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화목과 원자의 덕성 진작, 근시와 액례, 언로의 넓힘 등에 대한 이석표의 만언소
지평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함열 현감(咸悅縣監)에 보임하였는데, 그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부임하게 하였다. 이석표는 판서 이인엽(李寅燁)의 손자였는데, 그 아비 이하곤(李夏坤)은 포의(布衣)로서 문장에 능하여 훌륭한 명망이 있었다. 이석표도 또한 일찍이 명성을 지고 연달아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차례 대간의 자리에 들어갔으나 한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사람들은 혹시 그가 순묵(循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만언소(萬言疏)를 올려서 임금의 결점과 사폐(時弊)를 극언(極言)하였는데, 절실하고 곧아서 아무런 숨김이 없었다. 그 절목에 말하기를,
"첫째, 궁중(宮中)을 화목하게 하여 거룩한 교화(敎化)를 독실하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후궁(後宮)에 대하여 총애하는 것이 지나치게 융숭하여 상사(賞賜)를 너무 자주 행하는데, 상사가 너무 잦으면 사람들의 마음과 뜻이 사치스러워지고 은총이 지나치게 융숭하면 권세가 무거워집니다. 사치하는 마음으로써 무거운 권세를 의지하게 되면 포주(抱裯)의 교훈174) 을 삼가 지켜 밤을 당하여 시침(侍寢)하는 기롱(譏弄)을 범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둘째, 원자(元子)를 가르쳐서 덕성(德性)을 길러야 합니다. 원자가 새로 탄생하신 초기에 금화(錦靴)와 문관(紋冠)을 만들어 들여오게 하셨는데, 이것은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하여 후사(後嗣)에게 평안함을 남겨주는 모책(謀策)이 아니니, 지난날 대신들이 절약하라고 청한 것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셋째, 근시(近侍)와 액례(掖隷)를 억눌러서 내전(內殿)을 엄숙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액례가 교만하고 방자한데도, 언제나 용서와 보호를 받아서 점차 변하여 약원(藥院)의 일까지 빚어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요구하는 것은 청죽(靑竹)에 그쳤지마는 청죽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우황(牛黃)에 이르게 되며, 우황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인삼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자는 장무(掌務)에 그쳤지마는 장무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제조(提調)에 이르게 되며, 제조에서 그치지 아니하면 대신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넷째, 여러 신하들을 분별하여서 그 직임(職任)을 정선(精選)하여야 합니다. 전하의 병통은 직언(直言)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시기 때문에 윤순(尹淳)이 절수(折受)하는 일을 말하였다가 왕지를 거스렸으며, 이종성(李宗城)이 귀주(貴主)의 제택(第宅)에 관한 일 때문에 왕지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전하의 뜻을 거스린 자가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좋아하는 바는 그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유(李瑜)는 비밀히 상소하여 성상의 은총을 받았고, 윤혜교(尹惠敎)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관직(館職)을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저들 귀척 대신(貴戚大臣)들이 4년 동안 낭묘(廊廟)의 자리를 차지하여 조처를 시행한 것이 어떤 시책이었으며, 3주(三晝) 동안 궁궐[厦氈]에 머물면서 건백(建白)한 것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전각(殿閣)에 오르면 한마음으로 왕명을 받들고 순종하기를 거의 왕규(王珪)의 삼지 재상(三旨宰相)175) 과 같으며, 논박을 당하면 잠깐 물러갔다가 도로 출사(出仕)하는 것은 또한 유면화(劉綿花)와 비슷하였습니다. 