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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2월 25일 경인 1번째기사 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민형수와 이종수가 번갈아 올린 상소와 이종성을 죄줄 것에 대한 김재로의 아룀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근일에 민형수(閔亨洙)이종성(李宗城)이 번갈아 서로 소를 올렸는데, 그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며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종성은 세상에 수용(需用)할 재능이 있어 제배(儕輩)들보다 뛰어난데, 그 논의하는 바가 본래 스스로 느즈러지지 아니하며 정사의 주의(注擬)에서는 한편에 치우친 바가 없지 않으므로, 신이 일찍이 이것을 힘써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종성이 어찌 사정(私情)을 행하려는 데에 뜻이 있겠습니까? 대개 관리를 등용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뒤로부터 전주(銓注)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삼사(三司)에서 자기의 일을 논하였는데, 비답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대변(對辯)하면서 남의 집안과 세대를 헐뜯다가 그 말이 그 아비와 형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 사체(事體)를 크게 잃게 된 것이니, 마땅히 이종성을 죄주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자못 그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이종성의 관직을 파면시키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이를 진정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송인명이 또 김상적(金尙迪)민형수(閔亨洙)의 관직을 파면시켜서 서로 남의 조상을 헐뜯는 풍습을 징계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대개 김상적이 사관(史官)으로 천거되었을 때에 민형수한원(翰苑)193) 의 선생안(先生案) 소주(小註)에 실려 있는 김선여(金善餘)의 사건으로써 이를 저지하였었다. 그 뒤에 김상적이 대관(臺官)이 되자 상소하여 그 무고한 것을 변명하니, 민형수가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김상적이 한원의 선생안을 대하면 능히 이마에 진땀을 흘리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김상적이 또 말하기를,

"난대(蘭臺)194) 의 첩자(帖子)에 주(註)를 달았던 것은 홀로 신의 가문(家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이마에 땀을 흘렸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민형수의 선조인 민수(閔粹)가 사초(史草)를 지우고 고쳤기 때문에 국문(鞫問)을 당하여 노예로 삼았던 일이 또한 제명(題名)의 첩자에 기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송인명이종성의 일로 인하여 두 사람에게 다 죄를 주자고 청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9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人事) / 역사-편사(編史) / 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庚寅/上引見大臣、備堂。 左議政金在魯言: "近日閔亨洙李宗城迭相投疏, 風習不好, 非細憂也。 宗城需世之才, 勝於流輩, 而論議本自不緩, 政注不能無偏, 臣嘗勉戒, 然宗城豈志於行私哉? 蓋自參用之後, 銓注尤難故也。 但三司論己事, 而不待批, 先對卞侵人家世, 推及父兄者, 大失事體, 宜罪宗城。" 右議政宋寅明頗救之, 上命罷宗城職, 蓋以鎭之也。 寅明又請罷金尙迪閔亨洙職, 以礪互辱祖先之習, 上可之。 蓋尙迪之被史薦也, 亨洙以翰苑先生案小注, 金善餘事沮之。 後尙迪爲臺官, 疏卞其誣, 亨洙又疏曰:

尙迪對案, 能不泚顙乎?

尙迪又言: "蘭臺之帖懸註者, 不獨臣家, 然其後孫未聞顙之有泚。" 蓋亨洙先祖以塗改史草, 被鞫爲奴事, 亦載於題名帖, 故云。 至是, 寅明李宗城事, 請兩罪之。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9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人事) / 역사-편사(編史) / 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