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등을 인견하다. 원경하가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여 공도를 넓힐 것을 말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기를,
"경이 전에 규모를 세운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제 다시 상세히 아뢰라."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국시(國是)를 정하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언로(言路)를 여는 세 가지가 그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는 혹 사문(斯文)의 일 때문에 신하들을 진퇴(進退)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변하지 않는 논의를 정하여 바꾸지 말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공도를 넓힌다는 것은 우리 나라는 문관(文官)의 수가 많고 관직의 자리가 좁아서 그 당이 아니면 될 수 없거니와 그러므로 예전에 풍릉(豐陵)117) 의 호대(互對)하게 하였다는 말이 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언로를 연다는 것은 일을 하고 일을 논할 때에 백관(百官)이 서로 경계하는 길은 열지 않을 수 없으나, 당론(黨論)으로 남을 무함하는 자는 엄히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교리 원경하(元景夏)에게 묻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공도를 넓히고 언로를 연다는 말은 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국시를 정하는 것으로 말하면 신에게도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하여 보라."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접때 문랑(問郞)으로서 처음으로 임인년118) 의 옥안(獄案)을 보았더니, 제목은 삼수 역안(三手逆案)이라 쓰고 문안 가운데에는 맨 먼저 목호룡(睦虎龍)의 흉악한 글과 흉악한 공초(供招)를 썼는데 혹 수십 자 또는 1백여 자를 삭제하고 주를 달기를, ‘말이 부도(不道)를 범하였으므로 삭제하였다.’ 하였습니다. 부도한 말을 이미 삭제하여 인심을 의혹시키고서 또 이렇게 주를 달았으니, 어찌 불측(不測)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한 신하들이 목호룡을 엄히 다스리지 않고 곧바로 부도한 말을 써서 흉악한 글과 흉악한 공초를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처럼 여겼으니, 이 옥안은 한때라도 천지 사이에 둘 수 없습니다."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죄다 말하라."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 등이 불령(不逞)한 무리이기는 하나, 목호룡의 고변(告變) 때문에 거짓으로 승복하고 죽게 된 것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말이 공정하다. 그때 내가 사위(辭位)한 일이 있는데 경묘(景廟)의 지인(至仁)·성덕(盛德)이 아니었으면 내게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위한 뒤에 목호룡을 형추(刑推)해야 한다고 말하여도 그때 일을 맡은 자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나, 그때 사람들이 어찌 다 나에게 반역할 마음을 가졌겠는가? 김성절(金盛節)·조흡(趙洽) 등은 참으로 변변치 못하나 그 마음을 캐어 보면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 승복하였을 것이니, 또한 잔인하다."
하였다. 원경하가 드디어 무안(誣案)을 신설(伸雪)해야 하는 의리를 아뢰었는데, 송인명이 망설이고 막는 뜻이 있으므로, 원경하가 배척하여 말하기를, ‘대신이 춘방(春坊)이었을 때에 이필(李泌)의 일119) 을 가지고 조태구(趙泰耉)를 꾸짖은 것은 보호(保護)한 공이 있다 하겠으나, 정미년120) 의 반안 때에 마음껏 다하지 못한 것은 그르다.’ 하니, 송인명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원경하의 말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조현명(趙顯命)에게 묻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요사한 무리가 깊은 밤에 밀실(密室)에서 은(銀)을 모으고 모의하였으면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목호룡에게 고발된 것은 임금을 핍박하는 말이 많이 있었으니, 경묘의 역신(逆臣)이 아니면 전하의 역신입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이들은 목호룡의 흉악한 공초 때문에 죽었는데, 어찌 반역으로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과 풍원(豐原)121) 이 아뢴 것도 오히려 말단의 일이다. 그때 빚어 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김용택 등을 역적으로 여긴다면 이른바 추대한다고 한 것은 누구인가? 서덕수(徐德修)가 이미 신설되었으니 김용택 등이 신설되지 않는 것이 어찌 왕자(王者)의 정사이겠는가? 목호룡의 일을 의리라고 생각하는 자는 그르다. 신축년122) 에 저사(儲嗣)를 세우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가 망하였을 것이다. 삼종(三宗)의 혈통은 황형(皇兄)과 내가 있었을 뿐이니, 그들이 애경(愛敬)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만히 등지고 떠났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공(功)을 탐내는 마음을 일으켜 정책(定策)의 공을 꾀하였으니, 이것은 이심(利心)이다. 또 경묘께서 후사(後嗣)가 없는데 신축년에 저사를 세운 것을 그르게 생각하는 자는 나에게 불충(不忠)하였으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들이 어찌 감히 추대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전하께서는 숙묘(肅廟)의 아들이고 경묘의 아우이시므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전하께 부탁해야 할 것이니, 김용택 등이 어찌 감히 공을 마음대로 할 마음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국시(國是)를 정한 것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처분이 한 번 전도(顚倒)되면 나라가 말할 것입니다. 호대하게 한다는 말은 구차하고 어려운 것인 줄 알기는 하나 마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탕평(蕩平)의 정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마는, 노론(老論)·소론(少論)을 호대하게 하고 말면 어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동인(東人)·서인(西人)·남인(南人)·북인(北人)을 물론하고 재주에 따라서 쓴 뒤에야 공도(公道)를 넓힌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공정함을 칭찬하였는데, 이 뒤부터 임금이 또 남인과 소북(小北)을, 등용하려 하였다. 대개 원경하는 사람됨이 간사하고 누추하며 조정에서 논의하는 것이 자못 느슨하여, 이 때문에 동배(同輩)가 시끄러이 공박하니, 원경하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 염려하여 드디어 무옥(誣獄)을 반안(反案)해야 한다고 말하여 스스로 동배에게 해명하고, 또 남인·북인의 당을 통용(通用)할 것을 말하여 임금에게 영합하려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더럽게 여기고 이를 일컬어 대탕평(大蕩平)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6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註 117]풍릉(豐陵) : 조문명(趙文命).
