처럼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원경하가 벌을 받았을 때에는 전하께서 누차 특교(特敎)를 내리시고 심지어 성균관[國子]의 장관에게 벌봉(罰俸)까지 명하셨습니다만, 유생들은 이를 무시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에 가서야 한 유생이 엄교(嚴敎)에 몰려 비로소 벌을 풀어 주었으니, 이것이 무슨 큰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김한철(金漢喆)의 아우 김한열(金漢說)이 반임(泮任)으로서 재빠르게 그 유생에게 벌을 베풀었던 것은 이미 군부(君父)의 명을 공경히 여기는 뜻이 아니었으니, 지금 와서 다시 벌을 준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벌목(罰目)에 쓴 ‘감히[敢]’라는 글자는 가리키는 곳이 어떤 것입니까? 그 사당(私黨)을 경외(敬畏)하고 군부(君父)를 가볍게 보는 마음이 탄로났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벌을 풀어 주도록 명하신 것은 전하이셨고 명을 받들어 벌을 푼 것은 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의(黨議)가 배격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 노여움을 폭발시킬 곳이 없어 그 칼날을 옮겨 급히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습(黨習)의 소굴이 이곳에 있고 조정에서 성원(聲援)함이 여기에 있어, 진신(搢紳)과 장보(章甫)가 머리부터 꼬리까지 서로 얽혀 있는데, 이러함에도 놓아두고 지나간다면 세도(世道)의 풍파(風波)는 끝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존하의 염려하심이 이에 미쳐 반교(泮橋) 곁에 비석191) 을 세우고 성훈(聖訓)을 환히 게시하셨으니 돈어(豚漁)도 족히 감동시킬 만하였습니다만, 채 수십 일도 못되어 저 유생들이 또 이런 짓을 하여 심지어 군부(君父)의 고심(苦心)과 맞서 겨루어 반드시 완염(琬琰)192) 의 문자와 운한(雲漢)193) 의 글을 한바탕의 헛된 글로 돌리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아! 심합니다. 성상께서 만약 신의 말을 소원(疏遠)하다고 여겨 믿지 못하신다면, 근밀(近密)과 묘당(廟堂)에 하문하여 재량하여 처리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습(黨習)에 대해 칙려(飭勵)하는 것이 나의 고심(苦心)이다. 대훈(大訓)을 내린 뒤로 감히 예전 버릇을 부리는 자는 내가 마땅히 경중에 따라 면칙(勉飭)할 것이니 어찌 그 면려(勉勵)하는 것을 기다릴 것이며, 공심(公心)인지 당심(黨心)인지를 그 임금이 살필 것이니 어찌 들추어내기를 기다릴 것인가? 이 또한 예전의 버릇인데, 감히 오늘 써 먹으려 하는가?"
하고, 이어서 패초(牌招)하라고 명하였다. 이선태가 소패(召牌)를 받들고 감시관(監試官)으로서 나아가니, 드디어 하교하기를,
"이선태가 진달한 바는 그 뜻이 놀라웠다. 그가 아무리 볼품이 없다 할지라도 관명(官名)이 아까웠기 때문에 대략 조왕(錯枉)의 뜻을 보였던 것이니, 그 신칙함은 심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의기양양하게 시험을 감독하였으니 거조(擧措)가 해괴하다. 염치를 권려(勸勵)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신칙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체직(遞職)시키라."
하였다. 이때 원경하는 탕평(蕩平)을 자임(白任)하고는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 등에게 붙어 급작스레 경재(卿宰)의 반열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천보(李天輔)와 화협(和協)하지 못해 곧 구적(仇敵)이 되고 말았다. 이천보는 문장(文章)과 언론(言論)으로 바야흐로 성명(盛名)이 있었는데, 그 종부(從父) 형제인 이정보(李鼎輔)·이익보(李益輔)와 함께 청도(淸塗)194) 의 반열에 있으면서 교유(交遊)가 넓고 벗이 많았다. 이에 힘써 원경하를 배척하였으니, 원(元)·이(李)가 붕당(朋黨)을 나누었다는 표방(標榜)까지 있었다. 이에 원경하는 또 대탕평(大湯平)의 설(說)로 몰래 남인(南人)·소북(小北)과 결탁하여 조력(助力)으로 삼았다. 이선태는 남인이었는데 대각(臺閣)에 들어가자 하룻밤 사이에 이 소장을 올렸던 것이니, 이른바 사우(死友)·압객(押客)이란 김한철·이형만을 가리킨 것이라 하며, 겉으로 부추기고 속으로 누른 것은 대개 원경하의 당(黨)이 사주한 것이라 한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56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人事)
- [註 189]권주(眷注) : 은총을 베풂.
