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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45권, 영조 13년 9월 17일 임인 3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오늘날의 급선무를 5가지로 적어 올린 대사간 오광운의 상소

대사간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당속(黨俗)을 한 번 변화시킨 것은 개벽(開闢)에 비교할 수 있으니, 성려(聖慮)가 장원(長遠)하고 역량(力量) 역시 큽니다. 그러나 개창(開創)하는 훈공(勳功)은 교령(敎令)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데 있으니, 덕업(德業)이 인심(人心)을 맺고 풍기(風紀)가 세도(世道)를 바로잡아야만 천만년 동안 족히 믿을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군신(君臣) 상하가 화해(和解)하고 보합(保合)하는 한 가지 일에 골몰하고 부서(簿書)·기회(期會)의 소절(小節)만을 일삼아 큰 공으로 여기고 그친다면, 개벽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비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의 급선무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규모를 세워 치체(治體)를 정하고, 기교(機巧)를 버리고 성실(誠實)로 돌아가며, 인욕(人慾)을 막아 풍화(風化)를 바로잡고, 언로(言路)를 넓혀 비익(裨益)을 구하며, 성학(聖學)에 힘써 황극(皇極)303) 을 세우는 일입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모두 규모가 있었으니, 삼대(三代)304) 때의 충(忠)·질(質)·문(文)이 그것입니다. 한(漢)·당(唐)의 임금에 이르러서도 모두 일대(一代)의 규모가 있었는데, 전하께서도 역시 일정한 규모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관대(寬大)로써 발하고 강의(剛毅)로써 행하며, 정고(貞固)로써 지켜나간 연후에야 세상을 구하고 후손을 유족하게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전하의 전일 다스림은 종핵(綜核)305) 을 숭상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폐(流弊)가 쉽게 번쇄(煩碎)한 데로 흐르고, 기상(氣像)은 더러 급박한 데 가까우며, 습속은 미미(靡靡)306) 함을 숭상하여 공리(功利)로 치달았으니, 관대함이 아니면 이런 폐단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갓 관대라는 이름만을 사모하면 범연(泛然)하여 간절하게 하지 않으며, 느슨하고 팽팽하게 되지 않으니 반드시 강의(剛毅)로써 행한 연후에야 관대한 규모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리하게 나아가고 빨리 물러남은 잘하는 일에서도 경계할 바요, 처음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은 승평 세대(昇平世代)에도 근심할 바이니, 반드시 정고(貞固)로써 지킨 연후에 사람에 있어서는 책성(責成)의 효과가 있고 일을 하는 데에 응적(凝績)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정성(精誠)이 없으면 물(物)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공경하고 협력하는 것은 과연 정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정성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외면으로만 하고 마음에 두지 않으면 정성이라고 할 수 없으니, 정성으로써 나랏일을 하지 않는다면 가엾게도 고통받는 우리 백성들은 장차 헛된 물거품 같은 세계 속에 곤란을 받게 됩니다. 정성이 없으면 오히려 나라를 이룰 수가 없는데, 더군다나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교(機巧)의 근심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태평하고 무사하여 사대부의 정신(精神)과 지술(智術)을 득실(得失)의 장소에 모조리 쓰니, 그 기교 역시 지극합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어 혹 탕평(蕩平)이라 부르고, 혹은 개벽(開闢)이라 일컬어 측달(惻怛)한 정성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으셨으나, 어찌 여러 신하들의 해묵은 옛날 근성을 하루아침의 서서 말하는 사이에 소멸시키기를 보장하겠습니까? 권력이 돌아가는 바이면 다투고 이익이 있는 곳이면 다투어, 가볍고 무거움을 비교해서 저쪽보다 가벼우면 화를 내고,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털끝만큼이라도 나보다 많으면 시기합니다. 천위(天威)가 억누르고 있어 비록 마음대로 행하지는 못하나, 감추어진 기밀이 지극히 치밀하여 진짜 장물(贓物)은 포착하기가 어렵습니다. 동(東)에 뜻을 두고는 서(西)를 말하고 공(公)을 빙자해 사(私)를 도모하여, 어두운 곳에서 찌르고 쏘아대며 허공에서 번쩍거려 공교한 역법가(曆法家)도 그 숫자를 알지 못하고 귀신도 그 단서를 엿보지 못할 것이니, 이런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하루 사이에 강둑이 터지듯 할 형세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높은 반열(班列)과 중한 직질(職秩)에 있는 사람은 친히 성상의 하교를 받들은 사람인데 어찌 이에 이르겠습니까마는 특별히 그 마음이 공화(共和)하지 못하고 그 정성이 서로 미덥지 못하면 일을 좋아하는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장차 그 기미를 엿보고 기교를 부려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탕평책이 이미 그러했던 자취를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개벽 이후에도 또다시 전과 같다면 천하 후세에서 오늘날을 어떻다고 말하겠습니까? 여러 신하를 별도로 신칙해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동료를 형제처럼 보아 털끝만큼의 거짓된 마음이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으면 달마다 없어지고 해마다 소멸되어 기교가 스스로 다 없어지고 태화(泰和)의 지역을 이룰 것입니다.

