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들과 양역 변통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양역(良役)에 대한 일은 영성(靈城)이 들어왔다고 들었기에 소상(昭祥)히 해설(解說)하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미 상의하였는가?"
하니, 좌의정(左議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무릇 일을 행할 때에는 말하는 때와 같지 않습니다. 밖의 의논은 호포(戶布)·결포(結布)는 끝내 시행할 수 없다고 하고, 구전(口錢)에 이르러서는 혹 행할 수 있다고 말하여 의논이 여러 갈래이니, 오늘날의 기강(紀綱)으로는 아마도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1필(疋)을 줄이는 것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지금의 용도(用途)는 국초(國初)에 비교해 갑절이나 증가되었습니다. 만약 용만(龍灣)과 남한(南漢)633) 에 있을 때의 규모를 쓸 수 있다면 혹 지탱해 나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1필로는 끝내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김상성(金尙星)의 상소 가운데 진달한 바는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곧 사람마다 항상하는 말입니다. 양역(良役) 2필에서 1필을 감해주고 결역(結役)·호역(戶役)의 잡비(雜費)로 1결(結)에 3냥, 1호(戶)에 잡비 1냥을 대신 받아 숫자를 채우자는 것에 이르러서도 또한 장애가 되는 단서가 있습니다. 부평(富平)의 양역은 단지 9백여 명이라고 하니, 혹 이에 의해 변통할 수 있겠지만 다른 고을은 졸지에 행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김상성(金尙星)으로 하여금 한 고을에서 먼저 시행해 보도록 하소서."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생민(生民)의 질고(疾苦)로 양역(良役)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능히 변통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좋은 대책이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祖) 때도 또한 이에 대한 의논이 있어서 혹자는 ‘호포(戶布)’로, 혹자는 ‘구전(口錢)’으로, 혹자는 ‘결포(結布)’로 하자 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고 이해(利害)를 가지고 서로 견제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구전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나 이 또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김상성의 상소 가운데 ‘1결(結)에 3민(緡)을 수봉(收捧)하고 1호(戶)에 1민을 수봉하여 1필(疋)의 수에 충당한다.’고 한 것도 또한 편중된 데 관계됩니다. 포(布)를 바치는 군사(軍士)에게 감해 준다면 비록 좋기는 하겠지만, 애초부터 포를 바치지 않던 백성이야 어찌 억울함을 호소(呼訴)하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균일(均一)하게 하는 정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역의 변통에 대한 말은 문득 상하의 한담(閑談)이 되었고, 선조(先祖) 때 변통하고자 하였으나 결과를 보지 못했다. 양역을 끝내 변통하지 못한다면 조선(朝鮮)은 반드시 망할 것이요, 호포·결포·구전이 모두 폐단이 있다고 하지만, 만약 현명하고 명철한 임금으로 하여금 맡게 한다면 어찌 변통할 방도가 없겠는가? 금일 차대(次對)는 이 일을 묻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군역 당상(軍役堂上)에 대하여 수규(首揆)634) 가 이미 건백(建白)하였으나 신은 절목(節目)을 강구해 정한 뒤에 당상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변통의 방도가 있다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당상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명목(名目)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일찍이 선조 때부터 인순(因循)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영상(領相)이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慨然)해 했습니다. 구관(句管)할 사람을 차출하여 다시 강확(講確)할 계책을 세워야 하는데, 당상 윤순(尹淳)은 자리에 없고 오늘 영상이 또 들어오지 않아 품정(稟定)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祖) 때의 북한산성(北漢山城)에 관한 일로 말하자면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으나, 고(故) 상신(相臣) 이유(李濡)가 홀로 담당했었다. 