- [註 190]
압객(狎客) : 터놓고 썩 가깝게 지내는 사람.- [註 191]
비석 : 탕평비(蕩平碑).- [註 192]
완염(琬琰) : 옥(玉)으로 된 홀(笏)의 일종으로 완규(琬圭)와 염규(琰圭)를 말함. 여기에 아름다은 행실을 적어서 후세에 전하기도 한다는 말이 있음.- [註 193]
운한(雲漢) :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여왕(厲王)의 난정(亂政)의 뒤를 이어 잘 다스리려는 뜻을 품고 재변(災變)을 당해서 두렵게 여겨, 몸가짐을 조심하고 행실을 닦아서 재변을 사라지게 하려고 하였다는 시(詩)로서,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지습(蕩之什) 운한장(雲漢章)에 그 내용이 담겨 있음.- [註 194]
청도(淸塗) : 좋은 벼슬자리.○掌令李善泰上疏, 略曰:
我殿下臨御數十年, 必欲破朋, 比建皇極, 期臻公平寅協之治, 則庶幾群下感悅, 朝著和協。 而不幸累百年習俗難化, 一二黨倔强愈甚。 陰操名路通塞之權, 欲壞殿下已成之治, 此誠淸朝之巨蠧。 而但其勢成權重, 人莫誰何, 以至于此。 臣謂因其已發已露者而一陳之。 自古人主之大有爲也, 必有承佐下風之臣。 未知今日殿下倚仗者果幾人? 而若其眷注之敎, 累發於前後贊成之望, 遠播於中外者, 卽元景夏是也。 景夏自出身之初, 受殿下飭勵之敎, 感殿下求治之誠, 以一身擔當世事, 入而陳達於筵席, 出而論議於朝廷者, 似若可以佐聖主成至治, 則彼李鼎輔兄弟, 以其平生之故友, 乃反猜寵遇之偏隆, 惡言議之或岐, 自托以主張淸論, 力排其言議。 始則强引私嫌, 貽書以絶之, 終又拔擢親黨, 顯言以斥之。 暗嗾陰囑, 書尺狼藉於朋儕之間, 疏章迭發於臺閣之上, 至於禍人家國, 廉恥規人之說, 果出於其死友狎客之口矣。 其人之前後遭彈, 凡幾遭矣, 其爲說一串貫來, 則可知其非出別人也。 向非殿下堲讒之明, 則渠安能保有今日? 而彼頣指三司, 驅使章甫者, 殿下亦何以盡燭其情狀也? 噫! 根柢深固, 猝難動撓, 言論峻發, 足可感人, 招誘無恥饕榮之流, 汲引同心私好之徒, 輒自揚言曰, ‘某人辦此事, 可以通某官, 某人背吾言, 可以枳淸路,’ 利害立判, 得失昭然, 則彼趨附之輩, 爭先立功者, 擧一世而殆半之矣。 至於翰薦之始改也, 引舊例而强爭, 避召試而慢命者, 何莫非要譽於私黨, 背馳於國論者哉? 噫! 彼輩無足道也, 所可恨者, 景夏耳。 景夏之受恩如何, 自期如何? 雖彼輩百般動撓, 在景夏之道, 固當信己直前, 守志勿撓。 而乃反畏縮沮喪, 顧瞻乞憐。 走坂之足, 必欲暫駐, 傷弓之鳥, 輒驚虛弦, 擧措乖當, 政注失望, 前後判若兩截, 寧不痛哉? 向日春宮入學時, 儒生輩募得怪鬼之類, 醜辱入學時執事, 而至於攙入頃年元景夏解罰之儒生, 施以極罰, 至曰敢解庠墨云。 渠雖承望鼎輔輩風旨, 仇視景夏, 亦安敢不顧事體若是也? 當景夏之被罰也, 殿下屢下特敎, 至命國子長罰俸, 而儒生慢不膺命。 最後一儒生迫於嚴敎, 始乃解之, 則此胡大罪? 而其時金漢喆之弟漢說, 以泮任亟施罰於其儒生者, 已非敬君命之意, 則到今再罰, 可謂已甚。 況其罰目下一敢字, 指着何處? 其敬畏私黨, 輕視君父之心, 自不覺綻露矣。 初命解罰, 殿下也, 承命解罰, 儒生也。 而黨議之排擊如此, 可見無所發怒, 至於移鋒急擊也。 黨習之窩窟在此, 朝廷之聲援在此, 搢紳章甫首尾糾結, 此而放過, 則世道風波終無可息之日也。 殿下慮及於此, 立碑橋傍, 昭揭聖訓, 有足以孚豚魚, 曾未數旬, 彼儒生又作此擧, 至欲角勝君父之苦心, 必使琬琰之字、雲漢之章, 歸於一場虛文而後已, 噫嘻甚矣! 聖上若以臣言爲踈遠而未信, 則宜下詢於近密與廟堂而裁處焉。
批曰: "飭勵黨習, 卽予苦心。 大訓之後, 其敢舊習者, 予當從輕重勉飭, 何待其勉, 公心黨心, 其君察之, 何待訐揚? 此亦舊習, 敢售今日乎?" 仍命牌招。 善泰承牌以監試官進去, 遂下敎曰: "李善泰所陳, 意涉駭也。 而渠雖無謂, 官名可惜, 故略示錯枉之意, 其飭深矣。 揚揚監試, 擧措駭然。 其在礪廉恥之道, 豈可無飭? 遞其職。" 是時元景夏以蕩平自任, 附於宋寅明、趙顯命等, 驟擢卿列。 而與李天輔不協, 仍成仇敵。 天輔以文章、言論, 方有盛名, 與其從父兄弟鼎輔、益輔, 幷列淸塗, 廣交遊多朋儕。 力排景夏, 至有元、李分朋之標榜。 於是景夏又以大蕩平之說, 陰結南人、少北以爲之助。 善泰南人也, 入臺一夜之間, 遽陳此疏, 所謂死友、狎客, 指金漢喆、李衡萬云, 而陽扶陰抑, 蓋景夏之黨所指使也。
- 【태백산사고본】 41책 56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人事)
- [註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