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의 묘와 이이의 화석정의 옛터를 보고, 저녁에 송도에 이르다
임금이 파주에서 출발하여 도중에 선정신 성혼(成渾)의 묘를 보고 교자(轎子) 안에서 허리를 굽혀 예(禮)를 표하고 직접 제문(祭文) 두 구(句)를 지었으니, 말하기를,
"지금 나의 고심(苦心)은 곧 선정의 마음이다. 길가 교자 안에서 허리 굽히니 감개한 마음 한없이 깊도다."
하였다. 이를 치제(致祭)의 제문(祭文)에 첨입(添入)하라고 명하였다. 박석현(朴石峴)에 이르러서는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고 농사의 형편을 하문하고 나서 탄식하기를,
"벼 이삭이 된 서리에 손상되어 빈 껍질만 남았으니, 그대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한참 동안 가엾게 여겼다. 임진(臨津)에 이르러 교리 김한철(金漢喆)이 아뢰기를,
"이 곳은 서로(西路)의 요충지입니다. 앞으로는 삼면(三面)에 천연의 요새가 있고 또 긴 강이 가로막고 있어 버리기 아까운 곳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덕정(德政)을 닦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세(地勢)가 험준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하였다. 부교(浮橋)를 건너 북쪽 언덕에 이르러서는 선정신 이이(李珥)의 화석정(花石亭)의 옛터를 하문하니, 승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저 남쪽 언덕 위에 소나무와 전나무가 있는 가운데 날아갈 듯이 드러나 있는 것이 그 정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는 우계(牛溪)의 묘를 보았고 지금은 선정이 거처하던 곳을 바라보니, 덕용(德容)을 접한 것 같아 창연(愴然)한 마음이 배나 간절하다."
하고, 또 직접 제문(祭文) 두 구(句)를 지어 치제(致祭)하는 제문에 첨입하도록 명하였다. 저녁에 송도(松都)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추궁(楸宮)209) 에 나아갔다. 임금이 어비(御碑)를 어루만지면서 슬픈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숙종(肅宗)께서 계유년210) 에 송경(松京)에 거둥하였을 적에 칠언 절구(七言絶句)로 된 시 하나를 직접 돌에 써서 새겨 세운 것이었다. 임금이 그 운(韻)에 따라 지어서 삼절헌(三節軒)에 걸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오늘 보각을 우러러봄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옛날 이곳에 선왕께서 임어하셨다네.
어찌 소자만 창연한 마음 간절할 뿐이겠는가?
지극하고도 깊은 인덕 영원히 끝이 없는데."
하였고, 또 시 두 수를 모두 걸게 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옛 남루에서 어필을 받들어 읽으니
성심이 유람에 있지 않았음을 알겠네.
어찌 송도 백성만 은택을 입었을 뿐이겠는가?
많은 백성 돌보는 마음 팔도에 넘쳤다데."
"물색이 쇠잔한 옛 도읍지 적막기만 한데
만월대 터 하나만 휑덩그렁하게 남았을 뿐이네.
옛날 창업할 당시를 추억하노라니
산천의 경상(景像)이 내 맘을 감동케 하네."