교활한 역관(譯官)을 시켜 권문(權門)을 초치하였고 어리석은 아들을 시켜 뇌물을 받았으며, 심지어 궁방(宮房)의 재목까지도 손수 물목(物目)을 써 주었고, 해당 창고의 월름(月廩)에 있어서도 몸소 두량(斗量)을 점검하여 일들이 지극히 자질구레했으니, 장차 어떻게 백료(百僚)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안으로는 귀주(貴主)의 정분(情分)에 이끌리고 밖으로는 도위(都尉)의 안면(顔面)에 구애되어 잠정적으로 얽매어 두는 것인데, 마땅히 예로써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언로(言路)를 넓히고 선비의 기풍을 장려해야 합니다. 대각(臺閣)에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말을 하지 않는 폐단은 군상(君上)께서 간언(諫言)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태중(李台重)의 상소에 대하여 큰소리로 꾸짖은 것은 온전히 그 체모(體貌)를 잃어버렸고, 김상로(金尙魯)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한 말은 더욱 실언(失言)하였으며, 이종성(李宗城)처럼 극언하면서 논란하기를 다한 자에 대해서 혹은 비웃기도 하고 혹은 조롱하기도 하여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헐뜯는 것 같기도 하였으니, 그 전사옹(田舍翁)을 죽일 뜻176) 이 이미 싹트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염치(廉恥)를 권장하여 명분과 절개를 높여야 합니다. 지금의 문사(文士)들은 하나같이 돈을 사랑하고 작위(爵位)를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영관(瀛館)의 자리는 죽어도 회피하면서 전랑(銓郞)의 자리는 즉시 취임하고, 해조는 극력 사양하면서 홀로 이조 참의의 자리에 나오며, 제조(提調)는 부탁하여 도모할 자리가 아닌데도 재상이 친히 절간(折簡)을 보내고,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은 넘겨다볼 수 있는 직위(職位)가 아닌데도 명관(名官)들이 〈자주 찾아와〉 전조(銓曹)의 자리가 다 해어질 지경입니다. 여름철의 부채와 겨울철의 책력은 그 수량이 많은지 적은지를 비교하여 헤아리고 삭봉(朔俸)과 세궤(歲餽)는 그 물량의 풍부한지 부족한지를 견주어 참량(參量)해서, 혹은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러서도 여러 곤임(閫任)들에게 절간을 보내어 친히 혼인과 영향에서 쓰이는 물품들을 토색질하기도 하며, 혹은 몸이 전조의 자리에 있으면서 무신의 수령을 임명하여 보낼 적에 가격이 싼 말을 후하게 값을 받고 팔아먹기도 합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사람을 쓰실 때에 그 작록(爵祿)을 사랑하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그 작록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나아오게 하며, 그 의리를 사랑하는 자들을 승진시키고 재리(財利)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치신다면, 세상에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재(李縡)는 10년 동안 산림(山林)에 있었고 김진상(金鎭商)은 젊은 나이에 편안하게 은퇴하였으니, 마땅히 이들을 더욱 포장하여 잠깐 벼슬길에 나왔다가 잠깐 물러가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소서.
일곱째, 사치를 없애고 검소한 덕을 밝혀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복어(服御)에 대하여 천박하고 누추한 것을 혐의스러워 하지 아니하시지만, 후궁(後宮)들 사이에서는 기라(綺羅)로써 어지럽게 사치하고 있습니다. 그 공봉(供奉)하는 데에 있어서도 전하께서는 소박(素朴)하고 검소함을 수치스러워하지 아니하시지만 귀주(貴主)의 집에서는 진수 성찬이 끊이지 아니하니, 이것은 특히 바깥으로 검소하고 질박한 뜻을 보여 여러 아랫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가리려는 데에 지나지 아니할 따름입니다. 통탄할 만한 것은 겨우 조정의 사적(仕籍)에 오르기만 하면 거개 조랑말을 타고,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오르면 문득 강가에 정자(亭子)를 세웁니다. 진신(搢紳)의 부류(部類)들이 위에서 참람한 짓을 하니, 여항(閭巷)의 사이에서 갑자기 서로 이를 본받습니다.