무릇 일이란 담당하는 사람이 있고 난 뒤에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호포·결포·구전 등에 관한 의논은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 때부터 전해져 왔으나 아직도 가능한지 시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액(軍額)은 옛날에 비해 점차 넓어졌고 양병(養兵)이 이미 많아졌으나 끝내 좋은 대책이 없습니다. 먼저 백성의 산업을 제정한 뒤에야 시행할 만한 방도가 있을 것이니, 백성의 산업을 제정하지 아니하면 비록 1필에 그치더라도 가난한 백성이 어떻게 마련해 바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힘써야 할 것으로 권농(勸農)만한 것이 없으니, 조목(條目)을 강정(講定)하여 전지(田地)가 많은 백성으로 하여금 전지가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되, 관(官)에서 종자(種子)를 지급하고 또한 삼과 목면을 경작하도록 권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심고 키워 모두 능히 포를 짠다면, 포를 바치는 길이 또한 마땅히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외에는 달리 다른 방도(方道)가 없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산업을 제정하고 권농하는 것은 곧 그 근본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은 또한 민력(民力)을 여유 있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옛부터 말이 많아서 대동(大同)을 처음 정할 때도 의논이 매우 많았지만, 단연코 시행했기 때문에 지금 백성들이 그 편리함을 칭송합니다. 양전(量田) 때도 역시 여러 의논이 많았지만, 이미 양전한 뒤에는 역시 폐단이 없었습니다. 만약 의논이 한 가지로 귀착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성취할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오늘날의 기강(紀綱)과 같다면 그때 북한산(北漢山)에 결코 성(城)을 쌓지 못했을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마음속으로 요량(料量)한 것이 있습니다. 결포(結布)는 지금 결역(結役)이 매우 무거우니 겹쳐서 낼 수가 없습니다. 대동에 대해 2,3두(斗)를 줄이고 그 대신 결전(結錢)으로 바치게 하되, 팔도(八道)에서 모두 6두의 대동으로 한다면, 선혜청(宣惠廳)에서는 옛날 그대로 줄어드는 것이 없게 될 것이며, 영남(嶺南)에서는 결(結)마다 3두의 쌀이 남고 호남(湖南)에서는 결마다 2두의 쌀이 남게 됩니다. 외방 군관(外方軍官)의 제번전(除番錢)을 아울러 모두 조사해 내어 고을의 대소(大小)에 따라 얼마의 액수를 정해 주고, 그 나머지 번전(番錢)을 1필(疋) 대신으로 옮겨 충당시킨다면 거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윤유가 말하기를,
"병조(兵曹)와 선혜청(宣惠廳)은 비록 1필(匹)을 줄여도 혹 지탱할 수 있겠지만 삼군문(三軍門)의 경비(經費)에 이르러서는 만약 1필을 줄인다면 대신 채우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구전(口錢)에 이르러서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구전은 어떤 폐단이 있는가?"
하니, 윤유가 말하기를,
"빈잔(貧殘)한 사족(士族)은 식구가 많은데 일일이 돈을 징수한다면 어찌 견디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양역(良役)의 폐단을 상하(上下)가 근심하고 탄식했음을 신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신묘년635) 경에 양역에 대해 상소하여 논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으나, 모두 난편(難便)하다 하여 가능한지를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또한 구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고 상신 조상우(趙相愚)가 그것을 시행할 수 없음을 상소하여 진달하자 마침내 정지되었습니다. 비유하건대, 병을 치료하는 데 약을 증상에 맞춰 쓰지 않으면 한갓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죽음을 재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백성들의 폐단은 전날에 비해 더함이 없으나, 기강과 세도(世道)는 선조 때에 비해 몇 등급이 떨어졌으니, 흑립(黑笠)을 충정(充丁)하는 것은 진실로 더욱 어렵습니다. 구전 역시 시행할 수 없으니, 가난한 백성이 만약 식구가 많은데도 돈을 징수하는 것이 몇 냥에 이르게 된다면 비록 1년 내내 경영(經營)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바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도피(逃避)한다면 또 어찌 수괄(搜括)하는 폐단이 없겠습니까? 지금의 인심과 세도(世道)로는 하나도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박문수(朴文秀)의 ‘각진(各鎭)을 혁파하자.’는 의논은 이해(利害)를 또한 확실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윤유가 말하기를,
"만호(萬戶) 80과(窠)와 첨사(僉使) 70과를 만약 혁파하면 구근(久勤)한 사람들을 어떻게 구처(區處)할 것입니까? 또 그 둔전(屯田)은 1필(疋)의 대신으로 충당하기에 부족합니다."
