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성이 치도에 대해 상소하다
부평 부사(富平府使)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규모(規模)로 오늘날의 경상(景像)을 보면 천고(千古)에 없던 역란(逆亂)이 이미 조용해진 듯하고, 백대(百代)토록 깨지지 않던 못된 붕당(朋黨)이 이미 제거된 듯합니다. 조정의 위에는 마치 인협(寅協)한 듯하고, 강역(彊城)의 안은 마치 편안한 듯하며, 낭묘(廊廟)는 여유가 있어 민우(民憂)를 강구할 것이 없는 듯하고, 대각(臺閣)은 조용하여 관사(官師)의 논할 것이 없는 듯합니다. 이에 뜻이 차고 마음이 만족해져 지존(至尊)은 교만함을 기대하지 않아도 절로 교만해지고, 재상은 안일함을 기대하지 않아도 절로 안일해집니다. 겉으로 편안하게 다스려지는 형상은 다만 허위를 꾸밀 뿐이고, 세도(世道)가 날로 어그러지고 인심이 날로 험악해져 부자(父子) 사이의 변고가 어리석은 백성에게서 간혹 나타나고, 군신(君臣) 사이의 분의(分義)가 거족(巨族)에게서 먼저 허물어졌습니다. 왕부(王府)에서의 신국(訊鞫)하는 자리가 없는 달이 없고 여러 도에서 체포(逮捕)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치평(治平)의 운회(運會)이며 화길(和吉)의 기상이겠습니까? 무고(巫蠱)와 저주(詛呪)의 변고가 거의 여항(閭巷)에까지 두루 퍼져 있으니, 진실로 종이 주인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모두 얼첩(孽妾)이 적실(嫡室)을 모함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세도(世道)를 장차 일분이나마 믿을 수 있겠습니까?
3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팔도(八道)가 같이 기근에 허덕이니, 기한(飢寒)에 죽지 않으면 질역(疾疫)에 죽은 자들이 전후에 거의 10만을 헤아립니다. 세금을 덜어주고 호포(戶布)를 감해 주는 은혜를 해마다 살펴 행하여 문득 상례(常例)와 같이 하고, 진휼을 의논하여 급재(給災)하는 정사가 매년 강구되어 거의 고전(古典)과 같이 하는데, 위에서 덜어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아래에서 이익 보는 것이 없습니다. 이는 그 까닭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외(中外)에서 겸병(兼幷)하여 소민(小民)의 근본이 뒤집혀졌으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매우 사치하여 국가의 재정(財政)이 한없이 새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지금 길바닥에 엎어져 죽은 사람들이 조종(祖宗)이 휴양(休養)한 적자(赤字)가 아님이 없으나, 그 양전(良田) 미답(美畓)은 모두 호부가(豪富家)에 들어가 있고, 밭 가운데에 흘린 땀방울로 된 세금은 다만 쓸데없는 관리의 녹봉(祿俸)에 허비되며, 손가락이 찢어지듯 짠 베틀의 비단은 한갓 활리(猾吏)의 돈주머니를 기름지게 할 뿐입니다. 또 허다한 갑제(甲第)에는 자식과 아낙네를 판 돈이 얼마나 쌓여 있는가 알지 못할 지경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높은 관직(官職)과 후한 녹(祿)으로 허다한 신료(臣僚)들을 양득(養得)하면서,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수척(瘦瘠)함을 앉아서 보듯 하여 불행하게도 백성들이 다 죽어 가고 국세(國勢)도 따라 무너지게 된다면, 오늘날의 사대부들이 또한 어찌 홀로 스스로 교만하고 안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전하께서 내사(內司)의 사장(私藏)을 능히 혁파하지 못하시면서 어떻게 군하(群下)의 뇌물꾸러미를 막을 수 있겠으며, 전하께서 궁방(宮房)의 점수(占受)를 능히 멈추게 하지 못하시면서 어떻게 군하의 전택(田宅)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은 곤궁하여 원망과 비방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강장(疆場)이 조용하지 않게 된다면, 간도(奸徒)와 얼수(孽竪)가 화(禍)를 즐겨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침고(沈痼)된 문무(文武)가 난(亂)을 생각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니, 이같은 인심(人心)을 장차 일분이나마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지난날에 어지러움을 감정(勘定)하신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지난해에 참척을 당하고도 좌절하지 않으면서 다만 ‘파당(破黨)’ 두 글자로서 제왕(帝王)의 대사업(大事業)으로 여기시어 애석하게도 이치를 살핌이 익숙지 못하고 의(義)를 봄이 정밀하지 못하여 경권(經權)을 섞어 쓰고 의리(義利)가 같이 행해지는 데 이르렀으니, 전하께서는 황극 제일의(皇極第一義)를 한(漢)나라 당(唐)나라가 쓴 패도(霸道)의 나머지 술수로 오인함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편벽됨이 없고 당파가 없으면 왕도가 탕탕(蕩蕩)하며, 당파가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한 것이니, 이른바 왕도라는 것은 호오(好惡)가 없어 저절로 탕탕할 수 있는 것이고, 편당이 없어 저절로 평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욕(人慾)이 사라져 없어지고 천리(天理)가 유행(流行)되어 황극에 모이고 황극으로 돌아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은 단지 이탕평의 효험일 것인데, 어찌 먼저 제목(題目)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이치에 붙이지 아니하여 재량(裁量)이 너무 지나치고 배비(排比)가 너무 심해서 노소(老少)를 쌍쌍(雙雙)으로 대거(對擧)하되 양단(兩端)으로 나누듯 하였습니다. 저 가운데서 한 개의 옳은 것을 구하면 이 가운데서도 역시 한 개의 옳은 것을 구하고, 저 가운데서 한 개의 그릇된 것을 성토하면 이 가운데서도 또한 한 개의 그릇된 것을 성토하여 무릇 출척(黜陟)하고 용사(用捨)하는 사이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번 정과(政窠)가 나오면 정관(政官)의 심력(心力)이 거의 지치게 되고, 한번 묘천(廟薦)이 나오면 대신(大臣)의 조정(調停)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 그 끼쳐질 폐단은 경중(輕重)이 서로 뒤섞이고 장단점을 구분하기 어려워져 물성(物性)을 굽히고 물정(物情)을 손상시킴이 어찌 큰 신발과 작은 신발의 값이 같은 데에 그치겠습니까? 