아! 인심(人心)이 교칠(膠漆)의 동이[盆] 가운데 빠진 지 오래입니다. 욕심 중에서 큰 것이 셋이니, 재물과 여색(女色)과 작록(爵祿)입니다. 재물과 여색은 비록 두 가지이기는 하지만 뇌물이 행해짐은 오로지 희첩(姬妾)을 거느리는 데서 말미암았으니, 실제는 하나입니다. 작록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더 커서 사람마다 바라고 사모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천금(千金)이 저자에 있어도 지나가는 자가 돌아보지 않는 것은 분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인데, 토끼 한 마리가 들판에 있으면 백 사람이 서로 잡으려 쫓는 것은 분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국(器局)과 식견이 있는 자를 묘당(廟堂)에 있게 하면 기국과 식견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않게 되고, 경학(經學)이 있는 자를 경연(經筵)에 두면 경학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않게 되는데, 대각(臺閣)의 풍절(風節)이나 유사(有司)의 조구(條具)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그러하다면 온 세상의 분수가 정해질 것입니다. 근래에는 그렇지 않아서 남이 승진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나는 어찌 그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문호가 크게 열려 망상(妄想)이 다투어 일어나서 분경(奔競)307) 하는 자는 얻고 염정(恬靜)한 자는 얻지 못하며, 간진(干進)한 자는 앞서고 자호(自好)하는 자는 뒤쳐집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재주와 분수는 생각하지 않고 낱낱이 그 의욕(意慾)을 채우고자 하는데, 그중 혹 구하다가 얻지 못하거나 얻고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기교를 부리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며, 하늘에 닿는 물이나 벌판을 태우는 불의 기세가 어느 지경에서 그치겠습니까? 재물과 여색의 근본을 뽑는 것은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조정의 귀근(貴近)부터 시작해야 하고, 명리(名利)의 근원을 막는 것은 공(公)을 공으로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인재(人才)의 분수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후세의 언로(言路)는 오로지 대각(臺閣)에 달려 있는데 대각의 잇따른 계사(啓辭)를 정계(停啓)하고 피혐(避嫌)을 처치함이 있었으니, 어느 시대에 시작된 것인지 모르나 전고(前古)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한 계사가 나오면 사람들이 모두 물색(物色)하여 말하기를, ‘갑(甲)이 반드시 연계(連啓)하고, 을(乙)이 반드시 정계(停啓)할 것이다.’ 하며, 한 사람이 피혐하면 또 말하기를, ‘출사(出仕)할 자는 반드시 갑이고, 떨어지는 자는 반드시 을이다.’라고 하여, 대각에 발을 붙였다 하면 명목(名目)이 시끄러우니, 대각이 되는 자도 역시 어렵습니다. 군자(君子)의 한 마디 말이나 명령은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위주로 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진계(陳啓)하게 하여 그 사람이 체직되면 그 계사도 중지되어, 정계(停啓)하거나 연계(連啓)함이 없이 후에 오는 자가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한다면, 실로 충익(忠益)을 넓히고 분분한 시끄러움을 지식(止息)시키는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인순(因循)함이 예(例)로 이루어진 것이 이제 이미 몇백 년이 되었으니, 어찌 감히 가벼이 변개(變改)하겠습니까? 단지 원하건대, 더욱 너그럽게 용납하여 습속으로서 조절하지 말고 뜻 있는 선비로 하여금 사체(四體)를 펴고 자기의 소견을 행하게 해야 합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한 자[尺]의 안개가 하늘을 가리어도 그 큼은 훼손되지 않고, 한 치[寸]의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이 그 밝음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인주(人主)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천하의 미운 자와 더러운 자를 모두 용납한다면 마침내 언자(言者)의 무망(誣妄)을 드러낼 뿐일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요(堯)·순(舜)에 뜻을 두고 한(漢)·당(唐)이 되기를 부끄럽게 여기시는데 관용(寬容)의 도량이 도리어 대당(大唐)의 아래에 나옴은 무슨 까닭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총(聖聰)을 확장하여 이이(訑訑)308) 한 성색(聲色)이 기미의 즈음에 나타나지 말게 하소서.

