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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45권, 영조 13년 8월 11일 정묘 10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이광좌를 소견하고 사언 어제를 보이다. 이광좌 등이 밤 3경에 관을 벗고 뜰에 엎드리다

영의정 이광좌가 사은(謝恩)한 후 청대하니, 합문을 열라고 명하고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이광좌를 소견(召見)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 이의현(李宜顯)·김흥경(金興慶) 등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어선을 물리친 지 이미 4일에 이르러 부득이 문을 밀치고 들어왔는데 특별히 입시를 허락하시니, 다행함을 어찌 다 아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더 유시(諭示)할 것이 없는데, 이번에 청대를 허락함은 단지 이 글을 보여 주고자 했을 뿐이다. 경들은 보고 나서는 물러가는 것이 옳다."

하고는, 인하여 사언 어제(四言御製)를 꺼내 보여 주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사첩(史牒)의 제왕(帝王)은 다른 욕심이 없었고 무형(無形)을 방구(訪求)하면서 오직 오래 재위(在位)하기만을 구했었다. 아! 나는 이에 반(反)하여 고심하고 있다. 옛날 사람은 혼매(昏昧)하여 주색(酒色)으로 손상당했는데, 지금 나는 신하에게 곤란을 받아 손상당하고 있다. 지금 이 마음은 금석(金石)과 같이 굳었으니, 어제 대면(對面)한 것이 오히려 부끄럽다. 지금 합문(閤門)을 닫았는데 어찌 차마 다시 열겠는가? 아! 원보(元輔)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오려 하는데 신하들이 이에 이르러 어찌 상례(常例)에 구애되겠는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합문을 열기를 명하였으나, 지나온 일을 생각하니 더욱더 부끄럽다. 세제(世弟)의 사위(辭位)를 지난번 내가 두 번이나 행했는데, 합문을 닫고 약을 물리친 일이 어찌 일찍이 있었던가? 세 번이나 유시해도 듣지 않았으니, 그런 신하는 알 만하다. 임금을 가린다는 전교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후일의 전교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신하로서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사롭게 들어서 오직 편당을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 신하에게 모욕을 받고 그 신하에게 조롱을 당했으니, 오늘날 임금 노릇하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죽어서 〈선왕을〉 뵈어도 할말이 없으며, 백성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음식을 물리쳐 당인(黨人)의 마음을 쾌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죽어서는 신하의 죄를 아뢸 것이며, 글에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고 나는 오직 묵묵히 있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니, 겨우 글자 모양만 이루어졌다. 이 답답한 마음을 여기에 펼 뿐 어찌 거듭 다른 유시를 하겠는가?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사첩(史牒) 첫머리에 크게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 등이 읽기를 마치고, 이광좌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신하들이 이 어제(御製)를 보면 그 누가 옛날 마음을 고치지 않겠습니까? 오직 원하건대, 수라를 빨리 드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자전(慈殿)께서 장탕(醬湯)을 권했기 때문에 부득이 조금 마셨으나, 오늘은 물조차 마시지 못하겠다."

하자, 이의현이 말하기를,

"이 하교를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거조를 내가 어찌 좋아서 하겠는가? 작년 건저(建儲)한 후에 스스로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고 여겨 오직 조정이 숙청(肅淸)되어 후세에 훈모(訓謀)를 끼치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가망이 없게 되었다.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는데, 이는 일조 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다."

하니,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삼가 의관(醫官)이 전한 바 왕세자(王世子)가 수라를 드시기를 권했다는 말을 듣고서 감읍(感泣)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오열(嗚咽)하면서 말하기를,

"세 살 된 원량(元良)241) 이 미음 들기를 억지로 권하였으니, 내가 어찌 차마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 마음이 이미 굳게 정해졌기 때문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눈물을 흘리시니 참으로 민망합니다. 《주역(周易)》 건괘(乾卦)를 전하께서 어찌 강독(講讀)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인군의 마음이 강건(剛健)한 연후에야 하늘을 본받아 도를 행할 수 있으니, 언어가 비통(悲痛)함은 임금의 도리가 아닌 듯 싶습니다. 이런 하교를 들으면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누군들 징창(懲創)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년에 경과 민봉조하(閔奉朝賀)가 치사(致仕)했을 때 내 마음으로는 지금 비록 허락하나 후에 만약 어려운 시기(時期)가 있으면 마땅히 다시 상신(相臣)에 제배(除拜)하려고 생각했었다. 오늘 조정을 두루 돌아보건대, 맡길 만한 사람이 없는데, 마음에 갑자기 깨닫기를 민봉조하는 지금 비록 죽었으나, 경은 아직 있으니 의지할 만한 자는 경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제일 먼저 매복(枚卜)을 명한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이런 뜻을 본받아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사를 잘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국토가 좁은데다 당화(黨禍)가 여러 차례 일어나 혹 비운(否運)을 만나 나라를 해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대저 당인(黨人)의 마음은 요충(蓼蟲)의 습성에 비유할 수 있어 갑자기 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임금이 지성(至誠)으로 사람을 가려 임명하면 스스로 조화되는 것이며, 만약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자는 형법(刑法)으로 다스리면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이와 같이 지나친 일을 하시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인하여 힘껏 거듭 수라를 들기를 청해 밤 3경(三更)이 되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좌가 어제(御製)를 품속에 넣으면서 말하기를,