하였다. 임금이 추궁에서 돌아와 만월대(滿月臺)에 나아가니, 관리사(管理使) 김약로(金若魯)가 군례로 알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생(書生)은 군려(軍旅)에 대해 익히지 않았는데도 출입하고 배궤(拜跪)함에 있어 갑주(甲冑)를 입은 장군의 풍도가 있다. 그리고 모든 절도(節度)가 경군문(京軍門)에 밑돌지 않으니, 이는 관리사가 융정(戎政)을 수거(修擧)한 효험인 것이다. 특별히 구마(廐馬)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50년 뒤에 비로소 이곳에 와서 옛날을 추상(追想)하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나의 이번 행차는 단지 선조(先朝)의 고사를 추모하여 두 능에 전배(展拜)하고 또 고도(故都)를 살펴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만월대에 오르니 계구(戒懼)하는 마음이 도리어 깊어진다. 빙 둘러싸고 있는 성곽과 잘 배포된 궁전이 바둑알이나 별처럼 나열되어 있는 유지가 아직 완연한데, 마침내 나무하고 소나 말을 먹이는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고려 태조가 창업하였을 때 어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될 줄 알았겠는가? 그 자손이 된 자들이 조종(祖宗)이 어렵게 이루어 놓은 서업(緖業)을 생각하지 않고서 사욕(私慾)을 함부로 부리다가 그 서업을 실추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만년 천자(萬年天子)라는 말이 어찌 경계하는 것인 줄 알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오싹하여 두려워진다. 경 등은 오늘날의 시상(時象)을 관찰하여 보라. 당론(黨論)의 해독이 신돈(辛旽)211) 보다 더하다. 군신 상하가 척연(惕然)한 마음가짐으로 경계하여 징계하고 고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 승국(勝國)212) 같은 결과가 되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금 고도(故都)에서 성교를 우러러 받드니 그 계구(戒懼)하는 뜻이 넘쳐 흘러 신명(神明)도 미덥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자질로 외람되이 삼사(三事)로 있으면서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낼 뿐 전혀 보답한 공적이 없었으므로 매양 부끄럽고 위축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신은 선조께서 이곳에 임어하셨을 때 지은 어제시에, ‘인간의 흥망에 대한 일을 알려거든[欲識人間興喪事] 모쪼록 이훈(伊訓)213) 의 내용을 눈여겨 보고 생각하라[須將伊訓翫心思]’고 한 글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그 계구(戒懼)하게 하는 내용을 신은 항상 흠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교가 선조의 어제시와 똑같은 성의(盛意)이니 신이 감히 우러러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승국(勝國)은 중엽 이후로 군신 상하가 강구한 것이 좌도(左道)214) 뿐이었고, 또 강신(强臣)이 명령을 집행하여 권병(權柄)이 아래에 옮겨졌으니 어떻게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승국과 다른 것은 열성조에서 오로지 유화(儒化)만 숭상한 것입니다. 그 뒤 문(文)이 승한 폐단 때문에 마침내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 너무 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지금의 분열된 당론도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하고, 수찬 정휘량(鄭翬良)은 아뢰기를,
"타성에 젖기 쉬운 것이 인심입니다. 일념(一念)으로 계구(戒懼)하여 항상 미래의 일을 과거의 일처럼 여겨 조심한다면 만세토록 태평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이 여기에서 다져지게 될 것입니다."
하고, 교리 김한철은 아뢰기를,
"오늘 아침 임진(臨津)에 대가(大駕)가 주차했을 적에, ‘덕을 닦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지세의 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하교가 있었다는데, 임금이 덕을 닦지 않는다면 성지(城池)가 아무리 공고해도 망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과거 고려의 임금들이 덕을 잘 닦았더라면 전하께서 오늘날 어떻게 이 만월대에 임어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은감(殷鑑)이 여기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성덕의 연마에 힘쓰시어 뒷사람으로 하여금 또한 오늘날에 옛날을 보는 것처럼 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안색을 고치고 가상히 여겨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신하들이 임금에게 고함에 있어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된다."
하고, 충성스럽고 순박한 것이 가상하다 하여 특별히 고비(皐比)를 하사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신은 그 소중함이 서로 면려하는 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만월대에서의 면계(勉戒)를 잊지 않겠으니, 유신은 호피(虎皮)의 상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52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78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농업(農業) / 정론-간쟁(諫諍) / 어문학(語文學) / 군사(軍事) / 역사-편사(編史)
- [註 209]추궁(楸宮) : 태조(太祖)의 옛 궁궐.