홍범(洪範)625) 에 이르기를, ‘덕(德)을 좋아함이 없으면 너에게 비록 작록(爵祿)을 주더라도 그것은 너에게 허물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녹을 어진이에게는 주고 악(惡)한 자에게는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지금은 사사로운 뜻으로써 혼란시키고 사사로운 지혜로써 천착(穿鑿)하며, 지벌(地閥)로써 국한하고 형세(形勢)로써 선택하며, 색목(色目)으로써 견별(甄別)하니, 이는 한유(韓愈)가 이른바 ‘어진 자에게 천금(千金)을 주고 어질지 못한 자에게도 역시 천금을 주었는데, 어진 자는 날로 물러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날로 나아간다.’는 것에 또한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이제 지금 전하께서는 사람을 쓰는 데는 너무 급히 하시고 사람을 버리는 것에는 너무 쉽게 하시어 아침에 한 사람을 임용하였다가 저녁에 한 사람을 바꾸니, 빨리 나아간 자는 필시 재빨리 물러나며 지우(知遇)를 입었던 자도 필경 의심을 받습니다. 앞의 사람이 이미 소원(疏遠)해지자 뒷사람이 올라가고 옛사람이 이미 제거되자 새로운 사람이 그 사이에 낍니다. 전하께서 평일에 믿고 의지하던 자들을 차례로 배척하여 버리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모려(謀慮)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펼치겠으며, 비록 재지(才智)가 있다해도 어떻게 시행하겠습니까? 조금 지조를 지키는 자가 있더라도 간사한 방법으로 벼슬길에 오른다면 그 지조가 아니며, 뒷 구멍을 뚫고 상종하고자 한다면 그 지킨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염의(廉義)를 무릅쓰고 청촉하는 무리들은 문득 좋은 벼슬을 얻고, 물러나 조용히 자중하는 선비는 실제 쓰임에 충원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황극(皇極)을 크게 세우시고 오직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뜻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명기(名器)와 작상(爵賞)은 인주라도 오히려 사사로움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인데, 주고 빼앗음을 또 어찌 군하(群下)가 제멋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현우(賢愚)를 묻지 않고 반드시 사람에 따라 기쁘게 하며, 군하(群下)는 한갓 호오(好惡)를 좇아 반드시 당사(黨私)를 부식(扶植)하려고 하여 조종(祖宗)께서 아끼신 공기(公器) 보기를 부귀(富貴)한 자의 하룻밤 전사(傳舍)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조정의 극선(極選)이 날로 낮아지고 국가의 공기(公器)가 날로 천(賤)해지는 것이 어찌 그리 괴이하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세도(世道)를 만회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인심을 수습하고, 인심을 수습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당습(黨習)을 없애 버릴 방도를 살피시고, 당습을 없애 버리고자 하신다면 먼저 인재를 견별(甄別)할 방법에 공력을 기울이소서. 성취함이 빠르냐 늦으냐는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나, 오직 마땅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의심하지 말며, 막히지 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유구(悠久)하게 행하고 성실하게 해야 할 것인데, 근래 성의(聖意)가 있는 바를 보면 또한 이미 7,8분(分)은 늦추어져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모려(謀慮)하는 사람은 꽉 막힌 데 가깝고 설시(設施)하는 사람은 경장(更張)에 가까우며, 조수(操守)하는 사람은 교항(驕亢)에 가깝고 재지(才志) 있는 사람은 경박(輕薄)한 데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에 반드시 좌우의 폐단이 없는 자를 취하여 과급(窠級)에 채우십니다. 따라서 녹(祿)을 생각하고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분주하게 봉승(奉承)하느라 겨를이 없는 것을 보고는 끌어다 채우고 구차히 지낼 수 있다고는 하겠지만, 일찍이 뜻있는 사람은 스스로 소원해지고 재주를 가진 자가 스스로 저상(沮喪)되는 것은 깨닫지 못하십니까? 비록 언로(言路)로써 말하더라도 근래 사대부(士大夫)로서 기절(氣節)이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자는 당의(黨議)에 불과하니, 이것은 반드시 참으로 강직(强直)한 기풍이 있어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으로 촉로(觸怒)하여 감언(敢言)할 절개가 있어 임금의 잘못을 척언(斥言)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머뭇거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구차한 것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대개 그 일종의 풍습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여 화복(禍福)의 경계할 만한 것과, 이해(利害)의 두려워할 것임을 거의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일개 가슴속의 기(氣)일 뿐입니다. 지난번 이래 고요하게 잠든 저 세상 사람들이 부앙(俯仰)하며 돌아보는 태도로 가법을 삼을 뿐만 아니라 움추리고 아첨하는 습관으로 도리어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십수년 간에 이미 고금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조정(朝廷)에서 말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시정(時政)을 지적해 논평하면 재상(宰相)이 미워하고, 임금의 잘못을 척언(斥言)하면 지존(至尊)이 싫어하며, 당론이 같은 자들끼리는 해치고자 하지 않고 뜻이 다른 자를 논박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성총(聖聰)을 크게 펼쳐 대간(臺諫)을 인도하여 말하도록 하더라도 오직 함묵(含默)할까 염려되는데, 진언(進言)하여 죄를 얻었다는 것은 들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하여 견책을 당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 누가 능히 강개(慷慨)하여 거리낌없이 말하고 남의 득실(得失)을 논하여 남의 사기와 미움을 취하겠습니까? 