이 네 가지는 절목(節目)이니, 그 강령(綱領)은 황극(皇極)에 있습니다. 극(極)이란 천리(天理)와 물칙(物則)의 지정(至精)의 극이니, 불편 불의(不偏不倚)와 천하의 중(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요(堯)·순(舜), 우·탕(禹湯)의 집중(執中)은 지공(至公)이며 자막(子莫)의 집중(執中)309) 은 사의(私意)이니, 천리(天理)와 물칙(物則)의 극을 세운다면 천하의 편벽된 자와 사악(邪惡)한 자가 이것을 보고서 표준을 삼게 됩니다. 저 양·묵(楊墨)의 편사(偏邪)310) 한 중(中)을 본받아 집착하는 자는 천리와 물칙과 떨어진 거리가 먼데, 후세의 편사(偏邪)한 당론은 또 어찌 한갓 ·에 비교할 뿐이겠습니까? 우(牛)·이(李)의 중(中)을 잡고서 ·를 조제(調劑)하고, 삭(朔)·촉(蜀)의 중을 잡고서 ·촉을 화협(和協)시키는 것은 마땅히 인정(人情)에 가깝겠으나 그것이 어긋나서 어려운 것은 그 중이라고 여기는 것이 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堯)·순(舜), 우(禹)·탕(湯)의 중을 당론이 있는 세상에 세움은 우원(迂遠)한 듯하나, 오늘날 극(極)을 세우면 내일 당이 없게 되어 손을 마주잡고 합계(合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장(工匠)에게 비교할 수 있으니 물건의 굽은 것을 자기의 먹줄에 맞추어 하면 그 공(功)이 쉽게 이룩되지만 자기의 먹줄을 변경시켜 굽은 물건에 따르면 한갓 수고만 할 뿐 공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조진(條陳)한 바가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인용한 《중용(中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이니, 깊이 반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4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6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註 303]
    황극(皇極) : 제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
  • [註 304]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세 왕조.
  • [註 305]
    종핵(綜核) : 사건의 본말을 종합하여 자세히 밝힘.
  • [註 306]
    미미(靡靡) : 휩쓸려서 따르는 모양.
  • [註 307]
    분경(奔競) : 관직을 얻으려고 벌이는 운동. 엽관 운동(獵官運動).
  • [註 308]
    이이(訑訑) : 사람이 경박하고 자존심이 강해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모양.
  • [註 309]
    자막(子莫)의 집중(執中) : 노(魯)나라 사람 자막이 중도(中道)를 지키는 방법.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에 "맹자가 말하기를, ‘자막은 중도를 지키니 중도를 지키는 것은 도(道)에 가까우나, 중도를 지키되 권도가 없는 것은 하나를 고집하는 것과 같다. 하나를 고집하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도를 해치는 것이요 한 가지를 잘 되게 하되 백 가지를 그르치기 때문이다.’ 하였다." 하였음.
  • [註 310]
    양·묵(楊墨)의 편사(偏邪) : 주(周)나라 말기의 학자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말함. 양주는 극단의 이기설(利己說)을 주장하였고 묵적은 극단의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모두 맹자(孟子)에게 이단(異端)으로 배척받았음.

○大司諫吳光運上疏言:

