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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36권, 영조 9년 11월 5일 임오 1번째기사 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국청 문제와 호포·결포·군포 등에 대해 논하다. 종친의 역할 범위에 대해 논하다

국청 대신(鞫廳大臣) 이하가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죄인은 판부(判付)에 의거해 위엄을 베풀어 엄히 물었는데, 처음 공초(供招)와 바뀐 말은 없었으나 어긋나는 단서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국체(鞫體)로 보아 원고(援告)한 자들을 잡아다 그 허실(虛實)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진짜 괘서(掛書)한 사람을 알아낸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괜히 소란만 일으킬 뿐이다. 지금 또 발포(發捕)한다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그 자가, ‘고만령의 계집종과 얼굴을 알므로 아무아무의 성명과 고만령의 집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그 계집종을 지금 만약 잡아온다면 그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당연히 체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그 공초(供招)에 또 말하기를, ‘고만령남원(南原)에 괘서하였고, 김남역순천(順天)에 괘서하였으며, 그가 정제인과 길에서 서로 만났고 고만령의 집에 뒤좇아 가서 모의(謀議)하는 것을 몰래 들었습니다.’고 했으니, 이 세 사람은 먼저 마땅히 발포(發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만령·김남역·정제인고만령의 계집종을 아울러 함께 발포하고, 그 나머지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 결말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묻기를,

"어제 유신(儒臣)들의 말을 들으니, 연해(沿海)에 도적이 있어 우후(虞候)의 장교(將校)를 베어 죽이기까지 했다고 하니, 참으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경들도 들었는가?"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신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도신(道臣)이 어찌 장계(狀啓)로 알리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광덕(李匡德)이, ‘우후(虞候)의 행장(行裝)을 도적들에게 노략질당했습니다.’고 했지만, 도신들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이런 일들은 전해지는 말이 많이 불어나고 보태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훈장(訓將) 장붕익(張鵬翼)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이 일을 듣고 즉시 형탐(詗探)을 파견했는데, 돌아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도적을 만나 봉인(鋒刃)에 다쳐 죽은 것이지 기찰 장교(譏察將校)는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전하는 자들이 와전(訛傳)한 것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죄인 법흠(法欽)을 합좌(合坐)하여 처웅(處雄)의 편지 가운데 있는 낙빈왕(駱賓王)·김시습(金時習) 등의 말도 구문(究問)하였는데, 법흠의 편지 가운데 또한 ‘가을 국화·봄 난초는 각각 절기가 있다.’는 말이 있어 숨기는 정실이 있는 듯한데,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처웅법흠에게 보낸 편지를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이는 반드시 깊이 생각할 것은 아니다. 그 자는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사(山寺)에서 병영(兵營)에 제발로 내려와 취포(就捕)되었다고 하니, 의심할 자취가 없는 듯하다. 석방(釋放)함이 좋겠다."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신이 호서(湖西)에 대죄(待罪)하였을 때에 도내(道內)의 곡식을 다른 도에 옮기지 말고 본도(本道)에 남겨두어 진제(賑濟)할 비용으로 하자고 장문(狀聞)하였었습니다. 무릇 진휼(賑恤)하는 일은 반드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도내에서 마련하도록 하고 달리 변통(變通)하지 않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이 신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도내에서 진휼할 비용을 마련하고, 감히 조정(朝廷)에 청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지금의 급무는 비용을 억제하고 절약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것 만한 것이 없는데, 군포(軍布)가 백성들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이 됩니다. 마땅히 재해(災害)를 입은 천심(淺深)을 헤아려 등급을 나누어 감면시켜줌으로써 눈앞의 급한 일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장차 토붕와해(土崩瓦解)의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 버리면 아무리 구제하려 해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마땅히 선후(善後)의 대책을 미리 강구하고 때에 맞추어 크게 변통한 후에야 나라와 백성이 보전될 것입니다."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양민(良民)이 도둑으로 변하는 것은 전적으로 양포(良布)의 침징(侵徵)에 연유합니다. 어떤 이는 공사(公私)의 천역(賤役)에 투탁(投托)하고 어떤 이는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버리니, 만약 변통하지 않는다면 양민들은 장차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의 조(租)·용(庸)·조(調)572) 는 가장 양법(良法)이었는데, 우리 나라는 사람을 수탈(收奪)하여 사람을 기르고 사람이 사람을 먹였기 때문에 폐단이 고습도치 털처럼 일어난 것입니다. 일찍이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였으나, 좋은 방책이 없어서 임시로 혁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역은 끝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되고 말 것이니, 마땅히 조용히 강구(講究)하여 이제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호포(戶布)와 결포(結布)를 백년 전부터 시행했으나 폐단이 없었는데, 어찌 유독 오늘날에는 시행할 수 없겠습니까?"

