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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36권, 영조 9년 12월 19일 병인 2번째기사 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박문수가 치도에 대해 상소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청대(請對)하여 같이 들어왔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성심(聖心)의 분발하심이 요컨대 조만간에 있을 줄 알고 있었으나 삼가 일전의 대고(大誥)를 보건대, 대개 즉위하신 이후로 이처럼 크게 분발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신이 또한 평소 가슴속에 간직해 온 바가 있으니, 만약 성문(聖問)을 받들게 된다면 삼가 마땅히 숨김없이 모두 말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가슴속의 것을 널리 말하겠다. 신축년·임인년 이후로 국사(國事)를 한결같이 포기(抛棄)한 채 내버려 두어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시상(時象) 외에는 다른 일이 없었는데, 백성과 나라의 폐단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았으니,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하후(夏后)·은(殷)·주(周)로부터 비로서 세습(世襲)으로 계승하였는데, 뒷날 제왕(帝王)에서 걸(桀)·주(紂)·유(幽)·여(厲) 같은 왕이 있어 끝내 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니, 이른바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은 어렵다.’는 것이다. 대개 수성의 인주(人主)는 한갓 조종(祖宗)이 쌓아 놓은 덕(德)을 믿고 ‘이와 같이 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여 편안히 지내면서 일찍이 힘쓰지 않았고, 도(道)가 없는 인주의 경우는 또 거기다가 방자(放恣)하고 편벽되어 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애(仁愛)한 하늘이 어찌 그로 하여금 복망(覆亡)케 하겠는가? 우리 나라는 중국과 달라서 비록 한(漢)·당(唐)의 위세로써도 땅을 빼앗고 나라를 바꿀 수 없었으며, 조선(朝鮮)의 안에서 스스로 서로 대(代)를 갈아 오늘에 이르렀다. 3백 년 종사(宗社)의 맡김이 내 한몸에 달렸으니, 어찌 상도(常道)를 좇아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수 있겠는가? 금일의 형세는 굶주린 사람이 대황(大黃)과 부자(附子)를 먹은 것과 같으니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 대고(大誥)로 칙려(飭勵)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대개 창업(創業)한 임금은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아서 비록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해도 다스릴 수 있으나, 수성한 뒤에는 해가 오방(午方)을 지나 미방(未方)으로 향하는 것과 같아 만약 혹시라도 인순(因循)한다면 결코 만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념(聖念)이 분발해 힘쓰시니, 이는 진실로 크게 변화시킬 전기(轉機)입니다. 오늘 전하께서 손을 댄 곳은 ‘진실로 뜻을 세우고, 치도(治道)를 구하며 진실로 인재를 쓰고 재물을 절약하는 것’에 불과하니, 일정한 공부(工夫)로서 일정한 사업(事業)을 이루신다면, 하고자 하시는 대로 다스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명(明)나라의 선종(宣宗)은 한 사람의 수령(守令)을 제수하는 데도 언제나 현부(賢否)를 묻고 상벌(賞罰)을 시행하였으므로, 황명(皇明)의 다스림이 이에서 융성해졌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끝내 선한 사람을 선하게 여기시나 능히 등용하지 못하시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시나 능히 버리지 못하는 병통이 있기 때문에, 죄가 있는 자도 또한 징즙(懲戢)이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앞서는 편벽된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피차가 서로 과실(過失)을 말하였으나, 한 번 탕평(蕩平)을 행한 뒤로부터는 온 세상이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으니, 군하(群下)의 허물을 전하께서 어디를 통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언로(言路)를 크게 연다면 인재(人才)가 또한 마땅히 무리를 지어 나올 것인데, 탕평이란 이름은 있으나 탕평의 실적은 없습니다. 