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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55권, 영조 18년 1월 25일 을유 4번째기사 1742년 청 건륭(乾隆) 7년

유신을 불러 《자치통감》을 강하다

이날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지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였는데, 춘방관(春坊官)028) 도 함께 들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하루 종일 동가(動駕)한데다가 또 밤도 깊었으니, 진실로 사대(賜對)할 때는 아니나, 북도 백성을 생각하여 어사도 만나보고 싶었고 또 하유(下諭)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이 때문에 피로한 줄을 모르겠다. 원량(元良)029) 이 이제는 나이가 되었으니, 양양(洋洋)하게 척강(陟降)하는 선령들도 또한 어찌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종묘에 배알하고 돌아오니 기쁨도 대단하지만 또한 서글픈 마음도 없지 않다. 배궤(拜跪)가 절도에 맞고 행동이 성인 같음을 보고 사람들은 필시 미리 절하고 일어서는 절차를 가르쳤을 것으로 여길 것이나, 나는 그러한 일이 절대로 없었다. 심지어 글자 중에서 분별하기 어려운 자라도 《동몽선습(童蒙先習)》 속에 있는 글자라면 반드시 기억했다가 짚어서 보여주니, 그 총명함을 알 만하다. 옛날 임금들이 간혹 소년 천자(少年天子)란 말을 듣기 싫어했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이제는 종묘에 배알하는 예도 이미 행하였고 입학할 기일도 정해졌다. 그러나 나이 아직 어리니, 나의 마음은 두렵기만 하다. 여러 신하들을 빙 둘러보아도 어린 세자를 맡길 만한 사람을 볼 수 없고 나의 박덕[凉德]으로는 경복(慶福)을 끼쳐 줄 가망도 없는데 신하들을 조정하여 기어코 좋은 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몇 년을 고심해 보았지만 아직도 실효가 없으니, 이 또한 나의 성의가 부족한 소치이다.

방금 광무기(光武紀)를 강했는데, 광무는 말하기를, ‘적심(赤心)을 미뤄서 남의 뱃속[腹中]에 넣어 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뜻은 있어도 이루지 못하니 자신을 돌아볼 때 부끄러움이 많다. 지금 군신(群臣)들에게 바랄 것은 나의 이 마음을 본받아 한마음으로 협조하여 나의 원량을 도와준다면, 이는 바로 나를 저버리지 않음이 되는 것이다. 궁료(宮僚)들은 세자를 보도하는 데 문의(文義)뿐만 아니라 오직 기거(起居)·언동(言動)의 절차까지도 일에 따라 바루어 주고, 비록 내시들이 만약 근실치 못한 자가 있으면 그것도 또한 마땅히 위에 아뢰어 엄히 단속해야 할 것이다. 국조(國朝)의 성대할 때에는 춘방(春坊)에 친림(親臨)하여 궁관을 자(字)로 부른 일이 있어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상하 간에 정의가 서로 화합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바로 미사(美事)인 것이다. 비록 한 무제(漢武帝)가 군신을 대접함에 자못 소탈함을 숭상하였지만 유독 급암(汲黯)030) 을 만나 볼 때만은 관을 쓰고 대한 것을 보면 관을 쓰지 않았을 때도 필시 많았던 것이다. 지금은 예모(禮貌)를 너무나 차려 동궁이 궁료(宮僚)를 인견할 때에도 더욱 예모를 갖추기 때문에 정의가 통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강연(講筵)을 여는 것도 또한 따라서 사이가 뜨게 되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 풀릴 때를 당하면 강연을 열도록 하겠으니, 궁관들은 모름지기 이런 뜻을 알아서 조용히 선도하기를 옛사람이 버들가지 하나 꺾는 것도 간하고 개미 한 마리 밟는 것도 경계하듯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어 서연(書筵)을 열어 산림(山林)의 독서(讀書)하는 선비를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5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註 028]
    춘방관(春坊官)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원.
  • [註 029]
    원량(元良) : 왕세자.
  • [註 030]
    급암(汲黯) : 한대(漢代)의 간신(諫臣).

○是夜召儒臣, 講《資治通鑑》, 命春坊官同入, 敎曰:

竟日動駕, 又値夜深, 固非賜對之時, 然爲北民, 欲見御史, 且有欲諭者, 是以不知疲也。 元良今則年歲稍長, 能隨予行廟見之禮, 責之以成人之事, 洋洋陟降之靈, 亦豈不悅豫? 而拜廟歸來, 喜極而亦不無感愴之心矣。 觀其拜跪中節, 動若成人, 人必以爲預敎其拜起之節, 而予固無是。 至於文字中難辨之字, 若在《童蒙先習》之中, 則必記誦而拈示之矣, 可見其聰明矣。 前世人君, 或惡聞少年天子之語, 而予心則不然。 今則廟見之禮已行, 入學之期又定。 而年尙稚藐, 予心懍然。 環顧諸臣, 未見有可托六尺者, 以予涼德, 無望垂裕, 而調劑臣隣, 期於致治, 雖予幾年苦心, 尙無實效, 亦予誠不足之致也。 今講光武(記)〔紀〕 , 光武豈不云乎, ‘推赤心置人腹中?’ 又云, ‘有志者事竟成,’ 予則有志未成, 反顧多慙。 今之所望於群下者, 體予此心, 同寅協恭, 輔我元良, 則是乃不負予也。 宮僚輔導, 不但文義而已, 雖起居言動之節, 隨事規諫, 雖閹寺之類, 如有不謹者, 亦宜陳白嚴束也。 國朝盛時, 親臨春坊, 字呼宮官, 至今傳爲美談, 上下之間, 情志相孚, 知無不言, 此乃美事也。 雖以 武帝接待群臣, 頗尙簡易, 而獨冠於見之時, 則必多有不冠時矣。 今則禮貌太勝, 至於東宮引見宮僚之時, 則尤矜持禮貌, 故不但情志難通, 開筵亦隨以間闊。 當於日氣稍和之時, 使開講筵, 宮官須知此意, 從容善導, 宜如古人折柳之諫、避蟻之箴也。

諸臣仍請開書筵, 敦召山林讀書之士,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41책 5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