여덟째, 기강을 진작(振作)하여 퇴패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왕옥(王獄)에서 지레 풀려 나온 학사(學士)는 그 죄가 고신(告身)177) 을 거두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과장(科場)에서 간계를 쓴 유생(儒生)은 그 형벌이 겨우 한 차례 형신(刑訊)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해조의 아관(亞官)은 음직 당상(蔭職堂上)을 돌아가면서 차정(差定)하는 자리가 되었고, 대간(臺諫)의 청선(淸選)은 시임 재상들이 생색(生色)을 내는 자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호남·호서 지방의 번임(藩任)은 중요한 직임인데도 천박하고 어리석은 자제들을 외람되게 등용하였고, 낭서(郞署)의 자리는 현질(顯秩)인데도 시골 출신의 평범한 무리들을 구차스럽게 보충하였습니다. 송문상(宋文相)의 탐오한 장물죄(贓物罪)도 또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결과로 돌아갔고, 이하택(李夏宅)의 역절(逆節)을 아직도 밝게 핵실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신(武臣)들의 교만한 습성은 점차 제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애당초 총관(摠管)을 제수하면 문득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한 번 시망(試望)에 들어가면 언제나 패소(牌召)를 어기니, 윗사람을 능멸하고 아랫사람에게 오만한 태도는 문관(文官)보다도 심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어찌 정중부(鄭仲夫)178) 의 전철을 다시 밟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처음에 ‘임금의 덕이 점차 처음과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이르기를,
"한 사람의 몸이 판연히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고, 한 사람의 말이 마치 두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고, 끝에 마음을 바루어 병폐를 제거하는 근본을 삼으라고 하였으며, 동중서(董仲舒)의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서 조정(朝廷)을 바로잡으라.’는 말과 주자(朱子)의 ‘일만 가지 일이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한다.’는 말로써 결말(結末)을 지었다. 말단에 또 말하기를,
"무신들이 전에 이미 전하께 아첨하는 말을 올렸고 종신(宗臣)들도 지난번에 또 대비전[東朝]에 아첨하는 말을 올렸는데, 일후에 무신에게서 나온 것이 문신에게서도 나오지 않으며, 대비전에 아첨하는 자들이 전하께도 아첨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행여나 이와 같은 마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한 번 흔들린다면 대본(大本)과 대원(大原)이 바른 데로 돌아가는 그러한 날이 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나이 젊은 신진(新進)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숨김 없이 말하여 실상(實狀)에 지나친 바가 있으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상소의 원장(原章)을 궁중에 머물러 두라. 내 자신에 허물이 없으면 더욱 힘쓸 것이요, 허물이 있으면 맹성(猛省)하겠다. 영상[首揆]의 일에 이르러서는 미세한 일들을 모조리 주워 모아서 대신의 허물을 들추어 내었는데, 이것이 과연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하였다. 그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소대(召對)를 열었는데, 그 상소가 들어가자 즉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상(領相)을 돈유(敦諭)하였다. 또 유시를 내리기를,
"문언박(文彦博)은 현명한 상신이었고 당개(唐介)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였는데, 문언박은 특별히 영주(英州)에 보임(補任)하였고 당개는 별가(別駕)에 제수179) 하여 황문(黃門)180) 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으니, 대개 특별히 보임한 것은 대신을 공경하였기 때문이고, 호송한 것은 바른 말을 하는 신하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석표(李錫杓)가 진술한 말은 모두가 간절하고 곧으니, 대신을 배척한 한 가지 일로써 그를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오직 그가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서지도 아니하여 관리들을 승진시켜 제배(除拜)하는 때에 경알(傾軋)하였으니,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조정의 체모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를 신칙하기만 하고 포장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이석표를 함열 현감에 제수하고, 특별히 역마(驛馬)를 타고 가도록 하여서 내가 나라의 체모를 중하게 여기고 바른 말을 하는 신하를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이석표의 봉장(封章)은 그대로 쌓아둔 지 본래 오래 되었는데 조목별로 기록한 내용이 많았다. 