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명·김창집의 신원 문제를 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자기의 사당(私黨)을 구제하고자 하여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니,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4신(四臣)061) 이 똑같은 마음으로 일하다가 순국(殉國)하였는데, 오로지 이 두 사람만이 아직도 그윽한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신이 감히 신원(伸冤)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교지를 받으니, 황공(惶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고른다[臣擇君]’라는 세 글자에서 나는 이미 그 줄거리를 거론 하였는데, 경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니, 내가 마땅히 그 절목(節目)을 다시 유시(諭示)하여야 하겠다."
하니,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말하기를,
"신 등은 〈지난 계축년062) 1월〉 19일의 하교를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다만 성상께서 밝게 유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조 참판 신방(申昉)·이조 참의 이종성(李宗城)에게 이르기를,
"이조 판서는 일찍이 이것을 들었으나, 여러 신하들은 아직 듣지를 못하였다. 지금 만약 밝게 유시한다면, 타첩(妥帖)063) 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송인명 등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밝게 유시한다면 반드시 사사로이 당파를 위하는 마음을 품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 밖으로 물러가게 하였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불러들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덕수(徐德修)는 곧 나의 처조카인데, 서덕수의 사건은 어찌 내전(內殿)에 걸리는 바가 있지 아니하겠는가? 나라에 경사가 있은 뒤로 양궁(兩宮)의 사이에 화기가 애애(藹藹)하기를 바라는데, 지금 만약 서덕수의 사건을 다시 제기한다면, 내전이 어찌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말을 아직 끝마치지도 아니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뢰기를,
"어찌하여 이처럼 차마 귀로 들을 수가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원컨대 속히 이 말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었는데, 대비전[東朝]을 위험한 말로 두렵게 하던 자가 말하기를, ‘연잉군(延礽君)064) 이 정궁(正宮)을 박대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있는데, 지금 만약 그를 책립(策立)한다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065) 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었다.…"
하고, 말을 끝마치기도 아니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또 귀로써 차마 듣지 못할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전하는 것이고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경들이 모두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다시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이미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받으니, 어찌 감히 다시 이 문제를 제기 하겠습니까?"
하고, 판부사 이의현(李宜顯)이 말하기를,
"일후에는 비록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이러한 하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제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으로써도 오히려 마음이 시원하지 못하다."
하였다. 지사(知事) 신사철(申思喆)·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조 참판 신방(申昉) 등이 모두 말하기를,
"감히 다시는 이를 말하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으나, 판돈녕부사 심택현(沈宅賢)이 홀로 이의현의 말과 같았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으로써도 또한 마음이 시원하지 못하다."
"신이 병들고 귀가 먹어 자세히 듣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다시 말하겠습니까?"
하고, 판부사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19일의 하교에서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청한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하여 이미 변석(辨釋)하였는데, 지금의 상소에서는 오히려 상세하게 알지 못하여서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는 말하기를,
"오늘의 하교를 사관(史官)들이 어찌 차마 이를 쓰겠습니까? 사초(史草)의 책자를 마땅히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하고, 승지 이중협(李重協)이 또 하교한 것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책(史冊)에 쓰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위복(威福)의 큰 권한을 잡고 있으니, 비록 대관(大官)이라 할지라도 어찌 문책하고 징벌하기가 어렵겠는가? 그러나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이렇게 직접 유시하는 것은 대개 조정에서 겨우 화합하자마자, 또 장차 어그러져 분리될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신료들이 모두 이를 깨달아 알았다니, 도리어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다."
하고, 또 김흥경에게 이르기를,
"대신들은 마땅히 자신을 신칙하고 힘써야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이 말씀을 가지고 감히 불쾌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다만 작년에 당하였던 바로서는 의리상 체직(遞職)해야 당연하기에 여러 번 매복(枚卜)066) 하기를 청하였으나, 오랫동안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장차 인입(引入)하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흥경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경의 말을 따라서 매복할 것이니, 경도 또한 모름지기 나의 말을 따르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그 중에 한 사람은 내가 구별하고자 한다."