무릇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씀에 있어서 저울대처럼 공평히 하여 색목(色目)을 논하지 말고 공정하게 임용(任用)한 뒤에야 비로소 동서 남북(東西南北)의 탕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다만 노론(老論)·소론(少論)만 탕평되었을 뿐입니다. 무릇 탕평이란 것은 천하(天下)의 탕평이 있고 조선(朝鮮)의 탕평이 있는 것인데, 어찌 유독 노론·소론의 탕평만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기 때문에 대소(大小) 조신(朝臣)들은 서로 엄호(掩護)하는데 힘쓰고 있으니, 가령 나라가 장차 위태롭고 멸망하는 데에 이르더라도 절의(節義)를 위해 죽는 선비는 기필코 없을 것입니다. 혹 한 사람이나마 직언(直言)하는 자가 있으면 뭇사람들이 떼를 지어 떠들어 대며 함께 비척(非斥)을 더하니, 사람들은 모두 말하지 않는 것을 득계(得計)로 여깁니다. 이와 같은데 누가 기꺼이 시비(是非)를 직언하겠습니까? 인재(人才)에 대해 논하자면, 오광운(吳光運)의 문한(文翰)과 좌지(坐地)는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보다 낮지 않으나 쓰여진 것은 송인명조현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홍경보(洪景輔)는 이미 옥당(玉堂)과 대간(大諫)을 거쳤으며, 자력(資歷)과 인물이 이광덕(李匡德)·민응수(閔應洙)·이수항(李壽沆)·이성룡(李聖龍)의 무리보다 밑돌지 않는데, 완백(完伯)의 제수에 논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노론·소론의 나라이지 전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박문수의 말은 잘못입니다. 오광운은 공의(公議)에 배척받아 지신(知申)의 망(望)에서 발거(拔去)되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칙려(飭勵)하는 날을 당하여 어찌 감히 다시 ‘노소(老少)’ 두 글자를 성상(聖上) 앞에서 꺼낸단 말입니까? 사체(事體)가 미안(未安)하였는데,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이 오늘 당직(戇直)한 말을 하였다. 대고(大誥)로써 구언(求言)한 때에 만약 추고를 청한다면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들이 누가 기꺼이 와서 말하겠는가? 유신(儒臣)이 잘못한 것이다. 이미 19일 하교(下敎)에 유시(諭示)했지만, 이제 노론·소론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또한 아픈 것을 숨기고 의원을 꺼리는 것과 같다."

하였다.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신은 오광운을 소인(小人)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여름의 상소(上疏) 가운데 ‘임금은 있고 신하는 없다.’고 한 것은 완전히 아첨이며, 아래 조항의 ‘위복(威福)’이란 말도 또한 심히 참특(譖慝)한 것입니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자기(自己)에게 절핍(切逼)하기 때문에 소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오원이 말하기를,

"그 사람됨을 살피건대 끝내 경위(傾危)하여 불길하며, 그 상소 역시 그러하니 신은 결단코 그가 소인인 줄 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광운의 마음을 캐본다면 슬픈 일이니, 어찌 소인이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금일의 폐단은 재상이 사의(私意)를 쓰지 않아야 옳은데, 심지어 자질구레한 선천(宣薦)까지 재상이 주천(主薦)하는 자를 불러 단단히 청촉(請囑)합니다. 