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 세자빈 조씨를 책봉하여 현빈으로 삼다
효장 세자빈(孝章世子嬪) 조씨(趙氏)를 책봉하여 현빈(賢嬪)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면 효장 세자빈을 빈궁(嬪宮)이라고 칭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실록(實錄)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고징할 수가 없었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은 덕빈(德嬪)이라고 칭하였는데, 공회빈(恭懷嬪)은 그 시호이며, 소혜 왕후(昭惠王后)도 또한 수빈(粹嬪)에 봉해졌으니, 세자빈(世子嬪)은 살았을 적에는 한 글자의 작호(爵號)를 가지지만, 죽었을 적에는 두 글자의 시호를 가지는 것이 나라의 전례인 것 같습니다. 지금 빈공에게도 마땅히 한 글자의 작호만을 더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두루 상고하게 하였는데, 공회빈을 덕빈에 봉한 사실과 소혜 왕후를 수빈에 봉한 사실은 모두 이것이 가례(嘉禮) 초기에 있었던 일이요, 정안 왕후(定安王后)는 처음에 덕빈(德嬪)에 봉해졌고, 원경 왕후(元敬王后)는 처음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폐빈(廢嬪) 김씨(金氏)와 봉씨(奉氏)도 또한 모두 작호가 있었는데, 예종(睿宗)과 인종(仁宗)이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빈궁들이 비로소 작호가 없었다.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예절을 아는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의논하기를,
"일후에 세자를 책봉(冊封)할 때에 빈궁에게도 마땅히 따로 작호를 내려 주어야 합니다. 정부(政府)와 관각(館閣)으로 하여금 모여서 이를 의논하게 하여 사체(事體)를 중하게 하여야 합니다. 소혜 왕후의 수빈(粹嬪)이라는 은인(銀印)은 아직도 태실(太室)에 있습니다만, 그 교명(敎命)에는 단지 세자빈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마땅히 옥인(玉印)은 있어야 하겠지만, 교명(敎命)과 죽책(竹冊)은 아마도 뒤따라 시행하기가 곤란할 듯합니다."
하고,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은 의논하기를,
"빈궁의 작호를 국초(國初)에는 책봉할 때에 으레 정하였었는데, 중고 시대에 이를 폐지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 빈궁은 단지 효장빈(孝章嬪)이라고 일컫더라도 아마 해롭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심수현(沈壽賢)은 의논하기를,
"인조조(仁祖朝) 이후에는 모두 한 글자의 작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예를 궐하거나 생략하게 될 것을 염려한 소치이니, 그때에 품정(稟定)한 것이 있을 듯합니다. 그 교명과 죽책과 옥인 등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형편으로는 뒤따라 시행하기가 곤란하겠습니다."
하고, 우참찬 정제두(鄭齊斗)는 의논하기를,
"한 글자의 칭호는 지금 내명부(內命婦)의 빈의 작호와 다를 바가 없으니, 중고 시대에 이를 폐지하였던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빈궁은 처음 책봉할 때에 이미 저궁(儲宮)이라는 존호를 사용하였으니, 지금 어떻게 다시 내명부의 관례를 쓰겠습니까? 다만 춘궁(春宮)께서 정위(正位)하는 날을 기다렸다가 빈궁의 저소(邸所)에도 따로 궁호(宮號)를 지어 주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연석(筵席)의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한 글자의 작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명하여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양관(兩館)·정부(政府)·육조 참판 이상을 불러 빈청(賓廳)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효빈(孝嬪)·철빈(哲嬪)·소빈(昭嬪)이라는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니, 의망(擬望)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또 장빈(莊嬪)·단빈(端嬪)·사빈(思嬪)으로써 의망을 더하였으나, 임금이 여러 글자의 음과 뜻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손수 ‘현(賢)’자를 써서 내리고, 명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해 예조·공조의 판서와 낭청(郞廳) 각각 한 사람씩을 당상(堂上)·낭청(郞廳)으로 차정하고 옥인(玉印)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으며, 내전(內殿)에서 선사(宣賜)하였는데, 교명(敎命)과 죽책문(竹冊文)은 없었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7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관리(管理)
○封孝章世子嬪趙氏爲賢嬪。 先是, 上以元子誕生, 則孝章嬪不宜稱嬪宮, 命考《實錄》, 皆無可徵。 宋寅明言: "順懷世子嬪以德嬪稱, 而恭懷其謚也, 昭惠王后亦封粹嬪。 世子嬪生, 有一字號, 死以二字謚者, 似是國典, 今嬪宮宜加一字爵號。" 命禮官博考璿譜, 恭懷嬪之封德嬪, 昭惠王后之封粹嬪, 皆在嘉禮初, 定安王后初封德嬪, 元敬王后初封敬嬪, 文宗大王廢嬪金氏、奉氏亦皆有爵號, 而自睿宗、仁宗之在東宮, 嬪宮始無爵號。 問議時原任大臣及知禮儒臣, 左議政徐命均議曰: "日後冊世子時, 嬪宮當別爲錫號。 令政府館閣會議, 以重事體。 昭惠王后 粹嬪銀印, 尙在太室, 而敎命只稱世子嬪。 今雖當有玉印, 而敎命竹冊恐難追行。" 奉朝賀閔鎭遠議曰: "嬪宮爵號, 國初例定於冊封時, 中古則廢。 今此嬪宮只稱孝章嬪, 恐不害。" 判府事沈壽賢議曰: "仁祖朝以後, 皆不用一字號, 恐闕略之致, 似有其時稟定者。 至若敎命竹冊玉印, 到今勢難追行。" 右贊成鄭齊斗議曰: "一字稱號, 與今內命婦嬪號無別, 中古之廢, 蓋以此也。 今玆嬪宮初冊, 旣用儲宮之尊, 則今何可復用內命婦之例乎? 但待春宮正位之日, 嬪宮邸所, 別作宮號似宜。" 上復詢筵臣, 皆言當有一字號。 是日命召時原任大臣及兩館、政府、六曹參判以上, 會議于賓廳, 以孝、哲、昭備三望以進, 命加望。 又以莊、端、思加擬, 上以諸字音義皆不佳, 手書賢字而下, 命設都監, 以禮工曹判書及郞廳各一人差堂郞, 造進玉印, 自內宣賜, 無敎命竹冊文。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7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