- [註 118]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19]
이필(李泌)의 일 : 이필(李泌)은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의 재상(宰相). 덕종이 태자(太子)를 폐하려고 하니, 이필(李泌)이 절간(切諫)하여 이를 말렸음.- [註 120]
○上引見大臣備堂。 上謂右議政宋寅明曰: "卿前言立規模之說, 今更詳陳也。" 寅明曰: "定國是、恢公道、開言路三者是也。" 上曰: "國是何謂也?" 寅明曰: "先朝或以斯文事, 有進退臣僚之擧, 今則定爲不易之論, 毋使移易可矣。 恢公道則我國文官數多, 官職窠窄, 若非其黨, 則不得焉。 故昔日豐陵互對之說, 爲此而發也。 開言路則就事論事, 官師相規之路, 不可不開, 而以黨論陷人者, 宜嚴加隄防也。" 上問校理元景夏, 景夏曰: "恢公道、開言路之說, 大臣之言是也。 至於定國是, 則臣亦有思量者矣。" 上曰: "第言之。" 景夏曰: "臣頃以問郞, 始見壬寅獄案, 則題目書以三手逆案, 案中首書虎龍凶書凶招, 而或數十字、或百餘字割去。 懸註曰: ‘語犯不道刪去。’ 云, 不道之言旣割去, 使之疑惑人心, 而又如是懸註, 豈不叵測乎? 其時按獄諸臣, 不爲嚴治虎龍, 而直書不道之言, 凶書凶招看作金石之典。 此案不可一時置諸覆載之間矣。" 上曰: "儒臣之言是矣。 其盡言之。" 景夏曰: "金龍澤、李天紀輩, 雖是不逞之徒, 然以虎龍告變, 至於誣服而死則誠冤矣。" 上曰: "儒臣之言公矣。 其時予有辭位之擧, 若非景廟至仁盛德, 則予何得有今日乎? 辭位之後, 謂宜刑推虎龍, 而其時任事者, 不此之爲, 其時之人, 豈皆有逆心於予乎? 金盛節、趙洽等誠無狀, 而究其心, 則不勝桁楊而誣服也, 亦殘忍矣。" 景夏遂陳誣案當雪之義, 寅明有持難防塞之意。 景夏斥之曰: "大臣爲春坊時, 以李泌事責趙泰耉, 可謂有保護之功, 而丁未反案時, 不能盡心者非矣。" 寅明謝曰: "景夏之言是也。" 上更問趙顯命, 顯命曰: "妖惡之輩, 深夜密室聚銀而謀, 何所不至, 而爲虎龍所持告者, 多有上逼之語, 非景廟逆臣, 則乃殿下逆臣也。" 景夏曰: "此輩死於虎龍之凶招, 豈可斷之以逆乎?" 上曰: "儒臣與豐原所陳, 猶是末節也。 其時釀出之說爲誰乎? 若以龍澤輩爲逆, 則所謂推戴者誰歟? 徐德修旣伸雪, 則龍澤輩之不爲伸雪, 豈王者之政乎? 以虎龍事爲義理者非矣。 不有辛丑建儲之擧, 則我國必亡。 三宗血脈, 惟有皇兄及予, 渠輩有愛敬之心, 當竊負而去矣。 不此之爲, 反生貪功之心, 欲圖定策之功, 是利心也。 且景廟無嗣, 以辛丑建儲爲非者, 不忠於予, 則非逆而何?" 顯命曰: "渠輩何敢爲推戴之說乎? 殿下肅廟之子, 景廟之弟, 宗廟社稷, 當付托於殿下, 則龍澤輩何敢生擅功之心乎? 定國是, 無出於此矣。 處分一有顚倒, 則國亡矣。 互對之說, 雖知其苟艱, 而出於不得已也。" 景夏曰: "蕩平之政, 非不美矣, 而若止於互對老少而已, 則亦何能服人心乎? 勿論東西南北, 惟才是用, 然後可謂恢公道也。" 上奬其公正, 而自是之後, 上又欲引用南人小北也。 蓋景夏爲人, 譎而麤, 其立朝言議頗緩, 由是儕流譁然攻之, 景夏恐其不見容, 遂言誣獄之當反, 以自解於儕流, 又言通用南北之黨, 以求迎合於上, 時人鄙之, 目之謂大蕩平。
-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6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註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