예전에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물러날 때에는 사대부도 오히려 돌아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조신(朝臣)으로 권세를 팔고 농락하며 수재(守宰)로서 뇌물을 받는 자들도 또한 법관(法官)이 그 뒤를 의논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설령 큰 권간(權奸)과 큰 장오(贓汚)가 있더라도 또한 믿는 데가 있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근래에 말을 하지 않는 풍습이 문득 규모를 이루어 차라리 혹 민폐에 대해 범연(泛然)히 논할지언정 감히 조정(朝政)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진달하지 못했고, 혹 군덕(君德)에 대해 범연히 논할지언정 감히 시론(時論)에 조금이라도 간섭하지 못하였습니다. 묘당(廟堂)과 전조(銓曺)에 이르러서는 한 마디 말이라도 관계되면 또한 치고 흔들어 경알(傾軋)한다고 하여 크게는 원한을 갚는다는 죄목을 얻고 작게는 시끄러운 사단을 일으켰다는 의심을 초래(招來)합니다.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은 믿을 것이 없게 되고 국가의 원기(元氣)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무릇 완급(緩急)이 있으면 그 장차 어디에 책임을 지우겠습니까? 관자(管子)는 말하기를, ‘예의 염치(禮義廉恥)란 나라의 사유(四維)이다.’ 하였습니다. 중세(中歲)의 사대부는 긍지가 자못 높아 장쾌(駔儈)626) 와 상서(象胥)627) 를 문정(門庭)에 가까이 하지 않았고 관절(關節)과 간탁(干托)이 주군(州郡)에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경사(京司)에서는 월추(月騶)의 녹봉에 반드시 내외(內外)의 구별을 살폈고, 외방(外方)에서 보내는 세시(歲時)의 선물도 반드시 사수(辭受)할 즈음에 엄격하였습니다. 집이 넓고 사치스러우면 오직 세덕(世德)에 혹 누(累)가 될까 두려워하고 구마(裘馬)가 화려하면 오직 공의(公議)가 몰래 비난할까 걱정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맹자(孟子)가 이른바 ‘사양(辭讓)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요, 수오(羞惡)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다.’라고 한 것인데, 지금 조정의 예양(禮讓)하는 기풍은 일체 소멸되어 없어졌고, 진신(搢紳)들의 염치(廉恥)를 지키는 도리는 태반이나 쓴듯이 없어졌습니다. 진실로 집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서는 비록 염치를 손상시키고 의리에 해로움을 안다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비난과 비웃음을 사도 창피한 줄을 모릅니다. 비록 맑은 조정의 사대부들의 기풍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사유가 펼쳐지지 않아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된 데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윽이 살피건대 전하의 본래 기질이 없마나 밝고 순수합니까? 그러나 학문이 깊지 않고, 조존(操存)에 힘쓰지 않아 일을 만나 불쑥 나오는 것은 곧 해질녘에 돌아가 관렵(觀獵)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리(天理)는 자연히 소멸되어 날로 조금씩 줄어들고, 인욕(人慾)은 절로 자라 날마다 조금씩 불어납니다. 진실과 거짓이 서로 뒤섞이고 의(義)와 이(利)가 번갈아 공격하는 까닭에 높은 곳은 너무 높고 낮은 곳은 너무 낮아 잠시 성현이 되었다가 잠시 범인이 되기도 하고, 급속히 왕도(王道)가 되었다가 급속히 패도(霸道)가 되기도 합니다. 근래에는 또 거만스레 성현인 체 자부하며 방훈(放勳)628) 과 중화(重華)629) 같은 다스림을 이미 8, 9분(分)의 지위(地位)를 차지한 양 하십니다. 그러나 꼭 급암(汲黯)이 이른바 ‘폐하께서 속에는 욕심이 많은데 밖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푼다.’고 한 것과 같으니, 삼대(三代)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거니와 또한 어떻게 한(漢)·당(唐)의 중주(中主)에 발돋움해 미치겠습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전하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린 것이 곧 전하의 명예(明睿)요, 전하의 자질(資質)을 그르친 것이 곧 전하의 재지(才智)입니다. 왜냐하면 가령 전하의 명예가 만 가지 이치를 감촉(鑑燭)하는데 부족하고 재지는 백료(百僚)를 굴복(屈服)시키는 데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총명을 취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재지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총명함은 능히 호말(毫末)의 끝을 통촉(洞燭)할 수 있고, 재지는 발자국 사이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까닭에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세상에 가인(可人)이 없으며,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나고 천고(千古)를 휩쓸었으니, 전하의 마음에도 역시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저 군하(群下)들 중에 능히 곧은 도(道)를 스스로 지키고 정색(正色)하여 과감히 말하는 자가 있다면, 전하께서 비록 총명과 재지로써 스스로 굽히지 않더라도 또한 어찌 의리(義理)에 굽혀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대관(大官)은 