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친(私親)의 부모에 대해 추증하다
임금이 사복(嗣服)158) 한 처음에 이광좌(李光佐)가 스스로 장씨(張氏)159) 를 추존(追尊)한 죄를 숨기고 또 임금의 뜻에 아첨하기 위해 임금의 사친(私親)을 추존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친(私親)의 부모(父母)에 대해서도 벼슬을 추증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비로소 창빈(昌嬪)·인빈(仁嬪)의 아버지에게 모두 의정(議政)을 추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을 불러 하교하기를,
"나는 선왕(先王)의 측실(側室)의 아들로서 외람되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외가(外家)가 한미하여 친속(親屬) 가운데 태복시(太僕寺)에서 복역(服役)하다가 그 일신을 마친 사람이 있으니, 내가 외가(外家)를 대우한 것이 너무 야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친(私親)에 대한 겸공(謙恭)하는 뜻을 본받으려고 한 때문이다. 그리고 사친의 아버지를 증직(贈職)시키는 일은 이미 선조(先朝)의 구례(舊例)가 있으니,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인빈(仁嬪)의 아버지 김한우(金漢祐)의 예(例)에 의거하여 영의정에 추증하게 하고 나서 이어 조보(朝報)에는 내지 말게 하였으니, 이는 더 크게 떠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날 임금이 서종옥을 면대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또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조금 전에는 마음이 편치 못하여 즉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엊그제 능상(陵上)에서 함원(咸原)160) 을 대하였을 적에도 슬퍼서 말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나도 또한 그러는 것이 지나친 것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대개 임금이 자인(慈仁)은 여유가 있으나 강단(剛斷)은 아주 부족했기 때문에 말이 선고(先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게 되어도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대신(大臣)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면려할 때에도 눈물을 흘렸다. 이날의 전교(傳敎)에 처음에는 ‘외친(外親)’이라고 썼었는데, 유신(儒臣)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마땅히 ‘사친부(私親父)’라고 일컬을 것이요, ‘외친(外親)’이라고 일컫는 것을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사친(私親) 고비(考妣)’라 고쳐 쓰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전교가 내리자 연신(筵臣)들이 아무도 감히 복주(覆奏)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약로가 능히 말하였으니, 직책을 잘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사-관리(管理)
- [註 158]
○上嗣服之初, 李光佐欲自掩追尊張氏之罪, 又要阿上之旨, 請追尊上私親, 上不許。 私親之父母, 亦不贈官。 至是, 上覽海嵩尉 尹新之文集, 始知昌嬪、仁嬪之父皆贈議政。 遂召吏曹參議徐宗玉, 敎曰: "予以 先王側室之子, 叨此不敢當之位, 而外家寒微, 親屬有服役於太僕, 而終其身者。 予之待外家, 可謂太薄, 蓋欲體私親謙恭之意也。 然私親父贈職, 旣有先朝舊例, 宜遵而行之。" 命依仁嬪父金漢祐例, 贈領議政, 仍令勿出朝報, 蓋不欲其張大也。 是日, 上對宗玉, 嗚咽流涕, 良久不能言。 言訖, 又流涕曰: "俄者方寸不佳, 不能卽言。 日昨陵上對咸原, 亦悲不成聲。 予亦自知其過, 而不能禁矣。" 蓋上慈仁有餘, 而剛大不足, 故語及先故必流涕, 語及時事必流涕, 甚至於勉出大臣亦流涕焉。 是日傳敎, 初書以外親, 儒臣金若魯奏曰: "當稱私親父, 不當稱外親。" 上遂命改書以私親考妣。
【史臣曰: 傳敎之下, 筵臣莫敢覆奏, 而若魯能言之, 可謂能擧職矣。】
-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42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