"신들에게 죄가 있는데도 아직껏 죽임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상의 마음이 풀리지 않은 것이니, 오직 마땅히 물러가서 주륙(誅戮)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뜰로 내려가니, 이의현 이하가 모두 따라 내려가 관(冠)을 벗고 뜰에 엎드렸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경들은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들이 성상의 마음을 마침내 돌리지 못한다면,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감히 서로 이끌고서 죽기를 청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이런 거조를 보니, 감동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경들은 올라오라. 내가 경들에게 말하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만약 분명한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으시면 신들은 비록 이곳에서 죽더라도 결코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밤 공기가 매우 차가운데 경들이 한데 엎드려 있은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청한 바를 쾌히 들어줄 터이니, 빨리 전상(殿上)으로 올라오라."

하였고,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차례로 올라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음은 금석(金石)과 같이 굳은데 경들의 정성에 감동되어 부득이 억지로 따른다."

하니, 이광좌 등이 같은 소리로 일어났다가 엎드려 말하기를,

"이는 실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큰 다행입니다. 신들이 직접 수라를 드시는 것을 본 연후에 물러가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수라를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들기를 마치고 유시하기를,

"내가 여러 차례 여러 신하들에게 속임을 당했기 때문에 마음을 결정했었는데, 이제 애써 돌려서 경들과 함께 나랏일을 하고자 하니, 참으로 구차하다. 이제부터 여러 신하들이 다시는 나를 속이지 않겠는가?"

하니, 이광좌 등이 말하기를,

"신하된 자들이 결코 감히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다시 수라를 들었으니, 다른 것이야 무엇을 유시하겠는가? 지난번 두 정승을 파직시킨 것은 단지 국체(國體)를 위해서였는데, 이미 그 마음을 알았으니 어찌 다시 서로 버티겠는가? 전의 좌상(左相)·우상(右相)을 모두 서용(敍用)하고, 내일 아침 영상(領相)을 명초(命招)해 복상(卜相)242)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아! 이번의 일은 고집한 바가 있어서였는데, 밤중에 편전(便殿)의 뜰에서 머리를 조아렸으므로 대신과 국구(國舅) 등 여러 신하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려워 죽을 먹어 위로는 열조(列朝)와 자전(慈殿)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원량(元良)과 군민(軍民)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지금 이후부터는 나에게 있어 처음 정사(政事)와 같으니, 아! 나의 대소 신료들은 결연한 마음으로 정진(精進)해 우리 종국(宗國)을 굳건하게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김취로(金取魯)는 80세 된 늙은 어미가 있어 멀리 떠나는 것이 불쌍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사유(赦宥)하기를 명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춘제(李春躋), 대사간(大司諫)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합사(合辭)에 비답이 없었고, 전석(前席)에서 궐계(闕啓)한 것은 모두 전에 없던 일이니,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 연석(筵席)에서 임금이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궁중(宮中)의 다식판(茶食板)에 팔괘(八卦)를 그려 새긴 것이 있는데, 내가 항상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여겨 일찍이 먹지 않았었다. 근래 세자 역시 그것을 먹지 않으므로 유모(乳母)가 그 까닭을 물었는데 답하기를, ‘팔괘는 먹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영리한 자품(姿稟)이 이와 같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4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6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어문학(語文學) / 사법(司法) / 식생활(食生活)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註 241]
    원량(元良) : 왕세자(王世子).
  • [註 242]
    복상(卜相) : 정승(政丞)이 될 사람을 가려 뽑음.

○領議政李光佐謝恩後請對, 命開閤門, 御熙政堂, 召見光佐, 與領府事李宜顯金興慶等入侍。 光佐曰: "却膳已至四日, 臣不得已爲排闥之擧, 而特許入侍, 喜幸何達?" 上曰: "予無可諭者, 今此許對, 只欲示此文而已。 卿等見而退去可也。" 仍出示四言御製, 其文曰:

往牒帝王, 他無可欲, 訪求無形, 惟望久位, 嗟予反此, 由於苦心。 昔者彼昏, 所傷酒色, 今予所傷, 受困其臣。 于今此心, 矢若金石, 昨日對顔, 尙爲赧然, 于今閉閤, 何忍復開? 吁嗟元輔, 其欲排闥, 人臣到此, 豈拘常例? 感動其忱, 閤雖命開, 追惟所經, 尤增自恧。 銅闈辭位, 往予再行, 閉閤却藥, 亦豈曾有? 三諭不聽, 其臣可知。 擇君之敎, 猶不悚然, 待他日敎, 臣豈忍聞? 聽若尋常, 惟恐不黨。 見侮其臣, 受弄其臣, 今日爲君, 豈不難乎? 歸拜無辭, 臨民何顔? 不若却食, 以快黨心。 歸奏臣罪, 書示諸臣, 我則惟默。 心眩手書, 字僅成樣, 敷此抑塞, 更何他諭? 其令史官, 大書史首。

光佐等奉讀訖, 光佐曰: "今日臣下, 見此御製, 孰敢不革舊心乎? 惟願亟進御膳焉。" 上曰: "昨日慈殿勸以醬湯, 故不得已少飮, 今日則水亦不入口矣。" 宜顯曰: "聞此下敎, 不勝罔措矣。" 上曰: "今日之擧, 予豈樂爲? 昨年建儲後, 自謂政値泰運, 惟望肅淸朝著, 貽謨後世, 今無可望矣。 予心已定, 此非一朝一夕之故也。" 興慶曰: "伏聞醫官所傳, 王世子勸進御膳之語, 不覺感泣。" 上嗚咽曰: "三歲元良, 强勸粥飮, 予豈忍不御, 而心已堅定, 故不得從之。" 光佐曰: "殿下之每每涕泣, 誠爲悶迫。 《易》之乾卦, 殿下豈不講讀乎? 人君之心剛健, 然後可以體天行道, 言語悲楚, 恐非人君之道矣。 聞此下敎, 苟有人心, 孰不懲創乎?" 上曰: "頃年卿與奉朝賀致仕也, 予心以爲今雖許之, 後若有艱虞之日, 當復拜相矣。 今日環顧朝廷, 無可任者, 心忽有覺曰奉朝賀今雖亡矣, 卿則尙在, 可倚仗者, 非卿莫可, 故首命枚卜。 卿須體此意, 與諸臣善爲國事。" 光佐曰: "我國山川偏狹, 黨禍數起, 或逢否運, 以至害國矣。 夫黨人之心, 譬如蓼蟲之習, 辛猝難變, 此人君但至誠擇人而任之, 則自可調劑, 若不率敎, 乃以刑法從事, 何患國之不治, 而反爲此過擧, 豈不慨然乎?" 仍力請復膳, 夜至三皷而終不許。 光佐以御製納懷中曰: "臣等有罪, 而尙不被誅, 故聖心未解, 惟當退俟誅戮矣。" 遂趨下殿。 宜顯以下皆隨下, 免冠伏于庭。 上傳敎曰: "卿等何爲作此擧耶?" 光佐曰: "臣等終未回聽, 生亦何爲? 敢相率請死。" 上曰: "見卿此擧, 不覺感動。 卿等上, 予當語卿。" 光佐曰: "若不明賜兪音, 則臣雖滅死於此, 決不敢上矣。" 上曰: "夜甚冷, 卿等露伏已久, 予心不安, 當快許所請, 亟宜上殿也。" 諸臣遂以次上。 上曰: "予心堅如金石, 感卿等誠, 不得已勉從矣。" 光佐等同聲起伏曰: "此實宗社臣民之大幸, 臣等親覩復膳然後, 乃可退矣。" 上遂命取御膳來, 進訖, 諭曰: "予累見欺於諸臣, 故決定於心, 今及勉回, 欲與卿等更爲國事, 誠苟且矣。 從今諸臣能不復欺予耶?" 光佐等曰: "爲臣子者, 決不敢復爾矣。" 上曰: "旣復膳, 他何諭乎? 頃罷兩相, 只爲國體, 旣知其心, 復何相持? 前左右相幷敍用, 明朝命招領相, 使之卜相。" 仍敎曰: "噫! 今玆之擧, 所執固矣。 半夜便殿, 叩首中庭, 難拂大臣國舅諸臣之意, 擧示粥飮, 上以慰列朝慈闈之心, 下以副元良軍民之望。 從此以往, 若予初政, 咨予大小臣僚, 赫然精白, 固我宗國。" 光佐言: "金取魯有八十老母, 遠離可矜念。" 上特命宥之。 大司憲李春躋、大司諫申晩以合辭之無批, 前席之闕啓, 俱是前未有也, 請遞職, 幷命勿辭。 是筵, 上語及輔導世子事曰: "宮中有茶食刻板之畫八卦者, 予意常謂口嚼如何, 未嘗進御矣。 近者世子亦不食之, 乳母問其故, 答曰八卦不可食, 其姿稟之英發如此。"


  • 【태백산사고본】 34책 4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6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어문학(語文學) / 사법(司法) / 식생활(食生活)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