아첨[容悅]하고 소관(小官)은 아유(阿諛)하여, 오늘 전하의 뜻을 맞이하고 내일은 전하의 생각을 받들어 교만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 문득 이미 습관이 되고 성품으로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만한 사람이 없고 나를 어길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심(聖心)이 향한 곳은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다가 문변(文辯)을 꾸며 사람을 제어(制御)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혹 단점을 보호함이 너무 지나친 데 이르면 도리어 그 졸렬함이 노출되고 과실을 부끄러워함이 너무 심하면 도리어 잘못을 그대로 이룹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본래 칠정(七情)의 상도(常道)이나 전하께서는 슬픔을 노여움으로 노여움을 슬픔으로 옮기니, 촉발되어 터져나올 때는 안색이 너무 사나워짐을 스스로 알지 못하시고, 폭발될 때 미쳐서는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와 흐느낌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아! 여항(閭巷)의 자호(自好)하는 선비는 조금이나마 수성(修省)에 마음을 둠이 있다면, 오히려 또 이치로써 사물(事物)에 응하고 뜻으로써 기(氣)를 제어합니다. 일찍이 당당(堂堂)한 천승지존(千乘之尊)이라 하면서 이런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조정에 임하여 아랫사람과 접할 때에 이러한 놀라운 거조(擧措)가 있단 말입니까? 일이 지나가고 나서 후회가 생기면 전하께서는 매번 마음에 쌓인 상처(傷處) 때문이라고 미루어 버립니다. 하지만 무릇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실로 만화(萬化)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일종의 사루(私累)에 휘말린 바 되어 모쪼록 가리고 꾸며 오직 드러날까 두려워하면서도 일찍이 좌사(左史)는 행동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말을 기록하여 백세(百世) 뒤에 득실(得失)을 의논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안색을 변하여 진노(震怒)하고 서안(書案)을 치며 오열하는 것은 종척(宗戚)의 일이 아니면 곧 절수(折受)하는 일이며, 절수하는 일이 아니면 궁차(宮差)에 관계된 일입니다. 어찌 일찍이 나랏일을 통탄해 천위(天威)를 스스로 떨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성상께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으며, 한 불충(不忠)한 신하를 죄주어 나라 사람들의 노여움에 사과하고, 한 불법(不法)한 관리를 징치(懲治)하여 우리 백성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을 보았겠습니까? 단지 이 출치(出治)의 근본이 애초부터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한결같이 나오지 않았으니, 정령(政令)과 시조(施措) 사이에 절로 마음에서 일어나 일을 해치는 병이 있게 된 것입니다. 위에서는 자량(慈諒)을 인(仁)으로 삼는데 아래서는 세월만 보내는 것으로 일을 삼고, 위에서는 총찰(聰察)로써 밝음을 삼는데 아래서는 각핵(刻核)을 능한 것으로 여기며, 위에서는 거짓을 억측함으로써 지혜로 삼는가 하면 아래서는 엿보고 추측(推測)함을 슬기로움으로 여기고, 위에서는 받들어 봉행하는 것을 충(忠)으로 여기는가 하면 아래서는 무조건 따르는 것을 공손하다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일을 행하고 다스림을 이룩하며 기강을 세우고 떨침에 있어 모두 구차하게 얽어매고 고식적으로 끌어다 채우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신하를 부리는 방도에 대해 주의(主意)를 잘못 두고 계십니다. 은수(恩數)로써 얽어맬 수 있고, 위령(威令)으로써 두렵게 할 수 있고 권술(權術)로써 부릴 수 있다고 여기시기 때문에 작록으로써 유언할 수 없으면 은수로 이어대고 은수로써 얽어맬 수 없으면 위령으로 이어대며, 위령으로써 두렵게 할수 없으면 권술로 이어댑니다. 무릇 일체 끌어대고 버티는 즈음에 있어서 십분 박절(迫切)한 환경을 만들고는 농락(籠絡)함으로써 묘계(妙計)를 삼고 마구 몰아댐으로써 기이한 술책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국가의 체통이 높지 못하게 되고 군신간의 분의(分義)가 엄숙하지 못하게 되어,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군상(君上)을 두려워할 줄을 알지 못하게 하니, 가령 번진(藩鎭)이 교만하고 사나우며 외척이 방자하게 마구 날뛰는 것이 당(唐)·한(漢)의 말기와 같아진다면 전하께서는 능히 그들을 꺾어 복종시키고 제어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위급한 때에 의지할 만한 자가 유사시(有事時)에 오직 좌우에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시지만, 국가가 한가한 때에 이르면 초개(草芥)처럼 버립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해 보소서. 자신을 잊고 토벌을 청한 원훈(元勳)의 경우야말로 어떤 충의(忠義)이며, 적(賊)을 꾸짖고 굴복하지 아니한 진수(鎭帥)야 말로 어떤 절열(節烈)이었습니까? 그런데 해마다 존휼(存恤)하는 은전(恩典)은 까마득하여 들어본 적이 없고, 남아 있는 고아(孤兒)를 녹용(錄用)하라는 명도 또한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종정(從征)했던 선비들은 한갓 자기 집안의 훈귀(勳貴)만을 누렸고, 초(楚)나라 재상의 의관(衣冠)으로 풍자한 것이 하나같이 어찌 우맹(優孟)630) 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항상 새것을 좋아하면서 옛것을 싫어하며, 정(情)은 많지만 은혜는 적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찡그리고 웃는 것이 모두 예쁘지만, 소원해지면 면목(面目)조차 모두 잊어버립니다. 이는 참새 그물을 펼친 문정(門庭)에 옛 신하들이 주저하고 초피(貂皮)를 꽂은 반행(班行)에 새로 귀하게 된 자가 잇따른 바입니다. 위벌(威罰)은 반드시 소원(疏遠)한 사람에게 행해지고 총영(寵榮)은 언제나 귀근(貴近)한 사람에게 우선하니, 치우친 곳은 너무 치우치고 지나친 곳은 너무 지나칩니다. 