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41권, 영조 12년 4월 18일 임오 3번째기사
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전 현감 이중태가 양녕 대군과 함께 효령 대군도 사우에 포함시키자고 청하다
전 현감(縣監) 이중태(李重泰) 등이 상소하기를,
"주(周)나라에는 태백(泰伯)과 우중(虞仲)175) 이 있고 우리 조정에는 양녕(讓寧)과 효령(孝寧)이 있으니, 이것이 공자[夫子]가 지극한 덕(德)이라고 칭송을 하고 숙종[肅廟]께서 지덕사(至德祠)를 건립하게 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태백을 칭송함에 청권(淸權)이라는 찬양이 아울러 우중에게도 미쳤었는데, 숙종께서 양녕의 사우를 건립함에 그 표현(表顯)하는 거조가 유독 효령에게만 빠뜨려져서 쌍(雙)으로 이룬 덕(德)을 지금까지 함께 찬미하여야 할 거조가 결여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사우를 건립하고 편액(扁額)을 내려, 주(周)나라에서만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하지 마소서."
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비답(批答)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41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0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註 175]태백(泰伯)과 우중(虞仲) : 주(周)나라 태왕(太王)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태백(泰伯), 둘째가 중옹(仲雍:우중(虞仲)이라고도 함), 셋째가 계력(季歷)임. 태백이 태왕의 의중에 계력을 세우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동생인 중옹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하여 문신 단발(文身斷髮)을 하고 막내인 계력에게 양위(讓位)하였는데, 태백이 형만으로 옮겨 가는 등 세 차례에 걸쳐 사양한 일이 있었지만 은미(隱微)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칭찬하는 이가 없었음. 그러나 공자(孔子)가 그 사실을 밝히고 지극히 높은 덕[至德]을 가진 분이라고 칭송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