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영조실록 46권, 영조 13년 10월 14일 무술 1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미봉책을 쓰지 말고 시비를 분명히 해야만 당파가 없어진다는 이석표의 상소

부교리(副校理)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기를,

"대저 대신은 백관의 우두머리로서 비록 죄가 있어 죽이는 경우라도 역시 반수가검(盤水加劒)376) 의 예우가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얼굴을 맞대고 꾸짖고 욕하는 것이 노복에게 하는 것보다 심하며, 어제 파직시켰다가 오늘 임명하는 것이 말단 관료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는 대신들이 평소 임금에게 경시를 당해 온 소치이니, 창랑(滄浪)의 물빛에 따라 거취를 결정한다면 무슨 원망이나 탓이 있으리요마는, 오직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제부터 진실로 자중자애하는 선비가 있어 자신의 몸과 이름을 아낀다면, 누가 달가운 마음으로 전하의 앞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며 전하의 굴레에 매여 출입하겠습니까? 그들 중 의관이 부서지거나 찢어지지 않고 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경 전하의 뜰에 서는 사람이란 부귀를 탐내는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생존한 대신으로 전하에게 임용(任用)되고 있는 자이지만 4대에 걸쳐 예우를 받던 선정신(先正臣)377) 의 경우에 이르러서도 명자(名字)가 배척해 불리어지고 당파의 괴수로 단정되니,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 나라의 당론은 이미 3백 년 동안의 고질이요 선정신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날로 심화된 것은 지금 사람들의 죄에 지나지 않는데, 하필 이미 백골이 된 사람의 행적을 끝없이 캐들어가 주심(誅心)의 의리를 억지로 단절하십니까? 성기(聲氣)의 폭발과 말씀을 가려서 하시지 않은 그것이 전하의 덕에 누가 되는 것이 한두 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닌데, 그날 묘당(廟堂)과 삼사(三司)에서 한 사람도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꾸짖어 질타하고 업신여겨 짓밟으심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름도 당연합니다.