똑같이 전하의 신하건만 또한 어찌 피차에 후박(厚薄)을 달리함이 있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또 살피길를 좋아하고 의심이 많아 언제나 군하(群下)를 믿지 못하는 병폐가 있습니다. 억측함이 너무 지나치고 가혹하게 따짐이 너무 심하니, 유능한 사람은 몸을 못펴고 유능하지 못한 사람은 수족을 둘 곳이 없습니다. 지휘하고 부림에 있어 오직 전하의 뜻만을 우러러보기 때문에 큰 경우는 뜻을 품(稟)하고 작은 경우는 명을 받듭니다. 비록 종[奴]이 돼지나 가축을 꾸짖고 말과 소를 매듯 하더라도 웃고 꾸짖음을 그의 뜻대로 따르는데, 관작(官爵)은 내가 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 뭇 신료(臣僚)들을 멸시하고 사부(士夫)들을 능멸하며 부앙(俯仰)하는 자들을 어질다 여기고 고첨(顧瞻)하는 자들을 유능하다고 하며, 정도(正道)를 지키고 돌아오지 않는 신하는 먼저 소원해져 버림을 당하고 충심(忠心)을 품고 자호(自好)하는 선비들은 각각 위축되어 물러날 것을 생각함을 어찌 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저축이 바닥나고 백성의 재산이 고갈되는데 이르러서는 부자는 더욱 사치하여 날로 다투고, 가난한 자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날로 곤궁해지니, 눈앞의 근심이 진실로 백성과 나라가 함께 망하는 형상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궁부(宮府)를 하나로 보고 내외(內外)의 차이를 없게 하며, 검소를 좇는 것은 반드시 성궁(聖躬)에서부터 먼저 하고, 사치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귀주(貴主)로부터 먼저 해야 하실 것입니다. 설령 없애기 어려운 옛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급히 혁파함을 꺼리지 말고, 무릇 급하지 않은 쓸데없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면 언제나 헛된 낭비를 아깝게 여겨야 합니다. 마땅히 묘당(廟堂)의 신하에게 명하시되 먼저 온 나라 재부(財賦)의 근원(根源)을 헤아리고, 한 해의 세출·세입의 수를 총계하여 반드시 재감(裁減)한 것이 가장 심할 때를 견주어 정규를 삼아야 하고, 만약 풍년이 들어 넉넉한 때가 되면 흉년에 대비하며, 군국(軍國)의 수요(需要)에 대하여는 임금도 감히 못쓰고 유사(有司)가 감히 범하지 못하게 한 뒤에야 쓸데없는 비용이 절로 감소되고 나라의 저축이 절로 넉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공경(公卿)의 제도를 넘는 지나친 사치와 사서인(士庶人)의 분수를 넘는 지나친 사치는 마땅히 이목(耳目)631) 의 신하에게 신칙하여 통렬히 규핵(糾劾)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적절한 사람을 얻은 뒤에야 일이 이루어지고 정사(政事)가 거행될 것이며, 적절한 사람을 얻어 오래도록 맡긴다면 진실로 실효(實効)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절한 사람을 얻지 못하고 오래도록 맡긴다면 도리어 실제의 해(害)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이른바 ‘오직 인재를 써야 한다’는 말이 이미 곡진한 것입니다. 다만 인재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하께서 또한 사람마다 반드시 다 아는 것은 아니니, 곧 이는 묘당과 전조(銓曹)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고 유능 여부가 서로 뒤섞여 한갓 대대의 문음(門蔭)을 빙자해서 한번 청선(淸選)을 거치면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에 적절히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는 이미 관방(官方)에 어긋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로(一路)를 안찰(按察)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임무에 관계됩니다. 옛날의 구준(寇準)632) 이 추밀부사(樞密副使)로서 무승군 절도(武勝軍節度)가 될 것을 요구하자, 왕조(王朝)에서 오히려 ‘사상(使相)의 직책을 어찌 망령되어 구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직위(職位)가 숭품(崇品)에 이르더라도 마치 몸을 구부려 물건을 줍듯 하여 구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어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데, 전하께서 또 새 규례를 창출(創出)하시어 외보(外補)도 벼슬의 한 자리로 여기시니, 어찌 옛날의 사람 쓰는 도리와 한결같이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원일(元日)의 대조회(大朝會) 때에 마땅히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을 명초(命招)하여 묘당의 여러 재신(宰臣)들과 더불어 조신(朝臣)들의 재능 여부를 상확(商確)하게 하고, 전하께서 이미 맡겨 부렸던 사람들의 경우는 전하께서 친히 견별(甄別)하시어, 문학(文學)에 가합(可合)한 경우는 문학의 반열(班列)에 두시고, 정사(政事)에 마땅한 경우는 정사의 반열에 두며, 혹 문학과 정사를 구비한 사람일 경우는 또한 통재(通才)로 쓰신다면, 한 가지 재예(才藝)도 모두 기록되어 각각 그 적절한 곳에 있게 되고, 뭇 재능이 죄다 쓰여져 모두 그 직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암혈(巖穴)에서 독서하는 선비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땅히 지성으로 불러 경악(經幄)의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고 성심(聖心)의 계옥(啓沃)에 바탕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방면(方面)을 맡기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에 관계되는 것이니, 이것은 내직(內職)과 중직(重職) 여부를 논할 것 없이 따로 신중한 선택을 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타 수령(守令)·낭료(郞僚)의 선발은 본디 유사(有司)가 있으나, 미리 순방(詢訪)을 더하여 사의(私意)를 따르지 말고 재주에 따라 조용(調用)한다면, 어찌 