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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 4월 4일 갑진 1번째기사 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좌의정 서명균이 화평 옹주궁의 토목 역사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위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이현궁(梨峴宮)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그 궁은 바로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옛집으로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오래도록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자,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이 집은 내 사친(私親)의 옛집인데, 근래 포수(砲手)의 무리들이 거주하는 바가 되었으니, 차라리 왕녀(王女)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 궁가(宮家)는 어의궁(於義宮)보다도 큽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그 뒤에 마침내 그 역사를 중지하였다. 서명균이 또 말하기를,

"전 시직(侍直) 이정섭(李廷燮)과 전 세마(洗馬) 민우수(閔遇洙)는 재능과 식견이 있으니, 마땅히 6품의 관직을 제수해야 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또 아뢰기를,

"조귀명(趙龜命)은 문학이 있고 전 현감 박필부(朴弼傅)는 경학이 있으며, 사인(士人) 신경(申暻)윤득운(尹得運)은 부호가(富豪家)의 자제로서 학문을 향하는 뜻이 있으니, 또한 마땅히 조용(調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정섭조귀명은 본래 문명(文名)이 있었고, 민우수는 바로 민진후(閔鎭厚)의 아들로서 학식이 있었다. 박필부는 바로 박세채(朴世采)의 아들이요, 신경신방(申昉)의 아우였으며, 윤득운윤유(尹游)의 아들이었는데 모두 경술에 어두웠으나, 혼동(混同)하여 조용(調用)하기를 청했으니, 사람들이 몰래 비웃는 자가 많았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75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인사-관리(管理) / 건설(建設) / 인물(人物)

    ○甲辰/上引見大臣、備堂。 時, 上爲和平翁主, 令內需司修治梨峴宮, 宮卽綾原大君舊第, 而屬之內司者也。 大興土木, 久未訖功。 左議政徐命均進戒, 上不悅曰: "此予私親舊第, 而近爲砲手輩所住, 毋寧作王女之第乎?" 命均曰: "此宮大於於義宮矣。" 後竟寢其事。 命均又言: "前侍直李廷燮、前洗馬閔遇洙有才識, 宜授六品職。" 吏曹判書宋寅明亦言: "趙龜命有文學, 前縣監朴弼傅有經學, 士人申暻尹得運以綺紈子, 有向學意, 亦宜調用。" 上從之。 廷燮龜命素有文名, 遇洙鎭厚子, 有學識。 弼傅世采子, , 弟, 得運, 子, 俱昧經術, 而混請調用, 人多竊笑。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75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인사-관리(管理) / 건설(建設)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