伏惟我殿下一變黨俗, 比之開闢, 聖慮亦遠矣, 力量亦大矣。 然開創之勳, 在於立敎定制, 使德業係人心風烈, 匡世道於千萬年, 有足憑恃耳。 不然而君臣上下, 區區於和解保合之一事, 屑屑於簿書期會之小節, 以爲是極功而止, 則開闢之名, 不亦爲天下後世笑乎? 今日之急務有五, 曰立規模以定治體, 祛機巧以反誠實, 遏人慾以正風化, 恢言路以求裨益, 懋聖學以立皇極。 自古立國, 皆有規模, 如三代忠質文是也。 至於之君, 莫不有一代之規模, 未知殿下亦有一定之規模耶? 臣竊以爲發之以寬大, 行之以剛毅, 守之以貞固, 然後方可以救世而裕後矣。 殿下前日之治, 欲尙綜核, 故流弊易歸於煩碎, 氣像或近於迫急, 俗尙靡靡, 趨於功利, 非寬大無以救此弊。 然徒慕寬大之名, 則泛而不切, 弛而不張, 必也行之以剛毅, 然後方可見寬大規模, 而進銳退速, 能事所戒; 有始無終, 盛世攸憂, 必守之以貞固, 然後在人而有責成之效, 做事而有凝績之美也。 《傳》曰: "不誠無物。" 今日之寅協, 其果誠乎不誠乎? 以面而不以心, 則不可謂之誠也, 不以誠而爲國, 則哀我顚連之民, 其將受困於虛泡界中, 不誠猶不可爲國, 況進於此而有機巧之憂乎? 昇平無事, 士大夫精神智術, 用盡於得失之場, 其巧亦至矣。 殿下有憂之, 或號曰蕩平, 或名之開闢, 惻怛之誠, 靡不用極, 亦安保諸臣之宿昔根心, 一朝消磨於立談之間? 權之所歸則爭焉, 利之所在則爭焉, 較挈輕重, 而錙鐺輕於彼則怒焉, 商量豐瘠, 而毫豐於我則猜焉。 天威所壓, 雖不敢肆行, 而藏機至密, 眞贓難捉。 意東而言西, 憑公而售私, 暗地之衝射, 空外之閃暎, 巧曆不能知其數, 鬼神不能睨其端, 此心未革, 一日決, 必至之勢也。 崇班重秩, 親承聖敎者, 夫豈至此, 特其心未能共和, 其誠未能相孚, 則喜事浮薄之徒, 其將窺見幾微, 用其機巧而莫之遏, 蕩平已然之效, 居可見矣。 開闢之後, 又復如前, 天下後世, 謂今日何如也? 另飭諸臣, 愛君如父, 視僚宷如兄弟, 無有一毫虛僞之念, 參錯其間, 則月磨歲消, 機巧自盡, 而躋泰和之域矣。 噫! 人心之陷於膠漆盆中久矣。 慾之大者有三, 財色也, 爵祿也。 財色雖曰二物, 貨賄之行, 亶由姬妾之奉, 則其實一也。 至於爵祿, 有大於此, 爲人人所企慕者, 胡爲而然也? 千金在市, 過者不顧, 分定故也; 一兔在野, 百人爭逐, 則分不定故也。 今使有器識者處廟堂, 而無器識者不敢望; 有經學者處經筵, 而無經學者不敢望。 以至臺閣之風節、有司之條具, 莫不皆然, 則一世之分定矣。 挽近則不然, 見人遷除, 人皆曰吾何爲不及, 倖門大開, 妄想爭起, 奔競者得, 而恬靜者不得, 干進者先, 而自好者居後。 人人不量其才分, 箇箇欲滿其意慾, 厥或求而不得, 得而不滿, 則安知無機巧者作, 而滔天之水、燎原之火, 止泊於何地耶? 拔財色之本, 莫如恥恥, 自朝廷貴近始; 塞名利之源, 莫如公公, 在人才分數明也。 後世言路, 專在臺閣, 臺閣之有連啓停啓, 有避嫌處置。 未知肪於何時, 而前古無是也。 一啓之出, 人皆物色曰, 甲者必連, 乙者必停;一人之避, 又曰出之者必甲, 落之者必乙。 投足臺端, 名目囂然, 爲臺閣者, 其亦難矣。 君子之一辭一令, 必主己見, 若使人各陳啓, 其人遞則其啓止, 無停無連, 後來者自爲之, 則實爲廣忠益、息紛鬧之道。 然因循成例, 今已累百年, 豈敢輕加變改? 只願深加優容, 勿以俗習操切, 使有志之士, 展布四體, 而行其己見也。 太宗之言曰: "尺霧障天, 不虧於大;寸雲點日, 何損於明?" 人主以此爲心, 則天下之疾者汚者, 皆可以莊納, 適所以彰言者之誣妄而已。 我聖上志在, 羞爲, 而寬容之量, 或反出於大之下何哉? 伏願開張聖聰, 勿以訑訑聲色, 或露於幾微之際。 此四者目也, 其綱在於皇極。 極者, 天理、物則, 至精之極, 而不偏不倚, 天下之中, 在於是矣。 禹湯之中, 至公也;子莫之中, 私意也。 立天理、物則之極, 而天下之偏者邪者, 視此而準焉。 彼視楊墨偏邪之中, 而爲之軌者, 其去天理物則遠矣。 後世黨論之偏邪, 又奚啻也? 執之中, 而調劑, 執之中, 而和協者, 宜其襯切人情, 而戞戞乎其難者以其所以爲中者, 非中也。 以之中, 建之於黨論之世, 宜若迂遠。 然今日建極, 明日無黨, 可以交手合契。 何者? 比之工匠, 使物之窳邪, 隨己之繩墨, 則其功易變, 己之繩墨, 而隨物之窳邪, 則徒勞而無功也。

批曰: "其所條陳, 俱是今日之急務, 所引《中庸》, 其亦治心之要道, 可不猛省焉?"


  • 【태백산사고본】 34책 4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6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