하니,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국력(國力)으로 말하자면 양병(養兵)이 끝내 너무 많은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장계하기를, ‘만약 범월(犯越)하는 변고가 있게 되면 심양장(瀋陽將)이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만윤(灣尹)으로 하여금 치통(馳通)하여 그 주문을 물은 후에 우리가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했는데, 안핵사(按覈使)는 즉시 자문을 보내기를 청하였다."

하니, 심 수현이 말하기를,

"봉성(鳳城)에 먼저 치통한다는 논의는 마땅한지 알 수 없습니다. 어사(御史)의 사장(査狀)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사행(使行)이 강을 건너기 전에 자문을 내려 보내되, 심양에 도착한 뒤 탐문(探問)해서 만일 난처(難處)한 단서가 없으면 곧장 예부(禮部)에 올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지레 치통하여 저들로 하여금 미리 알게 한다면 뜻밖의 사단(事端)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매,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두 나라 국경에 만일 일이 생기면 심양장(瀋陽將)도 또한 죄가 있게 되므로 매우 두려워하고 꺼린다 합니다. 그리고 저들 가운데 명출(明出)과 흑출(黑出)이란 이름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른바 명출은 황표(皇標)를 소지한 자들이고 흑출은 잠상(潛商)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명출은 범(犯)할 수 없으나, 흑출은 비록 많이 죽인다 해도 해가 없는데, 지금 저들이 이 일을 흑출로 돌리려 한다고 합니다."

하고, 서명균이 또 말하기를,

"해흥군(海興君) 강(橿)이 난데없이 빈청(賓廳)에 와서 대신(大臣)의 자리에 앉았으므로, 신(臣)이 ‘하리(下吏)가 잘 인도하지 못했다.’고 하여 종친부(宗親府)의 서리(書吏)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우인 해춘군(海春君)이 도리어 정부(政府)의 서리들을 가두었습니다. 이 일은 비록 나이 어린 종반(宗班)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한 소치라 해도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하자, 심수현이 말하기를,

"빈청은 대신(大臣)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물며 대신에 소속된 서리들을 어찌 잡아 가둘 수 있었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子)와 대군(大君)은 대신과 절석(絶席)하고 1품의 종신(宗臣)은 대신과 항례(抗禮)573) 한다. 빈청은 비록 다른 사람이 감히 들어갈 수 없다고 하나, 내가 잠저(潛邸)에 있었을 때 빈청에 앉아 선온(宣醞)을 받았다. 또 종친부(宗親府)는 백사(百司)의 우두머리가 되어 왕자나 대군이 아니면 제조(提調)가 될 수 없었다. 지금은 먼 종친이 제조가 되었기 때문에 외조(外朝)에서 가볍게 보이지만, 사람을 가둘 수 있는 패(牌)는 왕자와 대군이 쓰는 것이다. 해흥군이 와서 대신의 자리에 앉은 것은 진실로 매우 농동(儱侗)하다. 겸종(傔從)을 가두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서리는 곧장 가둘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서명균이 말하기를,

"종친부는 진실로 소중한 바가 있지만 정부(政府)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자별하니, 결코 그 서리를 가둘 수는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러한가? 종친이 근래에 피연(疲軟)하기 때문이다."