매번 신칙(申飭)을 더하여 한갓 문구(文具)에 가까운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 양역(良役)의 폐단을 끝내 변통(變通)할 수 없다면, 필경 망국(亡國)의 화근은 반드시 여기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기로(畿路)를 안렴(按廉)할 때에 대개 일찍이 이 상황을 통렬히 논하였고, 연석(筵席)에 돌아와 아뢰던 날에도 전하께서 이 한 가지 일을 마무리지어 주실 것을 바라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한바탕 강구(講究)한 것이 또한 비국(備局)의 쓸데없는 휴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비록 신의 고을로 말하더라도 2필(疋)의 양군(良軍)이 거의 9백여 명에 이르는데, 해를 이어 물고(物故)된 부류는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작년에 비국에서 신의 별단(別單) 가운데 모록(冒錄)을 사정(査正)한 일을 여러 고을에 한 부씩 베껴 보냈습니다. 그래서 헐역(歇役)에 나아가 가탁한 자와 돈으로 신역(身役)을 속(贖)하여 한유(閑遊)하는 자들을 비록 간신히 찾아 모았으나, 구차하게 미봉(彌縫)하여 나간 것을 보충하고 빠진 것을 메우는 진실로 이른바 한때의 책망을 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반드시 백성으로 하여금 그 힘을 펴게 한 뒤에야 일분이나마 구제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조가(朝家)의 큰 변통(變通)을 기다린다면 장차 그럴 날이 없을 듯합니다. 때문에 연호(煙戶)의 결역(結役) 가운데서 수령(守令)이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에 시험삼아 재탁(裁度)을 가하되, 널리 편부(便否)를 물어서 매년 1결(結)의 잡역(雜役)으로 다만 3민(緡)을 바치게 하고 1호(戶)의 잡역에는 다만 1민만을 바치게 한다면 전날 역(役)에 응하던 비용과 비교하여 비단 너무 가벼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비록 흉년에 재감(災減)하고 난 뒤 나머지 결(結)에서 호역(戶役)으로 바칠 것을 함께 계산한다 하더라도 그 수 또한 많을 뿐만이 아닐 것인데, 이 바치는 돈으로 한 고을의 양민 가운데 2필의 절반을 감해 줄 수 있고 관거의 잡비(雜費)도 또한 족히 여유가 있을 것이니, 흉년에는 이와 같이 하고 풍년을 만나면 반드시 증가될 것입니다. 다만 결역(結役)·호역(戶役)으로 응역(應役)하는 가운데서 또 다소의 비용을 감한다면 결역자(結役者)가 편리하게 여기고 호역자(戶役者)가 편리하게 여길 것이며, 양역자(良役者)도 또한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수령 역시 불편함이 없어 절목(節目)을 강구하여 작성하고 한 번의 명령으로 안배해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곧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도 수재(守宰)가 역시 편리함을 따라 설시(設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고을은 비록 이와 같지만 다른 고을은 각각 같지 않으니, 한 고을 가운데서 구제할 수 있었던 방법을 따라 조금이나마 급함을 펴게 한다면, 조정에서 비록 크게 변통을 더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좌시(坐視)하면서 구제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조정에서 평년(平年)의 책봉(責捧)은 전세(田稅)의 두 대동[兩大同]에 불과하나 작년에는 봄·가을을 논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퇴(停退)하였는데, 금년에는 정퇴를 논할 것 없이 한결같이 징독(徵督)한다면, 비록 ‘금년의 대동은 다만 가을분만 받는다.’고 말하더라도 실제로는 한 가을 안에 네 대동을 책봉(責捧)하는 셈이 됩니다. 채찍을 치며 독촉함이 날로 급하지만 유포(流逋)는 날마다 잇달아 조정에서 재읍(災邑)을 관휼(寬恤)한다는 명목만 있고 궁민(窮民)을 관휼하는 실상은 없으니, 이는 ‘비록 어질다는 소문이 있으나, 어진 정치가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를 구획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는데, 신의 고을의 진전(陳田)의 세(稅)는 실로 백징(白徵)의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 온 가족이 죽어 절호(絶戶)가 된 전지(田地)가 많을 뿐만이 아닌데, 유망(流亡)한 부류에 대하여도 또한 이징(里徵)·족징(族徵)하는 곳이 많습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개간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도 매년 부세(賦稅)를 물리니, 왕정(王政)으로 헤아려 보건대, 실로 차마 할 수 없는 바입니다. 신은 내년 가을 검전(檢田)할 때에는 결단코 기경(起耕)하는 것에 따라 세(稅)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직책(職責)이 외읍(外邑)에 있으면서 마음에 간절한 정성이 있어 응지(應旨)하여 면계(勉戒)하였으되, 위로는 궐유(闕遺)를 보충(補充)하고 아래로는 세도(世道)를 개탄하여 조목조목 진술한 것이 명백(明白)하고 면계한 것이 절실(切實)하다. 그 중에서 나의 병통(病痛)을 지적한 것은 더욱 분명하니 마음속으로 가상하게 여긴다. 맹렬히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진달(陳達)한 바는 어제 이미 처분(處分)하였다. 예로부터 능히 개혁(改革)할 수 없었던 것은 또한 사세(事勢)가 부득이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품처(稟處)할 수 있는 것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원소(原疏)는 사관(史官)에게 맡겨 사책(史冊)에 쓰도록 하여 훗날의 임금으로 하여금 나의 과오를 알게 하고 경계할 거울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로 들여와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어 아침 저녁으로 살펴보고 스스로 힘쓰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부평 부사(富平府使) 김상성(金尙星)은 경악(經幄)을 거쳐 외읍(外邑)의 직임에 있으면서 응지(應旨)하여 거리낌 없이 맨먼저 면계(勉戒)를 진달했으니, 그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아마(兒馬) 1필(匹)과 새서(璽書)를 하사하여 나의 뜻을 표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후로는 여러 궁가(宮家)에서 다시는 절수(折受)하지 말라. 비록 이미 계하(啓下)했더라도 아직 거행하지 않은 것은 모두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9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역사-고사(故事) / 구휼(救恤) / 농업-전제(田制)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625]홍범(洪範)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 [註 626]
