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 소시법을 제정하다
한림 소시법(翰林召試法)을 제정하였다. 처음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사관을 강독(講讀)에 응하게 하는 것은 실제로 형식에 불과하니,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인재를 뽑는다면, 오히려 강독에 응하게 하는 것보다 낫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회시(會試)는 박절한 듯하다."
하자, 동지춘추관사 정우량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지제교(知製敎)의 시험이 있었으니 공평한 도리를 삼으려고 한다면 회시(會試)만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시골 사람으로 말하더라도 사환(仕宦)할 수는 없지만 과거(科擧)는 볼 수가 있는데, 과제(科制)에다 권점법(圈點法)을 두게 되면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할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회시하는 법이 공정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회시의 이름을 고쳐서 소시(召試)로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에게 명하여 절목(節目)을 의논해서 정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여덟 조목이었다. 이르기를,
"첫째, 소시(召試)의 처소는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서 설행한다.
둘째, 이미 소시하는 전례를 본받아 당일에 응시하는 인원을 패초(牌招)하여 소시하되, 패초를 어기거나 지방에 있다고 핑계대는 자는 나추(拿推)한다.
셋째, 시취(試取)할 때 대신 및 관각 당상관과 춘추관 당상관이 함께 나아가 참여하며, 대독관 4원(員)은 옥당(玉堂)의 관원으로 차출한다.
넷째, 양사(兩司)에서 각각 1원(員)씩 감시관(監試官)으로 월대(月臺)에서 마주 앉아 일에 따라 규검(糾檢)하되, 시관과 섞여서 있지 않도록 한다.
다섯째, 시험에 나아간 인원은 중시(重試) 때의 복색(服色)을 입는다. 시험에 쓸 종이·붓·벼루는 공조와 장흥에서 진배(進排)하고 점심은 응판소(應辨所)에서 영(令)을 기다린다.
여섯째, 시험에 나아간 인원이 스스로 시권(試券)을 써서 올리면 뒤섞어서 축(軸)을 만들고 글자를 채워서 역서(易書)067) 한다.
일곱째, 시관이 응시한 사람을 인솔하여 숙배(肅拜)하는 일 및 수권관(收券官)·역서관(易書官)·사관(査官)·지동관(枝同官) 등의 일은 한결같이 전시(殿試)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한다.
여덟째, 시험에 나아간 인원의 사환군(使喚軍)은 해조(該曹)에서 원래의 군사를 지정하여 지급하고 잡인은 출입할 수 없게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3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
- [註 067]역서(易書) : 시관(試官)이 과거 답안(科擧答案)의 필체(筆體)를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서리(胥吏)들로 하여금 붉은 글씨로 바꿔 쓰게 하던 것.
○立翰林召試法。 初左議政宋寅明啓言: "史官應講, 實爲文具, 試製取才, 則猶勝於應講矣。" 上曰: "會試似迫切矣。" 同春秋鄭羽良曰: "古有知製敎試, 欲爲公道, 莫如會試。 雖以鄕人言之, 仕宦則不得爲之, 科擧則能得爲之, 科制有圈點法, 則嶺南湖南之人, 豈有得參之理乎? 然則會試之法似公矣。" 上笑曰: "卿言是也。" 遂以會試, 改名爲召試, 命領議政金在魯等議定節目, 凡八條。 其一, 召試處所, 以時御所殿庭設行也。 其二, 旣倣召試之例, 當日應試人員, 牌招召試, 而違牌及稱在外者, 拿推也。 其三, 試取時, 大臣及館閣堂上、春秋館堂上竝進參, 對讀官四員, 以玉堂差出也。 其四, 兩司各一員, 以監試官對坐月臺, 隨事紏檢, 毋得與試官雜處也。 其五, 就試人員, 服重試時服色。 試紙、筆、硯, 自工曹、長興庫進排, 午飯自應辦所待令也。 其六, 就試人員, 自書呈券, 翻混作軸, 塡字易書也。 其七, 試官率應試人肅拜及收券官、易書、査、枝同官等事, 一依殿試例擧行也。 其八, 就試人員使喚軍, 自該曹以元軍定給, 雜人無得出入也。
-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3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