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조하 민진원의 졸기
봉조하 민진원(閔鎭遠)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면서 하유하기를,
"민 봉조하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신하로서, 고집하는 것은 막힌 점이 있으나 나라를 위하는 단심(丹心)은 변함이 없었으니, 내가 전후에 간격없이 대우했던 것은 그것 때문인 것이다. 몇 년 간 고심(苦心)하면서 조정하려 애썼던 두 봉조하의 뜻이 깊었었다. 아! 성후(聖后)의 동기로는 오직 이 사람이 있었을 뿐인데, 작년에 부부인(府夫人)이 입궐했을 적에 함께 자위(慈闈)를 모셨었다. 그 자리에서 그가 노쇠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인(家人)처럼 자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어찌 갑자기 졸서(卒逝)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녹봉(祿俸)은 3년 동안 그대로 지급하고,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장(禮葬)하는 것을 모두 준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민진원은 성품이 집요(執拗)한데다가 당(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훙서(薨逝)했을 적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입대(入對)하여 송 인종(宋仁宗) 때의 고사(故事)처럼 종신(宗臣)을 간택하여 양육할 것을 청하였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였다고 했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민진원은 폐부(肺腑)처럼 가까운 친척으로 시례(詩禮)467) 의 교훈을 받았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유독 풍재(風裁)를 지켰으므로 명망이 일시에 무거웠었습니다. 신축년468) ·임인년469) 에 화환(禍患)이 일어났을 적엔 멀리 귀양갔었는데, 을사년470) 에 제일 먼저 정승에 임명되자, 수차(袖箚)를 올려 경종(景宗)에게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중외에 반시(頒示)하여 저사(儲嗣)를 세운 의리를 밝힐 것을 청하였다가, 한쪽 사람들에게 크게 공척(攻斥)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정미년471) 이후에는 마침내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이광좌(李光佐)와 함께 동시에 치사(致仕)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서(卒逝)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신(史臣)이 집요한데다가 당에 대한 병통이 있다고 기록한 것에서도 이광좌의 무리들이 기필코 비난하여 헐뜯으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27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정론-간쟁(諫諍) / 재정-국용(國用) / 역사-사학(史學)
- [註 467]시례(詩禮) : 가정 교육을 가리키는 말.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의 내용 가운데 공자(孔子)가 자기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詩)를 배웠느냐고 묻고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었다는 데서 온 말임.
- [註 46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469]
○丁巳/奉朝賀閔鎭遠卒。 上震悼諭曰: "閔奉朝賀以休戚之臣, 所執雖滯, 丹心爲國, 予所以待之, 前後無間。 幾年苦心調劑, 兩奉朝賀意則深矣。 噫! 聖后同氣, 惟有此人。 昨年府夫人之入闕, 同侍慈闈, 悶其衰耄, 若家人之酬酢, 豈意遽逝乎? 祿俸限三年仍給, 賜謚禮葬, 竝如例。"
【史臣曰: 鎭遠性執拗, 病於黨最痼, 然在官以淸儉稱。 孝章世子薨, 以原任大臣入對, 請如宋 仁宗故事, 擇宗臣養之。 世以爲言人所難言云。】
臣謹按: "鎭遠以肺腑之親, 襲詩禮之訓, 立朝獨持風裁, 望重一時。 辛壬禍作, 被遠謫, 及乙巳, 首膺枚卜, 進袖箚, 請以景廟病患, 頒示中外, 明建儲義理, 大爲一邊人所斥。 丁未以後, 遂不安於朝, 與李光佐, 同時致仕, 至是卒。 史臣之以執拗黨痼筆之者, 亦可見光佐黨之必欲詆毁也。"
- 【태백산사고본】 32책 4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27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정론-간쟁(諫諍) / 재정-국용(國用) / 역사-사학(史學)
- [註 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