장쾌(駔儈) : 거간꾼.- [註 627]
상서(象胥) : 역관(譯官).- [註 628]
방훈(放勳) : 요(堯)임금.- [註 629]
중화(重華) : 순(舜)임금.- [註 630]
우맹(優孟) : 초장왕(楚莊王) 때 어진 재상(宰相) 손숙오(孫叔敖)가 청렴한 생활로 세상을 마치자, 그의 아들이 빈곤하여 나무 장수를 하였는데, 당시의 명우(名優)인 우맹(優孟)이 손숙오 생시(生時)의 의관(衣冠)을 갖추고 손숙오 행세를 하며 장왕을 감동케 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봉작(封尊)을 얻게 한 고사(故事).- [註 631]
이목(耳目) : 대간(臺諫).- [註 632]
구준(寇準) : 송 진종(宋眞宗) 때의 명상(名相).○富平府使金尙星上疏, 略曰:
以今日之規模, 觀今日之景像, 則千古所無之逆亂, 似若已靖矣, 百代未破之淫朋, 似若已去矣。 朝廷之上, 似若寅協, 疆場之內, 似若安謐, 廊廟暇豫, 似無民憂之可講, 臺閣從容, 似無官師之可論。 於是乎志滿意足, 至尊不期驕而自驕, 宰相不期逸而自逸。 外面治安之像, 只是粉飾虛僞, 而世道日斁, 人心日塞, 父子之變, 間出於愚珉, 君臣之義, 先壞於巨族。 王府訊鞫之坐, 無月無之, 諸道逮捕之擧, 無歲無之, 此豈治平之運, 和吉之像? 巫蠱、詛呪之變, 殆遍閭巷, 苟非僕隷之害主, 則皆是孽妾之謀嫡, 似此世道, 其將爲一分可恃耶? 三歲大饑, 八道同歉, 不死飢寒, 則死於疾疫者, 前後幾十萬計。 蠲租減布之恩, 逐年按行, 而便同常例, 議賑給災之政, 每歲講究, 而殆同古典, 上非不損, 下未見益。 此其故無他, 中外兼竝, 而小民之根本蹶矣, 上下豪侈, 而國家之尾閭泄矣。 噫! 今之顚死道路者, 無非祖宗休養之赤子, 而其良田美土, 擧入豪富之家, 田中滴汗之租, 只糜冗官之廩, 機上裂指之帛, 徒潤猾吏之橐。 又不知幾何甲第, 藏得賣兒販婦之錢矣。 殿下以高官厚祿, 養得許多臣僚, 坐視秦瘠, 不幸民類盡殲, 國勢隨潰, 則今日士大夫, 亦何以獨自驕逸乎? 臣誠死罪。 殿下不能罷內司之私藏, 何以杜群下之苞苴; 殿下不能寢宮房之占受, 何以禁群下之田宅乎? 財竭民窮, 怨詛朋興。 萬一疆埸不靖, 則奸徒孽竪, 無不樂禍, 沈文痼武, 莫不思亂, 似此人心, 其將謂一分可恃耶? 殿下慨然自奮, 勘向日之亂, 而不以爲矜, 遭頃歲之慼, 而不以爲沮, 只把破黨二字, 看作帝王大事業, 而惜夫察理不熟, 見義未精, 以至於經權互用, 義利雙行, 則殿下得不以皇極第一義, 誤認漢、唐雜覇之餘術乎? 何者,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所謂王道者, 無有好惡, 自可以蕩蕩; 無有偏黨, 自可以平平。 人慾消熄, 天理流行, 會極歸極, 漸有不期然而然者, 只此蕩平之效, 豈可先立題目乎? 是以, 事事物物, 未能一付於理, 裁量太過, 排此太甚, 互對雙擧, 如分兩端。 彼中求一箇是, 則此中亦求一箇是, 彼中討一箇非, 則此中亦討一箇非, 凡於黜陟用捨之間, 無往不然。 一政窠之出, 政官之心力殆疲; 一廟薦之出, 大臣之稱停甚難。 噫! 其流之弊, 輕重相混, 長短難辨, 其爲枉物性而傷物情者, 奚止於巨屨小屨之同價乎? 洪範曰: "其無好德, 汝雖錫之福, 其作汝用咎。" 此言祿以予賢, 不可及惡, 而今則私意以汨亂之, 私智以穿鑿之, 以地閥而局之, 以形勢而擇之, 以色目而甄別之。 此韓愈所謂: "賢者與千金, 不賢者亦與千金, 而賢者日退, 不賢者日進。" 云者, 其亦不幸近之矣。 今殿下用人太急, 棄人太易, 朝使一人, 暮換一人, 銳進者必速退, 受知者必見疑。 前者旣踈, 後者乘之; 舊者旣捐, 新者間之。 殿下之平日倚恃者, 無不次第束閣, 則雖有謀慮, 何以展布; 雖有才智, 何以施設? 稍有操守者, 欲其詭遇而獲禽, 則非其操也; 其欲鑽穴而相從, 則非其守也。 顧今干競自賤之徒, 輒得好官; 退靖自重之士, 未充實用。 然則殿下之大建皇極, 惟才是用之意, 果安在哉? 名器、爵賞, 人主猶不得以私之, 則操縱與奪, 又豈群下之所自擅, 而殿下不問賢愚, 必欲隨人而悅之, 群下徒循好惡, 必欲黨私而濟之, 其視祖宗愛惜之公器, 不啻若一番富貴傳舍, 則何怪乎朝廷之極選日卑, 國家之公器日賤耶? 噫! 殿下欲挽回世道, 則先以收拾人心; 欲收拾人心, 則先覷乎消融黨習之道; 欲消融黨習, 則先下工於甄別人才之方。 早晩成就, 有未易言, 惟當勿貳勿疑, 毋沮毋撓, 行之以悠久, 做之以誠實, 而近瞷聖意所存, 亦已七八分弛緩矣。 殿下必以爲, 謀慮之人, 近於泥滯, 設施之人, 近於更張, 操守之人, 近於驕亢, 才志之人, 近於便儇, 故必取左右無弊者, 以充窠級。 見其懷祿持位, 奔走奉承之不暇, 則謂可以牽補苟度, 而曾不悟其有志者自踈, 抱才者自沮乎? 雖以言路言之, 近來士大夫之自許氣節者, 不過黨議, 則此未必眞爲骨鯁之風, 而可以不畏强禦, 眞有批鱗之節, 可以斥言袞闕, 而猶以媕婀爲恥, 苟且爲戒。 蓋其一種風習, 未盡銷鑠, 殆不知禍福之可戒, 利害之可畏, 則此所謂一箇胸中氣耳。 自頃以來, 不啻若厭厭泉下人, 俯仰顧瞻之態, 便作家法, 藏縮媕靡之習, 反爲身計, 此豈十數年間, 已有古今而然哉? 只緣朝廷之上, 以言爲諱。 時政之指論也, 則宰相惡之, 袞闕之斥言也, 則至尊厭之, 同者不欲傷之, 異者不欲論之。 殿下雖恢張聖聰, 導揚臺氣, 惟懼其含默, 而惟聞進言而得罪, 未聞不言而獲譴者, 其孰能慷慨謇諤, 論人得失, 取人猜疾乎? 在昔一進一退之時, 士大夫猶有顧畏之意, 朝臣之賣弄權勢, 守宰之招斂貨賂者, 亦不能不慮於柱後惠文之議其後, 而今則設有大權奸、大贓汚, 亦將有恃而無憂矣。