부끄럽게 여길 만한 일은 한쪽의 유자(儒者)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평상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어지럽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는 청을 중외(中外)에서 번갈아가며 상소를 올리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마디도 변명하여 논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날 선비의 기풍 역시 모두 죽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신이 홀로 근심하고 너무나도 염려되는 것이 있으니, 전하께서 폐합(閉閤)하신 뒤에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 없어지지 않았고, 대고(大誥)하신 뒤에도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 또한 없어지지 않았으며, 밤에 유시하신 뒤에도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도 끝내 없어지지 않아서 마침내 각선(却膳)하시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선하신 뒤에도 역시 끝내 당파가 없어지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외관상으로 본다면 평소 당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는 사람도 어전(御前)에 나아와 절하며 뵙고 지난날 역적을 비호한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석(筵席)에 나아와 마치 옛날의 원한을 서로 잊고 묵은 감정을 모두 풀어버린 듯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울타리를 오히려 마음속에 설치해 놓고, 컴컴한 곳의 무기는 선웃음을 치는 즈음에 먼저 갈무리해 두며, 머리를 숙여 공손히 하고도 물러나서는 주먹을 부르쥐고, 한자리에 앉아 즐기면서도 속으로는 활에 화살을 먹여 당기려 하니, 이는 단지 기회를 타서 유리한 방편을 미처 얻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 기뻐하시고 번민 속에서도 만족하시면서 진실로 탕평(蕩平)이 되고 크게 보합(保合)을 이루었다고 여기시나, 다만 당파를 깨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뭇신하에게 기만당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시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광유(廣諭)를 처음 내리시던 날에는 중외의 인심이 크게 진동하여 눈을 부비고 마음에 새겨 두루 묵은 감정을 말끔히 씻어 없애고 국면을 새롭게 전개하는 공을 이 기회에 결단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아니함이 없더니, 막상 당하고 보니 승지가 소리 내어 읽고 백관은 네 번 절하고 물러가는 데 불과하였으며, 유시하신 내용 역시 전후의 사륜(絲綸)에서 이미 익히 말하고 익히 들었던 것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거조는 천둥과 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며, 말씀은 애절하게 거듭거듭 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안타깝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그 당시에 옥음(玉音)으로 조서(詔書)를 반포하시되 당론이 결국은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애통하게 말씀하시어 백관과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명확하고 상세히 듣게 하시었다면, 어찌 환하게 밝으며 깨끗하고 시원하게 되어 비록 평소에 파당적인 인습에 고질이 된 사람이라도 역시 어찌 마음을 뜯어고쳐 융합 동화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한편으로는 각선(却膳)하시고 한편으로는 선온(宣醞)하시니, 존엄을 깎아내리는 거조가 하당(下堂)378) 보다 심하며 유감을 풀라는 하교(下敎)가 애걸에 가깝습니다. 전하께서 약하게 보이어 업신여김을 당하시는 것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니, 한편에서 자신의 견해만을 애써 지키며 변화를 알려고 생각지 않는 것 또한 무엇이 괴이합니까? 이러한 방책으로 한다면 전하께서 비록 날마다 각선하시고 날마다 술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당파를 제거하는 데 실상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갓 전하의 위엄만 스스로 손상될 뿐이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지금 만약 더욱 확고한 마음을 가다듬으신다면, 지난날과 같이 모호한 미봉책을 쓰지 마시며, 지난날과 같이 중단하고 취소하지 마시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뭇신하로 하여금 모두 믿고 복종하는 것을 알게 하시며, 기강을 엄격하게 세워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두려워하고 권면하도록 하소서. 말을 하는 데에는 간략하고 신중히 하도록 힘쓰시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반드시 공평을 근본으로 하시어, 나의 속마음을 사람들이 엿보지 못하게 하며 나의 거조를 세상에서 감히 헐뜯지 못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러한 뒤에 뭇신하 중에 감히 미련스럽게 뉘우치지 않고 파당적인 인습을 다시 싹틔우는 자가 있다면, 벌을 주어도 옳으며 죽여도 옳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한 사람을 벌주어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이니, 구구하게 음식을 절제하고 자질구레하게 술잔이 오고갈 필요가 없이 저절로 믿는 마음이 생기고 저절로 힘쓰고 닦이어 탕평의 기쁨에 이를 것이니, 오늘날 재액을 그치게 하는 방책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지난번 윤급(尹汲)한익모(韓翼謨)가 서명(胥命)하지 않은 것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마는, 액례(掖隷)를 몰래 보내어 간악한 일을 적발하는 것같이 한 데 이르러서는 그것이 체면을 먼저 손상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적을 다스리는 죄로써 다스리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형정(刑政)을 조심하고 삼가시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달리 지극히 미워하는 바가 있어서 이 일을 빙자해 죄를 주었다면 이는 전하께서 양심을 속이고 신하를 속이는 것이니, 대성인(大聖人)의 공정한 마음으로 사물을 처리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단 말입니까? 비록 그들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석달 동안 귀양보냈으면 징계와 면려에 족한 것이니, 죄를 용서하여 방환(放還)하시는 명을 빨리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조태언(趙泰彦)의 죄는 진실로 성상께서 하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극형에 이르기까지 하며 섬에 안치하기에까지 이르겠습니까? 두루 생각건대, 우리 조종(祖宗)께서는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우시어 직위가 삼사(三司)에 이른 자에게는 일찍이 함부로 형벌을 내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조그마한 과실이나 뜻을 어기는 일만 있어도 번번이 형구를 가지고 종사하려고 하십니다. 이는 영원토록 무궁한 폐단을 전하께서 몸소 여시는 것이니, 전하를 섬기는 삼사의 신하들이 장차 어떻게 그 손발을 움직이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 번 세 번 다시 생각하시어 처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힘써 진달한 말들은 모두 옳다. 어찌 지난 일이라고 하여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당습의 근원을 깊이 개탄하면서 애초 선정신(先正臣)을 들추어 업신여긴 적이 없었으니 역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윤급한익모의 일은 비록 무상(無狀)한 바가 있으나 아뢴 말도 옳으니, 두루 물어 처결하는 것이 마땅하다. 조태언의 일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4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7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註 376]
    반수가검(盤水加劒) : 쟁반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칼을 얹는 것. 쟁반에 물을 채운다 함은 물은 원래 수평을 유지하므로 공평(公平)한 법으로 다스려 줄 것을 바란다는 뜻이고, 칼을 얹는 것은 그 칼로 목을 찔러 죽겠다는 뜻임.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대부(大夫)에게 오형(五刑)에 해당되는 죄가 있을 경우, 이렇게 하고 대궐로 들어가 죄를 청하면, 임금도 유사(有司)로 하여금 묶거나 끌어내지 못한다고 하였음. 즉 죄가 있어도 예(禮)로 대우하여 처벌한다는 뜻임.
  • [註 377]
    선정신(先正臣) :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
  • [註 378]
    하당(下堂) : 천자가 마루에서 내려와서 제후를 보는 것.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보면, 조근(朝覲)의 예(禮)에 천자는 당(堂)에서 내려오지 않고 제후의 알현을 받는다고 함. 천자가 당에서 내려오는 것은 예에 어긋나며, 제후에게 굽히는 것이 됨.