장차 상소문을 정서(淨書)하기에 미쳐 ‘당파의 습성을 깨뜨리자’는 한 가지 조목은 뽑아 버렸다. 그리고 이미 그 상소가 궁중에 들어가자, 그는 스스로 무거운 견책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서신으로 그의 숙부 이명곤(李明坤)에게 고별하고, 또 그 원초(原草)를 보내어서 이것을 비밀히 간직하도록 하였다. 이명곤이 그때 영월 부사(寧越府使)로 있었는데, 상소의 원본을 궁중에 머물러 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경솔히 도백(道伯)에게 이것을 보였기 때문에 드디어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송징계(宋徵啓)와 조최수(趙最壽) 등이 인혐(引嫌)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임금이 상소 중에는 그 내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을 금지시켰다. 그 ‘당파의 습성을 깨뜨려서 실효를 꾀하자’는 한 가지 조문은 비록 예람(睿覽)을 거치지 아니하였으나, 이미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으므로, 사관(史官)이 이것을 추후하여 기록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생각하건대, 전하의 탕평책(蕩平策)은 아직도 미흡하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쓸 때에는 반드시 노·소(老少) 양당에서 천거하게 하여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자 하고, 간언을 들을 때에는 일찍이 그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하지 아니하며, 형벌과 상사(賞賜)를 자신의 임의로 하지 못하고,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도 스스로 주관하지 못하여 일단의 의견이 오로지 일을 미봉(彌縫)하는 데에 있으니, 비록 당파를 깨뜨리고자 하더라도 진실로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왕조 때에 망명(亡命)한 사람들을 죄가 있다고 이른다면 마땅히 죽여야 하고 죄가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석방하여야 하는데, 처음에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여 두었다가 나중에는 곧 양이(量移)하며, 평생토록 의지하고 기대는 신하에게는 그 은총이 악수(握手)하는 데에까지 미치고 그 포상이 해를 꿰뚫을 만큼 지극하지만, 그들이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빨리 치사(致仕)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전하께서 형벌과 상사를 과연 스스로 임의로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수원(柳壽垣)의 학식이 어찌 송징계(宋徵啓)만 못하여 홀로 영선(瀛選)에서 누락되었고, 오광운(吾光運)의 문한(文翰)이 또한 어찌 조최수(趙最壽)에 미치지 못해서 국자감(國子監)의 의망(擬望)에 통과되지 못했으며, 홍경보(洪景輔)의 재주와 명망이 어찌 유복명(柳復明)보다 못해서 도리어 번임(藩任)의 제수에 저지되었고, 홍정명(洪廷命)의 주벌(胄閥)이 어찌 박치문(朴致文)에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대성(臺省)의 의망(擬望)에 아직도 저지되었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을 스스로 주장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파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말하기를,
"홍성보(洪聖輔)·윤광천(尹光天)처럼 이익을 좋아하고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지만, 곧 평일에 고담 준론(高談峻論)을 하며 스스로 청탁을 분별한다는 자들도 또한 때에 따라서 변화하니, 홍성보의 무리와 더불어 오십 보 백 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김일경(金一鏡)이 역적질한 것이 우리 편의 결백함에 무슨 허물이 되겠으며 저쪽 편의 더러움에 무슨 신선함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드시 우리 편의 두면(頭面)을 바꾸어 저쪽 편의 비위를 받들도록 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그들의 함정에 빠지고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사대부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초조하게 가슴을 태우는 조명익(趙明翼)과 왕명을 순순히 받드는 이춘제(李春躋)를 오래도록 근밀(近密)에 두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8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신분(身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註 174]포주(抱裯)의 교훈 : 이는 《시경(詩經)》 소성(小星)의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여러 첩이 임금을 모시는 데 있어서 후비(后妃)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첩으로서의 분수에 충실히 함을 말함.