"만약 40여 진보(鎭堡)를 혁파할 경우 바치는 포(布)의 수를 계산한다면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정(閑丁)을 얻어 도고(逃故)에 채운다면 그 효과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삼군문(三軍門)의 군액(軍額)을 헤아려 줄이면 역시 쉽게 충정(充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문수의 진보를 혁파하자는 말은 대개 연해(沿海)의 백성을 위해 침징(侵徵)의 폐단을 우선 늦추어 주자는 것이다. 40 진보(鎭保)를 혁파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관안(官案)을 열람해 보고 용관(冗官)을 다 줄인다면 또한 불가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경사(京司)에는 용관이 없습니다."
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직책에 걸맞지 않는 것은 모두 용관입니다. 묘당(廟堂)으로 말하자면 신처럼 능력이 없어 능히 보상(輔相)하지 못하는 자 역시 용관입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부터 이유(李濡)·이인엽(李寅燁) 등과 같은 사람들이 좋은 대책을 강구(講究)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대저 2필의 역(役)은 본래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 아니나, 신이 일찍이 외방(外方)의 2필을 바치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의지할 곳 없는 잔약(殘弱)한 백성들이었고, 감영(監營)·병영(兵營)과 각 관청의 1필의 역에 응하는 자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부실(富實)한 양호(良戶)였습니다. 반드시 먼저 헐역(歇役)으로 투입(投入)하는 길을 막은 연후에 균등하게 2필을 징수한다면,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역(役)이 아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상성(金尙星)의 상소를 경들이 상세히 보지 않은 듯하다. 1결에 3민이 과중하다는 것은 옳다. 내가 한 나라의 부모(父母)가 되어 백성을 구제할 수 없다면 사책(史冊)의 비난과 의론은 우선 논할 것이 없다 해도 어찌 잘 다스리는 일개 수령(守令)에 대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느냐? 경 등은 모름지기 영상(領相)에게 가서 물어보고, 오늘 강구하고 내일 강구하여 그 이(利)와 해(害)를 극진히 따지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신은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의논이 하나로 귀착되기란 매우 어려우니 갑자기 거행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1필의 의논을 민간(民間)에 미리 퍼뜨릴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부터 일을 행할 때 어찌 갑론 을박(甲論乙駁)이 없겠느냐?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재단(裁斷)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절목(節目)을 문의(問議)한 뒤 다시 여러 재신(宰臣)들과 상확(商確)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각각 염근(廉謹)한 사람 2인을 추천하라 하셨는데, 염근의 명목이 뒤에 마땅히 청백리(淸白吏)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수령(守令)을 거쳐 법을 지키고 자신을 단속한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볍게 염근의 명목(名目)을 더할 수는 없으니 제목(題目)을 개정(改定)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살아 있는 자는 염근이라 하고 죽은 자는 청백(淸白)이라 합니다. 