이런 일이 한 번뿐이 아니니 기강(紀綱)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다스리는 도(道)란 요행(僥倖)을 억제한 뒤에야 백성의 뜻을 정할 수 있고, 백성의 뜻이 정해진 뒤에야 기강이 설 수 있으며, 기강이 세워진 뒤에 온갖 일이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소강절(邵康節)의 시에 ‘당기기는 천균(千勻)의 쇠뇌처럼 하고, 갈기는 마땅히 쇠를 백 번 제련하듯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의 재상은 만약 시변(時變)을 당했을 경우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고 계구(戒懼)·수성(修省)하며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강구(講求)하였는데, 지금은 역변(逆變)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심지어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변고까지 있으나, 조정에서는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을 모르며 투미(媮靡)는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인심이 이와 같고 기강이 이와 같으며 백성은 궁핍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3백년 종사(宗社)가 어찌 전하 때에 망하려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크게 분발하고 크게 진작(振作)한 연후에야 국사(國事)를 다스릴 수 있고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함이 너무 지나치나 학식이 부족하여 작은 일은 살피지만 혹 대체(大體)를 잃기도 하십니다. 삼가 원하건대 긴요하지 않은 문서는 제거해 없애고 긴절(緊切)한 공부(工夫)를 하시며, 전날의 투타염희(媮惰恬嬉)하던 것을 버리신다면 국가를 부지(扶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소회(所懷)는 낮이 지나고 밤을 새워도 다 말씀드릴 수 없으니, 어리석은 충정이 답답하게 맺힌 나머지 거의 광기(狂氣)를 발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의 이와 같은 기습(氣習)을 사람들이 거칠다고 하지만 나는 당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비록 옹주(翁主)의 제택(第宅)으로 말씀드리더라도 거처(居處)할 만하면 족할 것이니, 어찌 장대(張大)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득한 큰 들과 척박한 산전(山田)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절수(折受)하였으니, 부마(駙馬)의 위력으로 처음에는 수습(收拾)할 수 있겠지만, 그 자손들은 결코 추심(推尋)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갓 목전(目前)의 민폐를 끼치는 것일 뿐이니, 한도(限度)를 정해 비옥한 땅을 사주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신도 또한 일찍이 자식을 낳았으나 훈봉(勳封)을 얻자 갑자기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서명균(徐明均)이 복이 많은 것은 선세(先世)의 검약(儉約)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조물주의 이치는 본래 이와 같은 것입니다. 무릇 부마의 전택(田宅) 등에 관계된 일은 한결같이 검약을 따라서 많은 복을 받게 하소서.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성색(聲色)·토목(土木)·사치(奢侈)의 일을 일체 물리쳐 버리셨으나, 사사롭지 않을 수 없고 욕심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단지 부마의 영산(營産) 한 가지 일에 있으니, 이 간절한 일에 대해서도 단연코 잘라 버린다면 그 나머지 국사(國事)는 이에 절반을 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이 절실하다. 이후로 만약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경은 또 들어와 말하라. 내가 임어(臨御)한 지 1기(紀)에 가까워지니 자못 여러 신하들의 장단점을 알겠다. 을사년 이후로 이병태(李秉泰)가 자못 고지식하였고, 그 뒤에 안색을 범하여 강력하게 간하고 모자란 점을 보필한 사람으로는 조현명(趙顯命)이 있었으며, 조용히 개도(開導)하며 일에 따라 옳은 것을 올리고 나쁜 것을 고치는 자로는 이종성(李宗城)이 있었다. 깊이 생각하고 널리 염려하여 일을 맡아 효과(効果)을 이룩하며, 비록 외임(外任)에 있어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가 있음을 알게 하는 사람은 경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학문이 부족할 뿐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9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농업(農業)