- [註 210]
계유년 : 1693 숙종 19년.- [註 211]
신돈(辛旽) : 고려 말기의 요승.- [註 212]
승국(勝國) : 멸망한 나라. 곧 고려를 이름.- [註 213]
이훈(伊訓)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으로, 그 내용은 이윤(伊尹)이 은(殷)나라 임금 태갑(太甲)을 훈도(訓導)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 [註 214]
좌도(左道) : 불교.○戊辰/上自坡州進發, 路見先正臣成渾墓, 式於轎內, 親製祭文二句曰: "今予苦心卽先正心, 式轎路傍感慨冞深。" 命添入於致祭文中。 到磚石峴, 集父老問農形, 歎曰: "禾穗爲嚴霜所剝, 只空殼而已, 若等何以爲生也?" 愍然者久之。 到臨津, 校理金漢喆曰: "此西路要衝也。 前有三面天塹, 又有長江險阻, 棄之可惜。" 上曰: "此在自修, 獨不聞不在險之言乎?" 旣渡浮橋, 至此岸, 問先正臣李珥 花石亭舊址, 承旨以手指點曰: "彼南岸上松檜中, 翼然露出者, 是其亭也。" 上曰: "俄視牛溪墓, 今望先正所居, 若接德容, 倍切愴然。" 又親製二句祭文, 命添入於致祭文。 夕次松都, 直詣楸宮。 【太祖舊宮也。】 上摩挲御碑, 悲不自勝, 蓋肅廟癸酉幸松京, 以七言絶句一詩, 親寫石面, 刻而竪之者也。 上賡其韻, 以揭于三節軒, 其詩曰:
何幸今辰瞻寶閣, 昔年此地龍飛宮。 奚但小子愴心切, 至德深仁永不窮。
又以二詩竝揭之, 其詩曰:
御筆奉覩故南樓, 仰認聖心豈愛遊。 松民奚但蒙恩澤, 恤恤元元遍八州。 舊都物色漠然衰, 只有月臺廣一基。 追憶往年創業歲, 山川景像感余思。
上自楸宮還御滿月臺, 管理使金若魯以軍禮見, 上曰: "書生不閑軍旅, 而出入拜跪, 有介冑之風。 且凡節不下於京軍門, 此管理使修擧戎政之效, 特賜廐馬。" 仍顧謂諸臣曰: "五十年後始到此地, 追惟昔年, 愴懷彌切。 予之此行, 只欲追先朝故事, 展拜兩陵。 且欲觀故都, 及登此臺, 戒懼還深。 城郭之周遭、宮殿之排布, 碁羅星列, 遺址尙宛然, 而畢竟爲樵牧之場。 麗 太祖創業時, 豈知有今日乎? 爲其子孫者, 不念祖宗艱難之業, 縱慾自恣, 以至荒墜厥緖, 萬年天子之說, 豈知戒乎? 思之至此, 不覺懍然而懼。 卿等試觀今日之時象, 黨論之害, 甚於辛旽。 君臣上下, 若不惕然警懼, 思所懲革, 則又安知不爲勝國之歸也?" 左議政金在魯曰: "今於故都, 仰承聖敎, 其藹然戒懼之意, 有足以孚格神明。 如臣無似, 忝在三事, 一日二日, 全蔑報效, 每切恧縮。 臣嘗記先朝臨此有御製中, 欲識人間興喪事, 須將伊訓翫心思之句, 戒懼之意, 臣常欽仰, 而聖敎與先朝御製, 一般盛意, 臣敢不仰體, 而第勝國則中葉以後, 君臣上下之所講究者, 惟左道而且强臣執命, 權柄下移, 安得不亡也? 我國異於勝國者, 列聖朝專尙儒化。 其後文勝之弊, 終至於名勝, 卽今黨論之分裂, 皆由於此矣。" 修撰鄭翬良曰: "易狃者人心也。 一念戒懼, 常以未來之事, 如已往之事, 則太平萬世, 其本在此矣。" 校理金漢喆曰: "今朝臨津駐駕時, 有在德不在險之敎。 君不修德, 雖有城池之固, 鮮或不亡。 向使麗君若能修德, 殿下今日安得臨此臺乎? 殷鑑在此, 願殿下益懋聖德, 毋俾後人, 亦猶今之視昔焉。" 上動容嘉歎曰: "人臣告君, 當如是也。" 以忠樸可嘉, 特賜皐比。 敎曰: "君臣貴在相勉。 予則毋忘滿月臺之戒, 儒臣毋忘虎皮之賞可也。"
- 【태백산사고본】 38책 52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78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농업(農業) / 정론-간쟁(諫諍) / 어문학(語文學) / 군사(軍事) / 역사-편사(編史)
- [註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