염근이라 칭하는 것을 가볍게 의논함은 부당하니 고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염리(廉吏)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현명(趙顯命)이 해도(海島)의 고을을 설치하는 것의 편부(便否)에 대해 논열(論列)한 바가 있는데, 해도에는 절수(折受)한 둔장(屯場)이 많으니, 모두 혁파를 시행한 뒤에야 고을을 설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령 또한 적절한 사람을 얻기 어려우니, 만약 옥당(玉堂)의 문신(文臣)을 뽑아 보낸다면 진안(鎭安)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구히 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만약 피잔(疲殘)하고 세력없는 자를 보낸다면 그 해(害)가 도리어 심할 것이며, 또 절수(折受)한 둔장도 역시 혁파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의논은 ‘특별히 첨사(僉使)를 설치하되, 일찍이 곤수를 거친 사람을 차송(差送)해서 그대로 감목(監牧)을 겸임시키고, 궁장(宮莊)과 목장(牧場)은 모두 전례에 의거해 세금을 거두어 본진(本鎭)을 이루어 읍치(邑治)와 다를 것이 없고 족히 여러 섬을 진무(鎭撫)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워하는 바는 수령에 적절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첨사를 설치하였다가 혹시라도 나주 목사(羅州牧使)와 서로 버티는 일이 있다면 도민(島民)이 또한 그 해를 받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承旨)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첨사는 비록 진졸(鎭卒)을 거느리지만 판적(版籍)이 지방관(地方官)에 소속되어 있으니 일개 첨사가 결코 겸하여 총괄할 세력이 없습니다. 만약 바다 방비를 우려한다면, 장관(長官)을 설치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후의 나주 목사 가운데 여러 섬을 모두 다 본 사람이 없으나 유독 전(前) 현감(縣監) 이형곤(李衡坤)만이 7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두루 여러 섬의 형편을 살펴보고 일찍이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매우 편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형곤으로 하여금 형편을 구획(區劃)하여 책자(冊子)로 써서 올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평안 도사(平安都事) 정희보(鄭熙普)의 장계(狀啓)에 말하기를, ‘이산(理山)의 죄인 김성지(金星智)·김처현(金處玄) 등이 김민걸(金民乞) 등 5인을 장살(戕殺)하고 살인한 죄를 모피(謀避)하여 몰래 피국(彼國)의 경내로 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잡혔습니다. 범월(犯越)한 죄는 살인죄보다 더 무거우니, 청컨대, 율(律)에 의거해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명균이 또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내주(鄭來周)의 장계에 말하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와서 아명 도서(兒名圖書)를 청하기에, 여러 번 물리치고 여러 번 다투었습니다. 지금 훈도(訓導)와 역관(譯官)이 이해(利害)로써 책망한 것으로 인해 도서(圖書)를 이제 막 혁파해 버렸는데, 아명 도서가 한번 온 뒤로 그 폐단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힘을 다 바친 역관(譯官)에게 상전(賞典)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례(前例)를 상고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서명균이 또 아뢰기를,
"요사이 추위가 지독해서 혹 얼어 죽는 사람이 있으니, 청컨대, 기곡제(祈穀祭)의 친행(親行)을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춥고 따뜻함이 고르지 아니하여 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얼어죽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탐문(探問)하게 하라. 만약 시골 백성이 길에서 죽었다면 즉시 거두어 묻어 주고 도민(都民)의 경우는 그 가속(家屬)들을 고휼(顧恤)하게 하라."
하고, 또 박문수의 말로 인해 무신년636) 에 사절(死節)한 사람인 김천장(金千章)·이술원(李述源)·장담(張譚) 등의 가족에게 본도(本道)에서 해마다 사시(四時)에 고휼(顧恤)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00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구휼(救恤) / 윤리(倫理) / 출판-서책(書冊) / 외교-왜(倭) / 사법-행형(行刑) / 교통-마정(馬政) / 신분(身分) / 과학-천기(天氣) / 재정-역(役)
- [註 633]용만(龍灣)과 남한(南漢) : 의주와 남한 산성. 용만은 임진 왜란 때 선조(宣祖)가 의주에 파천(播遷)함을 말한 것이고, 남한은 병자 호란 때에 인조(仁祖)가 남한 산성에서 피위(被圍)당한 것을 말한 것임.
