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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37권, 영조 10년 2월 5일 신해 3번째기사 1734년 청 옹정(雍正) 12년

사치하는 풍속을 금하도록 문자를 만들어 반포하게 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때 임금이 사치스러운 풍속을 개혁시키려고 힘썼기 때문에 신료(臣僚)들을 접견할 적에 때묻어 더러워진 의대(衣襨)와 해진 흑화(黑靴)를 신은 경우가 많았으며, 여러 신하들이 곡배(曲拜)126) 하는 곳의 돗자리가 떨어졌어도 바꾸지 않았었다. 이때문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봉영(逢迎)에 약삭빠른 사람은 속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목면(木綿)으로 된 단령(團領)을 입었으므로, 이서(吏胥)들과 구별이 없었다. 시독관(侍讀官) 윤득화(尹得和)가 글의 뜻을 인하여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속으로는 사치하면서 겉으로는 검소를 표방하는 까닭에 장복(章服)의 구별이 없어져 귀천(貴賤)을 표시하는 의의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임금이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에게 이르기를,

"상방(尙方)의 직조기(織造機)를 지난번 이미 철거하여 버렸다. 그러나 면복(冕服)을 짜는 기계는 따로 설치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대답하기를,

"과연 난처한 단서가 있기 때문에 창고 속에 봉치(封置)하였습니다. 봉해 놓고 열지 않는다면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당 현종(唐玄宗)이 처음에는 직금방(織錦坊)을 폐지하였으나 끝내 사치 때문에 나라를 잃게 되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이 소중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사치를 금하는 조항을 비국(備局)에서 경조(京兆)에 분부(分付)하여 언문(諺文)으로 번역하게 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에 효유(曉喩)하게 하라."

하고, 곧이어 또 하교하기를,

"다만 금하는 조항만을 반포하면 겉치레에 가깝게 되니, 비국으로 하여금 특별히 문자(文字)를 만들어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의생활(衣生活) / 역사-고사(故事)

  • [註 126]
    곡배(曲拜) : 임금을 뵐 때에 하는 절. 임금이 남쪽을 향하여 앉으므로 절하는 사람은 마주 대하여 하지 않고 동쪽이나 서쪽을 향하여 절함.

○行晝講。 時, 上務革侈風, 接見臣僚, 多御垢汚衣襨、弊裂黑靴, 諸臣曲拜之處, 席弊不改。 由是, 諸臣之巧於逢迎者, 裏着綺縠, 而外服木綿團領, 與吏胥無別。 侍讀官尹得和因文義言: "諸臣內奢外儉, 章服無章, 有失表貴賤之義。" 上不以爲然。 上謂靈城君 朴文秀曰: "尙方織造機, 頃已撤棄矣。 冕服織機, 則別置之乎?" 文秀對曰: "果有難處之端, 故封置庫中。 若封而不開, 則何傷之有?" 上曰: " 玄宗初罷織錦坊, 而終以奢侈喪邦。 凡事貴有始有終也。 《大典》禁奢侈條, 自備局分付京兆, 翻以諺譯, 曉喩坊曲。" 尋又下敎曰: "只頒禁條, 近於文具, 其令備局, 別爲文字, 頒示中外。"


  • 【태백산사고본】 28책 37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의생활(衣生活)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