하니, 이의현이 말하기를,
"지금 이미 밤이 깊었으니, 다시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로써 이것을 처리하더라도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임금의 뜻은 홀로 이이명(李頤命)만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이의현의 뜻은 두 사람을 아울러 신원하려는 데에 있었던 까닭이다. 여러 신하들이 내전에서 물러나가자, 밤은 이미 4고(四鼓)였다. 이중협이 합문(閤門) 밖에 서서 사관(史官) 허후(許逅)·김상적(金尙迪)·임술(任述)·김태화(金兌和)로 하여금 사초의 책자를 가져와서 추려 내니 임금이 하교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그들이 겨우 승정원에 돌아가자, 임금이 다시 승지와 사관을 불러서 사초(史草)에 관한 일을 물었는데, 이중협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경종[景廟]과 전하께서 왕위를 주고받은 것이 광명 정대하니, 백세토록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세제(世弟)에 책봉(冊封)되던 날 신과 윤순(尹淳)·박사익이 똑같이 궁관(宮官)이 되었었는데,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시기를 마치 비오듯이 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동방의 무궁한 복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또 다시 편파적인 당론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또 성상의 하교를 받고 여러 사람들의 심정이 석연(釋然)하였으니, 누가 감히 다시 사사로이 당파를 위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이후로는 언제나 ‘여러 신하들이 석연했다.[諸臣釋然]’라고 일컬었는데, 대개 이중협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하교가 내전(內殿)에까지 언급되었기 때문에 물러가서 사사로이 말하면서 깊은 심려(心慮)가 있다고 하였는데, 전하는 말들이 떠들썩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 하였다. 드디어 정형복(鄭亨復)의 상소가 있었는데, 그날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으므로 역사를 편찬하는 자들이 그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가지고 참고하여 추후해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7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 사법-행형(行刑)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註 061]4신(四臣) :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
- [註 062]
계축년 : 1733 영조 9년.- [註 063]
타첩(妥帖) : 별 탈없이 일이 순조롭게 끝남.- [註 064]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 [註 065]
기사년의 일 : 숙종 15년(1689)에 왕자(王子) 이균(李盷)의 세자 책봉 문제가 발단되어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을 때 장희빈(張禧嬪)의 무고로 민비(閔妃)가 폐위(廢位)되었던 일을 말함.- [註 066]
매복(枚卜) : 여러 사람을 전형(銓衡)하여 그 가운데서 적임자를 선택하는 것. 매복이란 원래 점(占)을 쳐서 그 가운데서 가장 길(吉)한 것을 선택한다는 뜻으로, 정승(政丞)의 자리는 국가의 중임(重任)이므로 옛날에는 길흥(吉凶)을 점쳐서 뽑았다 함.○上引見大臣、備堂。 上曰: "諸臣欲濟其私, 困迫予至此。" 右議政金興慶曰: "四臣同心殉國, 而獨此二人尙抱幽冤, 故臣敢請伸矣。 今承此敎, 不勝惶恐。" 上曰: "臣擇君三字, 予已擧其綱, 而卿等不悟, 予當復諭其目。" 禮曹判書金取魯曰: "臣等未聞十九日下敎, 第請洞諭焉。" 上謂吏曹判書宋寅明、豐原君 趙顯命、吏曹參判申昉、吏曹參議李宗城曰: "吏判則曾聞之, 而諸臣則未聞。 今若洞諭, 可能妥帖乎?" 寅明等曰: "今若洞諭, 則必不懷黨私之心矣。" 上使諸臣, 少退戶外, 移時復召入。 上曰: "德修卽予妻姪也。 德修之事, 豈不有礙於內殿乎? 邦慶以後, 兩宮之間, 和氣庶可藹然, 而今若復提德修事, 則內殿豈得安乎?" 語未畢, 諸臣皆驚惶起奏曰: "何爲此不忍聞之敎? 願速止之。" 上曰: "當時有蜚語, 恐動東朝者曰: ‘延礽薄待正宮, 荒于酒色, 今若策立, 必復有己巳之事。’ 云云。" 語未畢, 諸臣曰: "何爲又發不忍聞之敎?" 上曰: "此則誦傳他言, 非予自言也。 今則卿等皆已洞然, 可以不復言乎?" 興慶曰: "旣承不忍聞之敎, 何敢更提?" 判府事李宜顯曰: "日後雖未可知, 旣承此敎, 何敢更提?" 上曰: "此猶未快也。" 知事申思喆、禮曹判書金取魯、兵曹判書趙尙絅、吏曹參判申昉等皆曰: "不敢復言。" 判敦寧沈宅賢獨如宜顯言, 上曰: "此亦不快也。" 錦原君 朴師益曰: "臣病聾不能詳聞, 而何敢復言?" 判府事徐命均曰: "十九日之敎, 聯箚代理則旣已剖析, 而今疏似猶未詳而然矣。" 戶曹判書李廷濟曰: "今日下敎, 史官何忍書之? 草冊宜焚之。" 承旨李重協又請還收下敎, 命勿書史冊。 上曰: "人君操威福之柄, 雖大官, 何難責罰, 而終夜不寐, 爲此面諭者, 蓋慮朝廷僅合, 又將乖離也。 今皆覺悟, 還可幸也。" 又謂興慶曰: "大臣宜自飭勵也。" 對曰: "臣豈以此, 敢懷不快, 而第昨年所遭, 義當必遞, 屢請枚卜, 久未蒙允。 以此將引入矣。" 上握興慶手曰: "予當從卿言而枚卜, 卿亦須從予言而勿辭。" 因謂諸臣曰: "其中一人, 予欲區別。" 宜顯曰: "今已夜深, 復以一張備忘, 處分何妨?" 蓋上意獨指李頣命, 而宜顯意在幷伸也。 諸臣退出, 夜已四皷。 重恊立閤門外, 使史官許逅、金尙迪、任述、金兌和, 取草冊來拈, 上敎焚之。 纔歸政院, 上復召承史, 問史草事, 重恊以實對, 仍奏曰: "景廟及殿下授受光明, 有辭百世。 殿下承儲之日, 臣與尹淳、朴師益, 同爲宮官, 目見殿下泣下如雨之狀, 顧謂同僚曰: ‘吾東無疆之福, 自此始矣。 不當復爲偏論矣。’ 今日又承下敎, 群情釋然, 孰敢復以黨私萌心乎?" 上悅。 是後, 每稱諸臣釋然, 蓋由重恊之言也。 諸臣以上敎及於內殿, 退而私語, 謂有深慮, 傳說譁然, 人皆疑懼。 遂有鄭亨復之疏, 伊日史草旣焚, 而修史者, 以所聞於入侍諸臣者, 參考追錄云。
- 【태백산사고본】 30책 40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7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 사법-행형(行刑)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註 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