故近來泯默之風, 便成規模, 寧或泛論民弊, 不敢略陳朝政, 寧或泛言君德, 不敢少涉時論。 至於廟堂、銓曹一言關涉, 亦謂敲撼傾軋, 大則獲逞憾之目, 小則招起鬧之疑。 人主之耳日無可恃, 國家之元氣無可恃, 凡有緩急, 其將責力於何地耶? 管子曰: "廉恥者, 國之四維。" 中歲士大夫, 矜持頗高, 駔儈象胥, 不近門庭, 關節、干托, 不行州郡。 以至京司月騶之俸, 必審於內外之別, 外方歲時之遺, 必嚴於辭受之際。 第舍宏侈, 則惟恐世德之或累; 裘馬華麗, 則惟患公議之竊譏。 此乃孟子所謂辭讓之心, 禮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今則朝廷禮讓之風, 一切消喪, 搢紳廉恥之道, 太半掃蔑。 苟利於家, 則雖知其喪廉害義, 而不知恥; 取譏貽笑而不知愧。 雖未知淸朝士大夫之風, 何爲至此, 而殆不幾於四維之不張, 國隨而亡者乎? 竊瞷殿下之本來氣質, 何等明粹, 而學問不深, 操存不力, 遇事闖發, 便有暮歸觀獵之意, 則天理自消, 日減一分, 人慾自長, 日加一分。 誠僞互雜, 義利交攻, 故高處太高, 卑處太卑, 乍聖乍凡, 倐王倐霸, 而近傲然自恃, 縱然自聖, 有若勛、華之治, 已占八九分地位然, 正如汲黯所謂, 陛下內多欲, 而外施仁義也。 三代固無論, 亦何以跂及於漢、唐中主耶? 此無他, 壞了殿下之心術者, 乃殿下之明睿也; 誤了殿下之姿質者, 乃殿下之才智也。 何則? 假使殿下明睿不足以鑑燭萬理, 才智不足以屈服百僚, 則可以借人爲明, 可以取人爲智, 而明能洞燭於毫末之際, 智能周察於履屐之間, 故天下無難事, 世上無可人, 謂可以駕越百王, 蹴蕩千古, 而殿下之心, 亦自不覺其無足畏矣。 彼群下者, 有能直道自持, 正色敢言者, 則殿下雖不以明智自屈, 亦豈不見屈於義理, 而大官容悅, 小官阿諛, 今日迎殿下之志, 明日逢殿下之意, 養得驕心, 便已習與性成。 故謂人莫若, 惟予莫違。 聖心所向, 無敢咈忤, 重以修飾文辯, 作爲御人之欛柄, 或至於護短太過, 反露其拙, 恥過太甚, 反遂其非。 喜怒哀樂, 固是七情之常, 而殿下以哀遷怒, 以怒遷哀, 當其觸激之時, 不自知其容氣之太厲, 及其暴發之際, 不自覺其聲淚之俱咽。 噫! 閭巷自好之士, 稍有存心於修省, 則猶且以理應物, 以志制氣。 曾謂堂堂千乘之尊, 不能制得此心, 臨朝接下之際, 乃有此可駭之擧耶? 事過悔生, 殿下每諉於方寸之積傷。 夫人主一心, 實爲萬化之本, 而一種私累, 大段縛住, 善自遮飾, 惟恐呈露, 曾不悟其左史記動, 右史記言, 百世下有以議其得失。 殿下所以動色振怒, 拍案嗚咽者, 非宗戚事, 則乃折受事也, 非折受事, 則乃宮差事也。 何嘗見痛慨國事, 天威自震, 哀恤民隱, 王涕自零, 罪一不忠之臣, 謝國人之怒, 懲一不法之吏, 慰吾民之哀耶? 只此出治之本, 初未嘗粹然一出於正, 則政令、施措之間, 自有生心害事之病。 上以慈諒爲仁, 而下以玩愒爲事; 上以聰察爲明, 而下以刻核爲能; 上以臆詐爲智, 而下以窺測爲慧; 上以承奉爲忠, 而下以趨走爲恭。 殿下所以做事制治, 立綱振紀者, 都不過苟且羈縻, 姑息牽補而止耳。 殿下於使臣御下之道, 誤着主意以爲, 爵祿而可啗之, 恩數而可縻之, 威令而可怵之, 權術而可御之。 故爵祿而不能啗, 則繼之以恩數; 恩數而不能縻, 則繼之以威令; 威令而不能怵, 則繼之以權術。 凡於一切撕捱之際, 要作十分迫阨之界, 自以籠絡爲妙計, 馳驟爲奇策。 然由是而國家之體統不尊, 君臣之分義不嚴, 致使在下之人, 殆不知君上之可畏, 則假使藩鎭驕悍, 外戚橫恣, 如唐、漢之季, 而殿下能折服駕馭之乎? 今之爲殿下竭誠盡忠, 緩急可仗者, 當其有事之時, 惟恐不在於左右, 而及乎國家閑暇, 棄若草芥, 殿下試思之。 如忘身請討之元勳, 何等忠義; 罵賊不屈之鎭帥, 何等節烈, 而每歲存恤之恩, 漠然無聞, 遺孤錄用之命, 亦歸寢格。 當時從征之士, 徒享自家勳貴, 而楚相衣冠之諷, 一何不及於優孟耶? 此無他, 殿下常喜新而厭舊, 多情而寡恩, 愛之則嚬笑俱姸, 踈之則面目都忘。 此所以羅雀門庭, 舊臣齟齬; 揷貂班行, 新貴聯翩。 威罰必行於踈逖, 寵榮輒先於貴近, 偏處太偏, 過處太過。 均是殿下之臣子, 而亦豈有彼此厚薄之殊耶? 殿下又好察多疑, 每有不信群下之病。 逆詐太過, 苛摘太甚, 能者不及展體, 不能者無所措手。 指揮頣使, 惟仰殿下之意, 故大則取旨, 小則承令。 雖奴詬豕畜, 馬縶牛維, 而笑罵從他, 官爵吾做何怪乎? 殿下蔑視群僚, 凌駕士夫, 以俯仰者爲賢, 顧瞻者爲能, 而秉正不回之臣, 先被踈棄; 懷忠自好之士, 各思退縮乎。 至若國儲蕩虛, 民産匱竭, 富者益侈而日競, 貧者掊克而日困, 目下憂虞, 誠有民國俱亡之形。 殿下誠一視宮府, 無間內外, 從儉必先於聖躬, 祛奢必先於貴主。 設有難罷之故例, 無憚遽革; 凡係不急之冗務, 每惜妄費。 宜命廟堂之臣, 先究一國財賦之原摠, 計一歲出入之數, 必以裁減最甚之時, 比作定規, 若其豐年羡餘之時, 另備飢荒, 軍國之需, 使人主不敢用, 有司不敢犯, 然後冗費自損, 國儲自裕, 而如公卿之踰制過侈, 士庶之越分過奢者, 則宜飭耳目之官, 痛加糾劾也。
然而國家能得人, 然後事修政擧, 得其人而久任之, 則誠有實效, 而不得其人而外任之, 則反有實害。 此則殿下所謂惟才是用者, 已盡之矣。 但才與不才, 殿下亦未必人人而盡知, 則此廟堂銓曹之責, 而私意橫流, 能否相混, 徒藉世蔭, 一經淸選, 則政事、文學, 無適不宜, 此已有乖於官方, 而一路按察, 尤係重任。 古者寇準以樞密副使, 求爲武勝軍節度, 王朝猶以爲: "使相之職, 豈可妄求?" 云而今則位列崇品, 視若俯拾求之而不爲恥, 與之而不爲怪, 則殿下又創出新例, 看作外補之一窠者, 何其與古昔用人之道, 一切相反也? 臣意則宜於元日大朝會之時, 命招時、原任大臣, 竝與廟堂諸宰, 商確朝臣之才否, 如殿下之已經任使者, 則殿下親自甄別, 可於文學則置之於文學之列, 宜於政事則置之於政事之列, 或有文學政事之俱備者, 亦以通才用之, 則一藝俱錄, 各適其宜, 群才畢用, 皆得其職。 至於巖穴讀書之士, 尤宜至誠招徠, 以備經幄之顧問, 以資聖心之啓沃, 而至如方面之寄, 係生民之休戚, 此則毋論內重與否, 不可不另加愼擇。 其他守令郞僚之選, 固有司存, 預加詢訪, 毋徇私意, 隨才調用, 豈不愈於每加申飭, 徒近文具乎? 噫! 今日良役之弊, 終不能變通, 則畢竟亡國之禍, 必在此而不在他。 臣於按廉畿路時, 蓋嘗痛論此狀, 而筵席歸奏之日, 不能無望於殿下之了此一事。 然向來一場講究, 亦歸備局無用之故紙。 雖以臣邑言之, 二疋良軍, 殆至九百餘名, 而連歲物故之類, 有不可計。 昨年備局以臣別單中, 査正冒錄事, 謄送一案於列邑。 故其趨歇而假托者, 贖錢而閑遊者, 雖或艱辛搜括, 苟且彌縫, 而補漏塡闕, 眞所謂一時塞責者耳。 必也使民紓其力, 然後可以救得一分, 而若待朝家之大變通, 恐將無日。 故就其烟戶結役中, 守令之可以 自擅者, 試加裁度, 廣詢便否, 以每年一結之雜役, 只納三緡, 一戶之雜役, 只納一緡, 比諸前日應役之費, 不翅太輕。 而雖以荒歲災減後所餘之結, 竝與戶役所捧而計之, 其數亦不翅夥然, 則以此所捧之錢, 減給一邑良民中兩疋之半, 而官家雜用之費, 亦足有裕, 凶歲如此, 必將遇豐而增加矣。 只於結、戶應役之中, 又減多少所費, 則結役者便之, 戶役者便之, 良役者又便之, 而守令亦無不便者, 講成節目, 自可以一令按行, 此則不待朝令, 守宰亦可以隨便設施, 而臣邑雖如此, 他邑各不同, 隨其一邑中救得之術, 以紓一半分之急, 則朝家雖未能大加變通, 豈不愈於坐視而莫之救耶? 朝家常年責捧, 不過田稅兩大同, 而昨年則勿論春秋, 一倂停退之, 今年勿論停退, 一倂徵督之, 雖曰今歲之大同, 只捧秋等, 而其實則一秋之內, 責捧四大同也。 鞭督日急, 流逋日繼, 朝家有寬恤災邑之名, 無寬恤窮民之實, 此不幾於雖有仁聞, 不如仁政之入人也耶? 孟子曰: "王政必自經界始。" 而臣邑陳田之稅, 實爲白徵之冤。 其闔歿絶戶之田, 不翅夥然, 而流亡之類, 亦多里徵、族徵之處。 至以累十年不墾之土, 每歲責賦者, 揆以王政, 實所不忍。 臣謂明秋檢田之際, 決不可不隨起收稅。
批曰: "職在外邑, 惓惓于心, 而應旨勉戒, 上補闕遺, 下慨世道, 條陳明白, 勉戒切實。 其中指予病痛, 尤甚洞曉, 心用嘉之, 可不猛省焉? 所陳昨已處分。 自古不能釐革者, 亦由於事勢不得已。 可以稟處者, 令廟堂稟處。 原疏付諸史官, 書諸史, 使後君知予之過, 作可戒之鑑。 仍入留中, 昕夕省覽而自勉焉。" 仍敎曰: "富平府使金尙星自經幄職, 在外邑, 應旨不諱, 首陳勉戒, 深嘉其誠。 兒馬一匹、璽書賜給, 以表予意。" 又敎曰: "今後則諸宮家更勿折受。 雖已啓下, 未擧行者竝寢之。"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9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역사-고사(故事) / 구휼(救恤) / 농업-전제(田制)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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