하자, 서명균이 말하기를,

"더욱이 반행(班行)의 종반(宗班)이라 할지라도 혹 완홀(緩忽)한 일이 있으면, 정부에서 으레 마땅히 검칙(檢飭)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종친부는 정부에서 간섭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정언(正言) 조진세(趙鎭世)가 전계(傳啓)를 마치고, 이어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지위가 백료(百僚)의 위에 있어 체모(體貌)가 자별한데, 종반(宗班)이 대신에게 노하여 하리(下吏)를 가두어 다스렸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이와 같다면 대신이 어떻게 백규(百揆)를 총괄하고 체통(體統)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경책(警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는 말하기를,

"대신을 공경하는 것은 국체(國體)를 높이는 바이며 종친부도 존중(尊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왕자나 대군이라면 논할 것이 없으나, 2품 종반(宗班)일 경우 곧바로 정부의 서리를 가둘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개연(慨然)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큰 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박문수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너희들이 내가 왕자로 들어와 이 자리를 이었다고 가벼이 여기기 때문에 종친부를 멸시(蔑視)하느냐?"

하고, 안상(案床)을 치며 오열(嗚咽)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허둥지둥 물러났다.

사신은 말한다.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염폐(簾陛)가 능이(凌夷)하고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2품의 먼 종친이 곧바로 정부의 서리를 가두었으니, 박문수의 말은 체모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상(聖上)께서는 마땅히 화내지 않아야 할 말에 격노(激怒)하여 군부(君父)를 가볍게 업신여긴 것으로 책망하였다. 아! 대신(大臣)을 중히 여기는 것은 군부를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인데, 사령(辭令)의 잘못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였으니, 어찌 그 궐실(闕失)을 광구(匡救)하여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지경에 인도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87면
  • 【분류】
    사법(司法) / 왕실-종친(宗親) / 출판-서책(書冊)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역사(歷史) / 변란(變亂)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外交) / 무역(貿易) / 상업(商業)

  • [註 572]
    조(租)·용(庸)·조(調) : 당대(唐代)의 세 가지 징세법. 토지에 부과하는 조(租), 백성에게 부역을 시키는 용(庸), 가업(家業)에 부과하는 조(調)임.
  • [註 573]
    항례(抗禮) : 대등(對等)한 예(禮).