○戊戌/副校理李錫杓上疏曰:

夫大臣百僚之首也, 雖有罪至於死, 亦有盤水加劎之禮。 今殿下當面叱辱, 甚於僕隷, 昨罷今拜, 殆若末僚, 此莫非大臣平日見輕於君父, 滄浪之取, 夫孰怨尤? 獨臣之所恐者, 從今以後, 苟有自重之士, 愛惜身名, 則孰肯甘心受侮於殿下之前, 而靡然出入於殿下長之羈馽哉? 其不毁冠裂冕而去者幾希矣。 然則畢竟立殿下之庭者, 不過貪饕富貴之輩耳。 然此猶是生存之大臣, 爲殿下所任使者耳。 至於四朝禮遇之先正, 斥呼名字, 斷以黨魁, 此何事也? 我國黨論, 已成三百年痼疾, 非先正之所俑者也。 若今日之轉輾日深, 不過時人之罪, 何必追究旣骨之人, 勒斷誅心之義乎? 聲氣之暴發, 辭令之不擇, 其貽累聖德, 非止一再, 而伊日廟堂三司, 無一人匡救, 宜殿下之呵叱凌踏, 至於此極也。 所可羞者, 一邊之以儒名者, 平居無事之時, 紛然從祀之請, 迭出於中外之奏, 及今而無一言伸論者, 今日士氣亦可謂死盡矣。 只臣之私憂, 過慮則有之, 殿下於閉閤之後, 若可以無黨, 而旣不能祛, 大誥之後, 若可以無黨, 而又不能祛; 夜諭之後, 若可以無黨, 而終不能祛; 乃至於却饍矣。 却饍之後, 亦安知終無黨也, 以外面觀之, 平日之目以黨魁者, 進前而納拜; 向來之指爲護逆者, 比肩而登筵, 似若舊怨兩忘, 宿憾都平, 而本來藩籬, 猶設於心腹之間, 暗地戈戟, 先藏於嘻笑之際, 屈首之恭退而磨拳, 同席之歡, 內欲彎弓, 特未及乘機而借便耳。 今殿下方且恬然自喜, 懣然自得, 以爲眞蕩平大保合, 而殊不知不徒不能破黨, 愈見欺於群下, 寧不可惜哉? 當廣諭初下之日, 中外人心, 莫不赫然振勵, 翹心拭目, 消融滌蕩之化, 回斡旋轉之功, 可決於此機。 及其至也, 不過承旨宣讀, 百官四拜而退, 所諭者亦不過前後絲綸, 已熟言而熟聞之者耳。 是故擧措非不雷厲風飛而人不服, 辭旨非不丁寧惻怛而人不信, 惜乎! 殿下苟於其時, 渙發玉音, 以黨論之終必亡國, 哀痛而言之, 使百官軍民明聽而詳聞, 則豈不光明震燁, 灑落快活, 雖平日之痼於黨習者亦豈無改心革慮, 同歸鎔化, 而不此之爲, 乃反一邊却饍, 一邊宣醞, 貶尊之擧, 甚於下堂, 釋憾之敎, 近乎哀乞。 殿下之示弱見侮, 固自不少, 而一邊之徒守己見, 不思知變者, 亦何足怪也? 由是道也, 殿下雖日日却饍, 日日賜酒, 實無補於祛黨之道, 而徒見其君威之自損耳, 臣實慨然。 殿下今若益勵堅確之心, 毋如前日之含糊彌綘, 毋如前日之消沮退轉, 明示是非, 而使群下咸知信服, 嚴立紀綱, 而使一世皆有勸畏, 發言則務乎簡重, 度事則必主公平, 使吾之淺深, 人不得以窺測; 使吾之擧措, 世無敢以疵議。 然後群下其敢有頑然不悛, 復萌黨習者, 則誅之可也, 殺之可也。 是所謂刑一人而天下威者, 不必區區於飮饍之節, 屑屑於盃酒之間, 而自然孚感, 自然砥礪, 以底于蕩平之休。 今日弭災之策, 恐無過於此耳。 向來尹汲韓翼謩之不胥命, 烏得無罪? 至於密送掖隷, 有若摘奸, 自不覺其先損體面, 而至於加之以治逆之律, 此則殿下不能審愼於刑政也。 若或別有所痛惡, 憑此而罪之, 則是殿下欺心而欺臣下也, 大聖人公心處物之道, 豈如是乎? 雖然, 三朔竄棘, 足以懲勵, 亟命宥還。 趙泰彦之罪, 誠如聖敎, 然何至於正刑, 何至於島置也? 洪惟我祖宗仁厚立國, 位至三司者, 未嘗輕加刑戮。 今殿下少有違咈, 輒欲以桁楊刀鋸從事, 是萬世無窮之窮弊, 自殿下啓之, 爲殿下三司之臣者, 將何以措其手足乎? 伏願殿下更加三思而處之也。

批曰: "勉陳俱是, 豈可事往而不爲猛省焉? 噫! 深慨黨習之源, 初無擧先正, 而侮之者不亦誤聽乎? 尹汲韓翼謩事, 其雖無狀, 所陳是矣, 當下詢處之。 趙泰彦事, 不可輕議矣。"


  • 【태백산사고본】 34책 4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7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