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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4월 19일 계축 2번째기사 1741년 청 건륭(乾隆) 6년

이조 낭청을 통청하는 법과 한림을 회천하는 규례를 혁파하도록 명하다

이조 낭청을 통청(通淸)하는 법과 한림(翰林)을 회천(回薦)하는 규례를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늘 조정의 붕당(朋黨)을 근심하였는데, 이조 낭청과 한림을 선발할 때를 당하면 피차 두 당에서 서로 부호하고 억제하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그들의 하는 짓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이미 경장(更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원경하(元景夏)·정우량(鄭羽良) 등 여러 사람들이 극력 찬성하니, 이에 임금의 뜻이 결정되어 이 날 한림 황경원(黃景源)을 불러다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문하기를,

"한림의 추천은 국초(國初)에 시작되었는가?"

하였는데,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국초부터 있었습니다만, 광해군(光海君) 때에 이르러 이이첨(李爾瞻)이 대제학으로 추천을 주관하면서 흉당(凶黨)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관각(館閣)에서 추천을 주관하는 법이 이이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조(仁祖)께서 개옥(改玉)하기에 이르러 추천하는 법이 옛날대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하교하기를,

"기강(紀綱)이 위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권병(權柄)이 아래에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우리 나라는 예의(禮義)로 법을 제정하여 개국(開國)한 이후로 권신(權臣)이 권병을 도둑질한 경우는 없었으나, 다만 문(文)을 숭상한 폐단이 있었으니, 어찌 쇄약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아! 당습(黨習)이 나의 여러 신하들을 함몰(陷沒)시키고 기강을 문란시키고 있으니, 교목(喬木)의 신하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편당 만드는 것뿐이다.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통(通)하게 되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고, 폐단이 극도에 이르면 바뀌어지는 것은 일의 적당함이다. 그것을 만약 고치거나, 바꾸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조 낭청의 추천은 비록 혁파하더라도 통청(通淸)하는 권한이 그대로 있으면, 이름은 바꾸었다고 하지만 폐단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국초의 옛 제도가 아니고,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기재되어 있지도 않은데, 낭관이 사사로운 뜻을 행하는 문(門)을 따라 우리 조정의 공정함을 전하는 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나의 뜻은 경장(更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구전(舊典)을 따라 폐단을 인해서 개혁하려는 것이다. 이조 낭청의 통청을 마땅히 먼저 혁파해야 할 것이니, 그 절목(節目)을 대신과 총재(冡宰)가 고사(故事)를 널리 상고하여 품지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한림의 추천은 3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인데, 비록 하루아침에 혁파할 수는 없다 하나, 한번 함께 병용한 후부터 분경(奔競)과 야료가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저편에서 패하면 이편에서 추천하고 이편에서 패하면 저편에서 추천하는 등 마치 서로 보복하는 듯하니, 이 뒤로는 한번 방(榜)을 써 붙인 뒤에 응당 한림으로 추천할 자는 분관(分館)하는 예에 의거하여 빠뜨림 없이 모두 추천한다면, 결단코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서로 야료를 부리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본관(本館)의 영사(領事)·감사(監事)·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하여금 일제히 모여 절목을 강정(講定)해서 아뢰도록 하라. 아! 권강(權綱)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지면, 왕정(王政)이 진작되지 못하니, 그 계획과 그 결단을 윗사람이 하지 아니하고 누가 하겠는가? 아! 소신(小臣)들은 사사로운 뜻을 행하려고 감히 저지시키거나 방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1면
  • 【분류】
    인사(人事) / 왕실-국왕(國王)

○命革罷吏郞通淸之法及翰林回薦之規。 上每以朝廷朋黨爲憂, 而當吏郞、翰林之選也, 彼此兩黨, 互相扶抑, 爭鬨不已, 上厭惡其所爲, 已有更張之意。 而宋寅明趙顯命元景夏鄭羽良諸人力贊之, 於是上意遂決, 是日召翰林黃景源進前, 問曰: "翰薦昉於國初乎?" 景源曰: "自國初有之, 而至光海時, 爾瞻以大提學主薦, 援引凶黨, 故館閣主薦之法, 自爾瞻始。 逮至仁祖改玉, 薦法復古矣。" 上遂敎曰: "紀綱在上則治, 權柄在下則亂。 我國以禮義立法, 自開國以後, 無權臣之竊柄, 而但文勝之弊, 非衰而何? 吁嗟! 黨習陷我諸臣, 亂我紀綱, 喬木之臣所知者惟黨。 物極則通, 理之常也, 弊極則革, 事之宜也。 其若更革, 宜正其本。 吏郞之薦雖革, 通淸之權猶在, 名雖革而弊猶在。 此非國初古制, 亦不載《大典》, 而循郞官行私意之門, 亂我朝垂公正之法, 予意非欲更張, 欲隨舊典而因弊釐革。 吏郞通淸宜先革之, 其節目, 大臣、冡宰博考故事, 稟旨以處。 而翰薦三百年流來之規, 雖不可一朝革罷, 一自竝用之後, 奔競惹鬧專由於此。 彼敗此薦, 此敗彼薦, 若相報復, 此後則一榜之後, 應爲翰薦者, 依分館例, 盡薦無遺, 則決無計較多少, 相爲惹鬧之弊。 其令本館領ㆍ監事、知春秋齊會, 講定節目以稟。 噫! 權綱下移, 王政不振, 其謀其斷, 非上而誰? 吁嗟! 小臣欲行私意, 毋敢沮戲。"


  •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1면
  • 【분류】
    인사(人事)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