- [註 175]
왕규(王珪)의 삼지 재상(三旨宰相) : 송(宋)나라 재상 왕규(王珪)가 1에도 성지(聖旨)가 지당하고 2에도 성지가 지당하며 3에도 성지가 지당하다고 하여, 무슨 일에나 천자(天子)의 뜻만 좇았다는 고사(故事). 곧 무능한 재상을 조소하는 말.- [註 176]
전사옹(田舍翁)을 죽일 뜻 : 전사옹(田舍翁)은 위징(魏徵)을 가리킴. 위징이 예의를 내세워 당 태종(唐太宗)의 사심(私心)을 견제하자, 당 태종이 노하여, "내가 결단코 전사옹을 죽이고야 말겠다." 하였는데, 장손 황후(長孫皇后)가 그 말을 듣고,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가 강직하다고 합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였음. 그러나 위징이 죽고 나서 위징의 비문 내용을 못마땅하게 여긴 태종은 그 비석을 쓰러뜨리게 하였음.- [註 177]
고신(告身) : 직첩.- [註 178]
정중부(鄭仲夫) :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무신(武臣). 고려 의종 24년(1170) 조정에서 문신(文臣)을 우대하고 무신(武臣)을 천대하여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가던 중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는데,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던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뇌(韓賴)에게 뺨을 맞는 모욕적인 일이 생기자, 임금이 보현원에 도착한 무렵 정중부 등 모든 무신들이 들고 일어나 문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임금을 거제(巨濟)로 추방하였음.- [註 179]
문언박은 특별히 영주(英州)에 보임(補任)하였고 당개는 별가(別駕)에 제수 : 문언박(文彦博)은 송(宋)나라 현상(賢相). 당개(唐介)가 어사(御史)로 있으면서 촉(蜀)에 있을 때 뇌물을 환관에게 바쳤다고 문언박을 탄핵하자 인종이 그를 춘주(春州)로 내쳤는데, 너무 과증함을 깨닫고는 다시 영주(英州)로 바꾼 다음 문언박을 파직시켰음. 그리고 당개가 먼 길에서 죽을까 싶어 중사(中使)를 보내 호송하게 하였음. 후일에 문언박이 당개를 임금에게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당개가 비록 풍문을 잘못 들은 것은 있어도 또한 신의 병통을 많이 맞혔습니다." 하였음.- [註 180]
황문(黃門) : 황문(黃門)은 내시(內侍).○戊午/持平李錫杓上疏言事, 賜優批, 補咸悅縣監, 使騎馹赴任。 錫杓, 判書寅燁之孫, 父夏坤以布衣能文, 有盛名。 錫杓亦早負聲稱, 連魁大小科, 而屢入臺, 無一言, 人或疑其循默。 至是, 上萬言疏, 極言袞闕時弊, 切直不諱。
其目一曰: 和梱內以篤聖化。 殿下於後宮寵遇偏隆, 賞賜頻數。 賞賜頻數, 則心志侈, 寵遇偏隆, 則權勢重。 以侈心恃重權, 則其能謹守抱裯之訓, 不犯當夕之譏乎? 其二曰: 敎元子以養德性。 元子新降之初, 卽令製入錦靴、紋冠, 非以尙儉質, 以爲貽燕之謨。 向日大臣, 請以節損者, 非過言也。 其三曰: 抑近隷以肅內治。 掖隷驕橫, 每被容護, 馴至於藥院事矣。 今之所求者, 止於靑竹耳, 靑竹不已, 至於牛黃, 牛黃不已, 至於人蔘矣。 所辱者止於掌務耳, 掌務不已, 至於提調, 提調不已, 至於大臣矣。 其四曰: 辨群下以精選任。 殿下病痛, 惡聞直言, 故尹淳言折受事而忤旨, 李匡德言乾止山事而忤旨, 李宗城以主第事而忤旨。 所忤於殿下者如此, 則殿下之所好, 其人可知。 李瑜以密疏而怙恩寵, 尹惠敎以不言而保館職。 彼姻貴大臣, 四年廊廟, 施措者何策, 三晝廈氈建白者何事? 上殿則一意承順, 殆同王三旨, 被論則乍入旋出, 亦近劉綿花。 猾譯招權, 騃子受賄, 甚至宮房材木, 手自題狀; 該倉朔廩, 親檢斗量, 事極纖瑣, 將何以使百僚具瞻耶? 殿下內牽貴主之情, 外拘都尉之顔, 姑且羈縻之耳, 宜以禮退之焉。 其五曰: 恢言路以礪士氣。 臺閣含默之弊, 由於君上之不能用諫。 李台重之呵叱, 全失體貌; 金尙魯之批語, 尤是失言。 至若李宗城之極言竭論者, 或譏或嘲, 似譽似毁, 已萌其殺田舍翁之意矣。 其六曰: 勵廉恥以崇名節。 今之文士, 一何多愛錢而愛爵者? 瀛館死避而卽就銓郞, 該曹力辭而獨出吏議, 提調非圖囑之窠, 而宰相親自折簡, 天郞非覬覦之物, 而名官弊盡銓席。 夏扇冬曆, 較量多寡, 朔俸歲餽, 比挈豐薄。 或位至宰列, 而發簡諸閫, 親索婚宴之需; 或身處銓地, 而差送武倅, 厚鬻價廉之馬。 苟殿下用人之際, 退其愛爵祿者, 而進其不愛爵祿者; 升其好義者, 而黜其好利者, 則世道豈至於此? 李縡之十年山林, 金鎭商之早歲恬退, 尤宜褒尙, 以愧乍進乍退者焉。 其七曰: 革奢侈以昭儉德。 殿下於所服御, 不嫌薄陋, 而後宮之間, 綺羅紛靡。 於其供奉, 不恥寒儉, 而貴主之家, 珍羞絡繹, 特不過外示儉朴之意, 要遮群下之目而已。 所可痛者, 纔通朝籍, 則擧騎㺚馬, 已至宰列, 則輒起江亭。 搢紳之流, 旣自僭上, 閭巷之間, 遽相效尤。 其八曰: 振紀綱以正頹俗。 王獄徑出之學士, 罪不過爲告身; 科場用奸之儒生, 刑僅止於一次。 該曹佐貳, 爲蔭堂輪差之窠; 掌憲淸選, 作時宰生色之地。 湖藩重任, 闒茸之子濫躋; 郞署顯秩, 鄕庶之流苟充。 宋 文相之貪贓, 亦歸淸脫; 李夏宅之逆節, 尙不明覈。 武臣驕蹇之習, 漸至難制, 初經摠管, 輒陳辭疏, 一入試望, 每違牌召, 慢上傲下之態, 有浮文官。 若此不已, 幾何不至於復蹈仲夫之轍耶?