    ○上行召對, 靈城君 朴文秀請對同入。 文秀曰: "臣固知聖心之奮發, 要在早晩, 而伏覩日前大誥, 蓋卽阼以後, 未有如此大奮發者。 臣亦有平昔所蘊, 若承聖問, 則謹當盡言不諱。" 上曰: "予當敷告心腹矣。 辛壬以後, 國事一任抛棄, 君臣上下, 時象外無他事, 民國之弊, 皆由於此矣。 自古未有不亡之國, 后、, 始爲世承, 而後王有如則終至亡國而後已, 所謂創業易, 守成難者也。 蓋守成之主, 徒恃祖宗積德, 謂如是而足, 恬然未嘗勤勵, 無道之主則又從以放僻, 以致亡國。 不然則仁愛之天, 豈使之覆亡乎? 我國異於中國, 雖以之威, 不能奪地易國, 朝鮮之內, 自相革代, 以至于今日矣。 三百年宗社之托, 在予一身, 豈可循常, 而能挽回世道乎? 今日之勢, 若飢人之服大黃、附子, 何以支撑乎? 大誥飭勵者, 良以此也。" 文秀曰: "大凡創業之君, 若朝日之昇, 雖或悠泛, 可以爲治, 守成之後, 則如日之自午向未, 若或因循, 則決難挽回矣。 方今聖念奮勵, 此誠丕變之一大機也。 今日殿下之所下手處, 不過曰眞實立志, 眞實求治, 眞實用人, 眞實節財。 以一定之工夫, 做一定之事業, 則治可以從欲矣。 大明 宣宗除一守令, 輒問賢否而賞罰之, 故皇之治, 於斯爲盛。 殿下則終有善善不能用, 惡惡不能去之病, 故有罪者亦不懲戢矣。 且前則有偏論, 故彼此互言過失, 一自行蕩平之後, 一世含默不言, 群下之過, 殿下何從而聞之乎? 苟使言路大開, 則人才亦當輩出矣。 有蕩平之名, 而無蕩平之實, 夫銓曹用人, 如衡之平, 無論色目, 公收幷用, 然後始爲東西南北之蕩平, 而今也不然, 只爲老、少論蕩平而已。 夫蕩平者, 有天下之蕩平, 有朝鮮之蕩平, 安有獨行於老、少論之蕩平乎? 夫如是, 故大小朝臣, 互相掩護。 假使國家將至危亡, 必無伏節死義之士。 或有一人直言者, 則衆楚人咻之, 共加非斥, 人皆以不言爲得計, 如是而孰肯直言是非乎? 以人才論之, 則吳光運之文翰坐地, 不下於宋寅明趙顯命, 而見用不及於; 洪景輔旣經玉堂大諫, 資歷人物, 不下於李匡德閔應洙李壽沆李聖龍輩, 而被論於完伯之除。 殿下之用人, 可謂公乎? 此是老、少論之國, 非殿下之國也。" 檢討官金若魯曰: "朴文秀之言非矣。 吳光運見斥於公議, 至拔知申望矣。 況當飭勵之日, 何敢復以老少二字, 發於上前乎? 事體未安, 宜推考矣。" 上曰: "靈城今日爲戇言矣。 大誥求言之時, 若請推考, 則草野之人孰肯來言乎? 儒臣誤矣。 已諭於十九日下敎, 今以老、少論不可說到云者, 亦若諱疾而忌醫矣。" 吳瑗曰: "臣則以吳光運爲小人。 今夏之疏, 有君無臣云者, 全是諂諛, 下款威福之說, 亦是譖慝之甚者耳。" 文秀曰: "切逼於自己, 故以爲小人矣。" 曰: "觀其爲人, 終是傾危不吉, 其疏亦然, 臣斷知其爲小人矣。" 上曰: "光運原其心則慼矣, 豈小人哉?" 文秀曰: "今日之弊, 宰相不用私意則可矣, 而甚至幺麽宣薦, 宰相招致主薦者, 齗齗請囑。 此等事不一而足, 紀綱何以立乎? 爲治之道, 抑僥倖然後, 可以定民志, 民志定然後, 紀綱可立, 紀綱立然後, 百事可爲。 邵康節詩曰: ‘施爲欲似千勻弩, 磨礪當如百錬金。’ 有爲者當如是矣。 古之宰相, 若遇時變, 則入告于君, 戒懼修省, 講求弭災之道, 而今則逆變接跡而起, 至有子弑父之變, 而朝廷不知警懼, 媮靡日甚。 人心如此, 紀綱如此, 民窮財竭, 無一可恃, 三百年宗社, 豈可亡於殿下之時乎? 必也大奮發大振作, 然後國事可爲, 人才可得, 而第殿下英明太過, 宏識不足, 察於小事, 而或遺大體。 伏願除却不緊文書, 做得緊切工夫, 毋如前日之媮惰恬嬉, 則國家可以扶持矣。 臣之所懷, 雖竟日達夜, 猶不可盡, 愚衷鬱抑, 殆欲發狂矣。" 上曰: "靈城如此氣習, 人以爲麤率, 予則以爲戇直矣。" 文秀曰: "雖以翁主第宅言之, 使可居處足矣, 何必張大乎? 至於蒼茫大野, 磽确山田, 處處折受。 以駙馬之威力, 始可收拾, 而其子其孫, 決難推尋, 徒貽目前之民弊。 不如定限, 買給膏腴之土, 可使足用矣。 臣亦嘗生子, 而自得勳封, 遽見夭折。 徐命均之多福, 由其先世儉約, 造物之理, 本自如此。 凡係駙馬田宅等事, 一從儉約, 俾受多福焉。 殿下卽阼以來, 聲色、土木、奢靡之事, 一切屛去, 而惟其不得不私, 不得不欲者, 只在於駙馬營産一事, 於此緊切事, 斷然割去, 則其餘國事, 斯過半矣。" 上笑曰: "卿言切實矣。 此後如有可言者, 卿又入來言之。 予臨御近一紀, 頗知諸臣長短。 乙巳以後, 李秉泰頗能戇直, 其後犯顔强諫, 補闕拾遺者, 有趙顯命, 從容開導, 隨事獻替者, 有李宗城。 至於深思廣慮, 擔當做事, 雖在外任使, 百姓知有國家者, 非卿而誰? 但學問不足矣。"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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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물(人物) / 농업(農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