- [註 634]
○上引見大臣、備堂。 上謂大臣曰: "良役事, 聞靈城入來, 使之消詳, 果已相議耶?" 左議政徐命均曰: "凡事做時, 不如說時。 外議則謂戶布結布終不可行, 至於口錢, 則或言可行, 而議論多貳。 以今日紀綱, 恐無可成之事矣。 一疋之減雖好, 卽今用道, 比國初倍加。 若能用龍灣、南漢時規模, 則或可支過, 不然則一疋終不可爲也。 金尙星疏中所陳, 不過量入而出, 此乃人人之恒談。 至於良役二疋減給一疋, 以結戶役雜費一結三兩, 一戶一兩代捧充數者, 亦有窒礙之端。 富平良軍, 只是九百餘名云, 或可依此變通, 而他邑則不可猝然行之, 請使尙星, 先試一邑焉。" 右議政金興慶曰: "生民疾苦, 莫過於良役, 而自古不能變通者, 蓋無善策而然。 曾在先朝, 亦有此議, 或曰戶布, 或曰口錢, 或曰結布, 議論不一, 利害相牽。 臣之所見, 無過於口錢, 而此亦難行矣。 金尙星疏中, 一結捧三緡, 一戶捧一緡, 以充一疋之數云者, 亦涉偏重。 捧布之軍減給雖善, 而初不納布之民, 豈不呼冤乎? 此亦非均一之政矣。" 上曰: "良役變通之說, 便作上下閑談, 先朝欲爲變通而未果, 良役終不變通, 則朝鮮必亡。 戶布、結布、口錢皆有弊云, 而若使賢君哲辟當之, 豈無變通之道乎? 今日次對, 欲問此事矣。" 興慶曰: "軍役堂上, 首揆已建白, 而臣以爲, 節目講定然後, 設置堂上宜矣。" 上曰: "若有變通之道, 入侍諸臣莫非堂上, 何必別立名目?" 命均曰: "曾自先朝, 因循至今, 領相心常慨然。 差出句管, 更爲講確計, 而堂上尹淳不在, 今日領相又未入來, 不得稟定矣。" 上曰: "以先朝北漢事言之, 議論不一, 而故相李濡獨擔當焉。 凡事有擔當者, 然後可成矣。" 兵曹判書尹游曰: "戶結布、口錢等議論, 自故相臣柳成龍時流來, 尙不能試可。 卽今軍額, 比古漸廣, 養兵旣多, 終無善策。 先制民産, 然後有可爲之道, 民産不制, 則雖止一疋, 貧民何以辦納乎? 先務莫如勸農, 講定條目, 使多田之民, 分給無田者, 官給種子, 亦勸耕麻木綿, 處處種植, 皆能織布, 則納布之路, 亦當有裕。 二者之外, 別無他道矣。" 戶曹判書宋寅明曰: "制産勸農, 乃其根本, 而其本又在於裕民力。 我國之人, 自古多言, 大同初定時, 議論甚多, 而斷然行之, 故至今民稱其便。 量田之時, 亦多岐議, 而旣量之後, 亦無弊端。 若俟議論之歸一, 終無可成之望矣。" 上曰: "若如今日紀綱, 則其時北漢, 決不可築城矣。" 寅明曰: "臣有料量于心者, 結布則今之結役甚重, 不可疊出, 就大同減二三斗, 而其代捧以結錢, 八道皆作六斗。 大同則宣惠廳可以依舊無縮, 而嶺南每結剩三斗米, 湖南每結剩二斗米。 外方軍官除番錢, 倂皆査出, 隨其邑大小, 定給幾額, 而其餘番錢, 移充於一疋之代, 則庶可爲也。" 游曰: "兵曹、惠廳則雖減一疋, 或可支當, 至於三軍門經費, 若減一疋, 則充代甚難矣。 至於口錢, 則有弊不可行矣。" 上曰: "口錢何弊?" 游曰: "貧殘士族, 食口則多, 而一一徵錢,豈不難堪乎?" 吏曹判書金在魯曰: "先朝時良役之弊, 上下憂歎, 臣亦稔聞矣。 辛卯年間, 疏論良役者甚多, 而皆以難便, 不得試可。 當時亦有口錢之議, 故相臣趙相愚疏陳其不可行, 遂寢之。 譬如治病焉, 藥不對症, 則不徒無益, 反促其死。 今民之弊, 視前日無加, 而紀綱、世道比先朝落下幾級, 黑笠充丁, 固重難矣。 口錢亦不可行, 貧民若口多, 而徵錢至於數兩, 則雖終歲經營, 必不可捧。 因以逃避, 則又豈無搜括之患耶? 今之人心世道, 無一可爲。 朴文秀罷各鎭之議, 利害亦難的知矣。" 游曰: "萬戶八十窠、僉使七十窠若革罷, 則久勤何以區處? 且其屯田, 不足當一疋之代矣。" 靈城君 朴文秀曰: "若罷四十餘鎭堡, 計其納布之數, 固不少。 