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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43권, 영조 13년 3월 3일 신묘 4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경상도 감사 민응수가 도내의 이수연·조세붕·정희운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리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도내(道內)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기를,

"이광정(李光庭)의 문한(文翰)과 박몽징(朴夢徵)의 독학(篤學)으로 끝내 일명(一命)을 받지 못했으니, 전후 도신들의 천문(薦聞)이 문구(文具)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안(禮安)이수연(李守淵)은 곧 선정(先正) 이황(李滉)의 6세손(世孫)으로, 가훈(家訓)을 정성스럽게 지키고 학식의 조예도 뛰어났으므로 재랑(齋郞)에 제수된 적이 있었습니다만, 버리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안동(安東)김세열(金世烈)은 평소 지조(志操)가 있어 곤궁한 것을 견디고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영우(嶺右)에서는 하덕망(河德望)·강성화(姜聖和)가 대신의 천문(薦聞)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안(比安)권빈(權䎙)은 지조와 행실이 매우 확고하고 학행(學行)을 겸비하였으며, 안음(安陰)신수이(愼守彝)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가 재능도 갖추고 있으며, 금산(金山)조세붕(曹世鵬)은 명신(名臣) 조위(曹偉)의 후손으로 효우(孝友)와 행실이 한 고장의 추중(推重)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도내의 명망이 있는 선비들이니, 모두 똑같이 수록(收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영남은 사부(士夫)의 기북(冀北)051) 인데, 오로지 우도(右道)는 근래에 와서 풍습이 더욱 변천해진데다가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나왔기 때문에 추로(鄒魯)의 고장을 도리어 촉인(蜀人)052) 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특별히 진작(振作)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자포 자기하여 글을 읽는 종자(種子)들이 영원히 끊기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영인(嶺人)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또한 조정의 근심이기도 하므로, 신이 널리 수집한 것은 실로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합천(陜川)강지은(姜趾殷) 같은 사람은 문학이 구비되고 자기(姿氣)도 강명(剛明)하여 무신년053) 에 의병(義兵)을 창도하여 수립한 공이 매우 탁월했으며, 같은 고을의 정희운(鄭熙運)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으로 재식(才識)과 의행(懿行)에 고가(故家)의 풍도가 있는데, 무신년 난리 때 본군(本郡)에 글을 올려 비분 강개한 마음으로 적도를 칠 것을 청했으며, 거창(居昌)이휘(李暉)는 지극한 효성이 있고 기절(氣節)과 학식(學識)이 있는데, 무신년 난리를 당하여는 달려가 신정모(申正模)를 길에서 막아 의리를 분발하여 면책(面責)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 또한 마땅히 권장해서 발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서 감동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함창(咸昌)의 고 사인(士人) 채지면(蔡之沔)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경주(慶州)의 고 사인 한여유(韓汝愈)《대학(大學)》의 혈구변(絜矩辯), 《중용(中庸)》의 흑문(或問), 논선천괘변도(論先天卦變圖) 등의 학설을 저술하였는데, 대부분 스승의 지도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깊은 조예를 쌓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서 벼슬하여 뜻을 시행해 보지 못하였고 죽어서도 그대로 매몰(埋沒)되었으니, 마땅히 추증(追贈)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진달하기를,

"고 명신(名臣) 조위(曹偉), 선정신(先正臣)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일찍이 숙종조(肅宗道) 때 벼슬과 시호를 더 추증하게 하였으며, 고 명신 곽재우(郭再祐)조종도(趙宗道) 때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삼가 은명(恩命)을 받지 못했으니,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명하여 거행하게 하고, 또한 그 자손들도 녹용(錄用)함으로써 선조(先朝)의 총전(寵典)을 마무리 짓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전조(銓曹)에 신칙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40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물(人物)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註 051]
    기북(冀北) : 중국 기주(冀州)의 북방(北方)으로, 준마(駿馬)가 많이 나는 곳임. 전하여 인재가 많은 고장임을 일컫는 뜻으로 썼음.
  • [註 052]
    촉인(蜀人) : 당(唐)나라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亂) 이후 반역(叛逆)하여 복종하지 않았던 유벽(柳闢)이 통솔했던 촉(蜀) 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임.
  • [註 053]
    무신년 : 1728 영조 4년.

慶尙監司閔應洙疏薦道內人才曰:

李光庭之文翰, 朴夢徵之篤學, 終不霑一命, 前後道臣之薦聞, 不過爲文具。 禮安 李守淵卽先正李滉六世孫, 恪守家訓, 學識超詣, 曾除齋郞, 棄而不就。 安東 金世烈素有志操, 固窮讀書, 恥於自衒。 嶺右則河德望姜聖和曾被大臣之薦聞, 而比安 權䎙操履甚確, 學行兼備, 安陰 愼守彛學行精篤, 且有才具, 金山 曺世鵬以名臣之後, 孝友踐履, 鄕里推重。 此皆道內之望士, 俱宜一體收錄也。 嶺是士夫之北, 而惟右道挽近以來, 風習益渝, 重以輩出, 故之鄕, 反以蜀人待之。 若不別爲振作, 則人將相率自暴, 讀書種子, 幾致永絶。 非但嶺人之羞, 實亦朝廷之憂, 故臣廣加採摭, 意實有在。 如陜川 姜趾殷, 文學俱備, 姿氣剛明, 戊申倡義, 樹立甚卓。 同郡鄭熙運文獻公 汝昌之後, 才識、懿行有故家風, 當戊申亂, 呈書本郡, 慷慨請討。 居昌李暉至孝, 有氣節學識, 當戊申亂, 往要申正模於路, 奮義面責。 此三人亦宜奬拔, 俾爲觀感焉。

又言:

咸昌故士人蔡之沔受業於先正宋時烈宋浚吉之門, 慶州故士人韓汝愈有所著《大學絜矩辨》《中庸或問》《論先天卦變圖》等說, 率皆不由師承, 獨自超詣。 若此類, 生不達施, 死亦埋沒, 宜有追貤激勸之道。

仍陳:

故名臣曺偉、先正臣金宏弼鄭汝昌曾在肅廟朝, 加贈爵謚, 故名臣郭再祐趙宗道亦贈謚爵, 而殆過三十年, 尙不袛延恩命, 伏望特命擧行, 亦錄用其子孫, 以卒先朝寵典。

上從之, 申飭銓曹。


  • 【태백산사고본】 33책 4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40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물(人物)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