○壬午/鞫廳大臣以下求對入侍, 上引見于熙政堂。 領議政沈壽賢曰: "罪人依判付, 施威嚴問, 則與初招無變辭, 而違端甚多。 然其在鞫體, 不可不拿來所援告者, 問其虛實矣。" 上曰: "若得眞箇掛書人, 則好矣, 不然則徒騷擾而已。 今又發捕, 豈不可悶乎?" 壽賢曰: "渠言與高萬齡之婢知面, 故得聞某某人姓名及來會於萬齡家之說云, 厥婢今若拿來, 則可知其虛實矣。" 上詢諸臣, 皆言當逮捕。 壽賢曰: "其招又言: ‘高萬齡掛書於南原, 金南繹掛書於順天, 而渠與鄭齊仁相逢於路上, 躡往萬齡家, 竊聽其謀議。’ 云, 此三人宜先發捕矣。" 上曰: "萬齡南繹齊仁萬齡婢子竝發捕, 其餘令本道拿囚, 以待結末。" 上問大臣曰: "昨聞儒臣言, 沿海有盜, 至斬虞候將校云, 誠非細慮。 卿等聞之否?" 壽賢曰: "臣未及聞。 誠有是也, 道臣豈不狀聞乎?" 上曰: "向者李匡德言: ‘虞候行裝, 爲賊徒所掠。’ 云而道臣不以聞之矣。" 壽賢曰: "此等事傳說, 多增衍矣。" 上以問訓將張鵬翼, 對曰: "臣聞此事, 卽遣詗探矣。 歸言: ‘有人遇賊, 傷於鋒刃而死, 非譏察將校也。’ 蓋傳者之訛也。" 因言: "罪人法欽合坐, 究問以處雄書中駱賓王金時習等語, 法欽書中亦有秋菊、春蘭各有節之語, 似有隱情, 終不直招矣。" 上取覽處雄法欽書, 敎曰: "此不必深意也。 渠聞拿來之報, 自山寺下來兵營就捕云, 似無可疑之跡。 放送可也。" 壽賢曰: "臣待罪湖西, 以道內之粟, 勿移他道, 而留作本道賑濟之資狀聞矣。 凡賑事, 必令道臣自道內辦得, 不爲變通宜矣。" 戶曹判書宋寅明曰: "趙顯命抵書於臣, 謂自道內辦賑資, 而不敢請於朝廷云矣。" 靈城君 朴文秀曰: "當今急務, 莫如撙節經用, 以惠飢民, 而軍布最爲生民難支之弊。 宜量致災之淺深, 分等蠲減, 以寬目前之急。 不然則今日明日, 將有土崩之患。 大勢旣傾, 雖欲救之, 其可得乎? 亦宜預講善後之策, 及時大變通, 然後民國可保矣。" 壽賢曰: "赤子之化龍蛇, 專由於良布之侵徵。 或投托於公私賤, 或散而之四, 若不變通, 良民將無孑遺矣。 古之租庸調, 最是良法, 而我國則割人養人, 以人食人, 故弊端蝟興。 曾設良役廳, 而終無善策, 權罷之。 然良役終爲亡國之根, 宜從容講究, 及今變通矣。" 寅明曰: "戶布、結布百年前行之無弊, 何獨不可行於今日乎?" 命均曰: "以國力言之, 養兵終似太多矣。" 上曰: "關西道臣狀啓以爲: ‘若有犯越之變, 則瀋陽將不得不奏聞矣。 先使灣尹馳通, 問其奏聞, 然後自我移咨爲宜。’ 按覈使則請卽移咨矣。" 壽賢曰: "先通鳳城之論, 未見其當矣。 待御史査狀來, 下送咨文於使行未渡江前, 俾到探問, 如無難處之端, 則直呈禮部可也。 今若徑先馳通, 使彼預知, 則恐有意外事端矣。" 上可之。 命均曰: "兩境若或生事, 則瀋陽將亦有罪, 故甚爲畏忌云, 而彼中聞有明出、黑出之名, 所謂明出, 卽持皇標者也, 黑出謂潛商也。 明出者不可犯, 黑出者雖多殺無害, 而卽今彼人, 欲歸此事於黑出云矣。" 命均又言: "海興君 橿忽來賓廳, 坐於大臣座。 故臣以下吏不善導, 捉囚宗親府書吏矣, 其弟海春君反囚政府書吏。 此雖年少宗班, 不識事體之致, 實是前所無之事也。" 壽賢曰: "賓廳非大臣, 則不得入處。 況大臣屬吏, 何可執囚乎?" 上曰: "王子大君與大臣絶席, 一品宗臣與大臣抗禮。 賓廳雖稱他人不敢入, 予在潛邸時, 坐於賓廳, 而受宣醞矣。 且宗親府爲百司之首, 非王子大君不得爲提調。 今則遠宗爲之, 故外朝輕視之, 然其囚人之牌, 卽王子大君所用也。 海興之來坐大臣座, 誠甚儱侗。 囚其傔從猶可也, 書吏則不可直囚矣。" 命均曰: "宗親府固有所重, 而至於政府, 事體尤別, 決不可囚其吏矣。" 上曰: "豈其然乎? 宗親近來疲軟故也。" 命均曰: "況於班行宗班, 或有緩忽事, 則政府例當檢飭矣。" 上曰: "不然。 宗府非政府之所干也。" 正言趙鎭世傳啓訖, 仍言: "大臣位在百僚之上, 體貌自別, 宗班發怒於大臣, 囚治下吏, 此實無前之事。 如是則大臣何以摠百揆, 尊體統乎? 宜有警責。" 靈城君 朴文秀曰: "敬大臣, 所以尊國體也。 宗親府非不尊重, 若有王子大君則無可論也, 二品宗班, 其可直囚政府吏乎? 臣不勝慨然矣。" 上震怒厲聲曰: "朴文秀從重推考。 爾輩謂予以王子, 入承此位而輕之, 故蔑視宗親府耶?。" 仍拍案嗚咽, 諸臣震悚蒼黃屛退。

【史臣曰: 臣謹按, 簾陛陵夷, 紀綱解紐, 二品遠宗, 直囚政府吏, 朴文秀之言, 可謂得體, 而聖上激怒於不當怒之言, 責之以輕侮君父, 噫! 重大臣乃所以尊君父也。 辭令之失, 一至於此, 而入侍諸臣, 莫敢一言, 尙何望匡救闕失, 納吾君於無過之地乎?"】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87면
  • 【분류】
    사법(司法) / 왕실-종친(宗親) / 출판-서책(書冊)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역사(歷史) / 변란(變亂)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外交) / 무역(貿易) / 상업(商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