始言君德之漸不如初, 有曰:
一人之身, 判若兩截; 一人之言, 如出二口。
終以正心爲救病之本, 結之以董子正君心以正朝廷, 朱子萬事本於人主一心之語。 末又曰:
武臣前已進諛於殿下, 宗臣向又進諛於東朝, 安知日後出於武臣者, 不出於文官, 諛於東朝者, 不諛於殿下也? 或不能堅持此心, 一爲撓奪, 則大本大原之正, 無其日矣。
批曰: "年少新進, 有懷無隱, 有過實者, 深嘉愛君之誠。 原章留中。 無當加勉, 有當猛省。 至於首揆事, 湊合微細之事, 訐揚大臣之過, 是果出於公心乎?" 時, 上方開召對, 疏入卽賜批, 仍遣史官, 敦諭領相。 又下諭曰:
文彦博賢相, 唐介直臣, 而特補英州別駕, 以黃門護送。 蓋特補者, 敬大臣也; 護送者, 眷直臣也。 今李錫杓之所陳, 俱切直, 豈可以斥大臣一事訑訑也? 惟其不先不後, 傾軋於陞拜之時者, 殊不美, 然不過未諳朝體之致, 豈可有飭而無奬? 李錫杓除授咸悅縣監, 特令乘馹, 以示予重國體, 奬直臣之意。
始, 錫杓之封章也, 蓄積素久, 多所箚錄。 及將繕疏, 拔破黨習一條, 而旣疏入, 自意不免重譴, 乃以書告別于其叔父明坤, 且送其原草而使秘之。 明坤時在寧越官, 不知疏本留中, 輕示道伯, 遂致傳播, 乃有宋徵啓、趙最壽等引嫌之事, 上以疏中所無禁之。 其破黨習, 以圖實效一條, 雖未徹睿覽, 旣流行於世, 史官追錄, 其略曰:
臣以爲殿下之蕩平猶未也。 何者? 於用人則必欲雙擧而互對, 於聽言則不曾分是而別非, 刑賞不能自任, 用捨不得自主, 一段意思, 專在於彌縫, 雖欲破黨, 而實不能破也。 先朝亡命之人, 謂之有罪則當殺, 謂之無罪則當釋, 而始爲島置, 末乃量移。 平生倚仗之臣, 寵及於握手, 褒至於貫日, 而不待年至, 徑許致仕, 殿下之刑賞, 果能自任乎? 柳壽垣之學識, 何遽不若宋徵啓, 而獨漏瀛館之選; 吳光運之詞翰, 亦豈不及趙最壽, 而未通國子之擬; 洪景輔之才望, 詎下於柳復明, 而反阻藩臬之除, 洪廷命之冑閥, 豈比於朴致文, 而尙阻臺省之通, 殿下之用捨, 果能自主乎?
又言老少黨長短曰:
洪聖輔、尹光天嗜利無恥之輩, 固不足道, 乃其平日高談大言, 自謂稍別涇渭者, 亦且隨時變化, 其與聖輔輩, 不過五十步百步。 夫一鏡之爲逆, 何玷乎吾潔, 何鮮於彼濁, 而必欲換吾之頭面, 承彼之頷頤, 卒瀾漫於膠漆之盆, 而不自覺, 是豈非今日士大夫之羞乎?
又言: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8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신분(身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註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