且得閑丁, 充其逃故, 其效豈不大歟?" 命均曰: "量減三軍門軍額, 則亦易充定矣。" 上曰: "朴文秀罷鎭堡之說, 蓋爲沿海民, 姑綬侵徵之弊也。 四十鎭堡, 罷之何難? 若閱官案, 盡減其冗官, 亦無不可也。" 在魯曰: "京司無冗官矣。" 命均曰: "不稱其職, 皆是冗官。 以廟堂言之, 如臣無似, 不能輔相, 亦是冗官也。" 刑曹判書李廷濟曰: "自先朝, 如李濡、李寅燁等, 講究善策, 終不得之, 因循至今。 大抵二疋之役, 本非太重, 而臣曾見外方納二疋者, 皆是無依殘民, 至於監、兵營各官, 應一疋之役者, 皆是富實良戶。 必先防投入歇役之路, 然後均徵二疋, 則此非難堪之役矣。" 上曰: "金尙星之疏, 卿等似未細看, 一結三緡過中云是矣。 予爲一國之父母, 不能救民, 則史冊之譏議姑勿論, 豈不有愧於善治一守令乎? 卿等須往問領相, 今日講究, 明日講究, 盡其利害可矣。" 命均曰: "臣謹奉敎矣。 諸議之歸一甚難, 不可猝然擧行。 一疋之議, 不可預播於民間矣。" 上曰: "自古做事, 豈無甲乙之論? 唯在在上者裁斷耳。 問議節目後, 更與諸宰商確可也。" 命均曰: "頃命大臣, 各薦廉謹二人, 而廉謹之目, 後當爲淸白吏。 曾經守令, 守法約己者, 不無其人, 而不可輕加廉謹之目, 宜改定題目矣。" 在魯曰: "生者謂之廉謹, 死者謂之淸白。 廉謹之稱, 不當輕議改之宜矣。" 上曰: "然則改以廉吏可也。" 命均曰: "全羅監司趙顯命以海島設邑便否, 有所論列, 而海島多是折受屯場, 盡行革罷, 然後可以設邑。 守令亦難其人, 若以玉堂文臣, 經閫武臣擇送, 則可爲鎭安之道, 而難於永久。 若遣疲殘無勢者, 則其害反甚矣。 且折受屯場, 亦難革罷, 諸議以爲: ‘特設僉使, 以曾經閫帥差送, 仍兼監牧, 而宮庄牧場, 皆使依前收稅, 令本鎭主管, 諸島田民, 竝使統領, 則可作大鎭, 無異邑治, 足以鎭撫諸島矣。’" 上曰: "予之所難者, 以守令之難其人也。 若設僉使, 而或與羅牧不相下, 則島民亦受其害矣。" 承旨柳儼曰: "僉使雖領鎭卒, 版籍屬於地方官, 一僉使決無兼摠之勢。 若以海防爲憂, 則莫如設置長官矣。 前後羅牧, 無盡見諸島者, 獨前縣監李衡坤七年居官, 徧覽諸島形便, 嘗言設邑甚便云矣。" 上曰: "使李衡坤區劃形便, 書進冊子可也。" 命均曰: "平安都事鄭熙普狀啓言: ‘理山罪人金星智、金處玄等, 戕殺金民乞等五人, 謀避殺人之罪, 潛越彼境, 被捉於歸路。 犯越之罪, 尤重於殺人, 請令依律梟示。" 從之。 命均又奏: "東萊府使鄭來周啓言: ‘對馬島主來請兒名圖書, 屢却屢爭矣。 今因訓譯, 責以利害, 纔已革去圖書, 而兒名圖書一來之後, 其弊難言。 効力之譯官, 宜施賞典矣。’" 命考例施行。 命均又奏: "近日寒劇, 人或有凍死者, 請停祈穀祭親行。" 上不許。 仍敎曰: "寒暖不適, 使窮民, 至於凍死, 令京兆訪問。 若鄕民死於道路, 卽令收瘞, 都民則令顧恤其家屬。" 又因朴文秀言, 命戊申死節人金千章、李述源、張譚等家孥, 自本道每歲四時顧恤。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00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구휼(救恤) / 윤리(倫理) / 출판-서책(書冊) / 외교-왜(倭) / 사법-행형(行刑) / 교통-마정(馬政) / 신분(身分) / 과학-천기(天氣) / 재정-역(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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