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관 조명겸이 이양신에 대한 변론을 상소. 오원이 북도 개시의 철폐에 대해 논의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이양신(李亮臣)이 중신(重臣) 송인명(宋寅明)과 더불어 소하(疏下) 오적(五賊)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입시(入侍)하여 계달(啓達)한 바는 대개 숨김 없는 정성에서 나왔으며, 지친(至親)의 음사(陰私)를 들추어 내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기유년557) 에 주달(奏達)했던 것도 또한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으나, 말이 그 의견(意見)을 조리(條理) 있게 밝히지 못하여 성명(聖明)의 아래에 저지당했던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양신이 처음에는 송인명이 동궁(東宮)을 저버렸다고 하였다가, 후에는 공로(功勞)가 있다고 하였으니, 전후의 말이 어찌 어긋나지 않았는가?"
하였다. 지사(知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양신이 저번에 진달(陳達)한 것은 곧 신과 평일에 수작(酬酌)했던 말들입니다. 전하께서 전후에 혹은 헐뜯고 혹은 찬양했다고 이양신을 의심하시니, 지극히 억울합니다. 신은 그 본정(本情)을 환히 알고 있었지만 신의 지친(至親)이 되므로, 단지 아픔을 숨기고 있다가 이제 언단(言端)으로 인하여 감히 진달(陳達)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조명겸이 말하기를,
"이양신은 사람됨이 어질다고 한다면 옳겠지만 소인(小人)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정이 아니며, 폐고(廢錮)된 지 이미 5년이 되었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 아비 이희조(李喜朝)가 남쪽에 찬배(竄配)되었다가, 북쪽으로 귀양가서 마침내 길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양신은 슬픈 감상(感傷)이 뼈에 사무쳐 혹 격렬한 바가 있으나, 의견은 준론(峻論)이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호판(戶判)의 말을 듣건대, 대체(大體)는 그렇지만 논의(論議)가 있어 온 이래로 같은 집안 안에서 무기를 들고 서로 다투어 왔다. 내가 이양신을 치우치게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조관빈(趙觀彬)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그 고통스럽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은 사정(私情)에 있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임 사화(辛壬士禍)558) 의 일을 매번 그 당시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으나 그 결말은 군상(君上)에게 있으니, 분의(分義)로 헤아려 보건대, 어떻게 오늘날에 입 밖에 낼수 있겠는가? 진실로 경종조(景宗朝)에 억울함을 하소연했다면 가(可)하겠지만, 오늘날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은 크게 불가(不可)한 것이다. 회맹제(會盟祭)559) 때 경은 봉혈(奉血)하지 않았는가? 나는 숟가락으로 삽혈(歃血)560) 하였으나 회맹(會盟)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경묘(景廟)를 따라서 갔었는데, 경은 그래도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양신의 처지는 진실로 조관빈·이희조를 당시에 찬적(竄謫)했던 것도 또한 각박하다고 하였는데, 이양신이 어떻게 준론(峻論)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 양신으로 하여금 옛 마음을 통렬히 버리게 한다면, 비록 개석(開釋)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신이 작년에 북경(北京)에 갔을 때 듣건대, 통관(通官)의 무리가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개시(開市)를 너희 나라에서 혁파(革罷)하고자 한다면 대국(大國)에서도 마땅히 이를 혁파할 것이다. 대개 개시에서 농기(農器)와 소금을 무역하였는데, 지금 영고탑(寧古塔)에서 그릇을 주조(鑄造)하고 소금도 굽고 있으니, 호시(互市)는 매우 긴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제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었을 때 듣건대, 개시의 폐해가 한없이 많아서 육진(六鎭)의 백성이 모두 매우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함경도(咸鏡道)는 온 도가 고루 그 폐해를 받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개시(開市)를 혁파(革罷)한다면, 북민(北民)이 지탱하여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합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 하문(下問)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개시의 폐단은 나도 또한 이를 알고 있다. 지금 김시유(金是瑜)의 수본(手本)에도 개시를 혁파하려면 혁파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시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또 이두(利竇)561) 가 되면 지금 비록 혁파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폐단이 생길 것이니, 옛날 그대로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연신(筵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에게 그 편부(便否)를 물으니, 송진명이 말하기를,
"회령(會寧)의 개시는 북관(北關)의 물화(物貨)가 전부 이곳에 나오므로 이익이 진실로 크지만, 경원(慶源)의 개시에 이르러서는 육진(六鎭)에서 낭비하는 것이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이를 고통스러워 한다고 합니다."
"두 나라 사이에 어떻게 호시(互市)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한 역관이 신에게 와서 말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개시를 혁파한다면 이익이 역관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물러갔습니다. 이는 바로 역관의 무리가 간계(奸計)를 쓰는 소치이니, 피인(彼人)이 비록 혁파할 것을 청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85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가족(家族) / 신분-중인(中人) / 정론(政論) / 인물(人物) / 외교(外交) / 무역(貿易) / 상업(商業)
- [註 557]기유년 : 1729 영조 5년.
- [註 558]
신임 사화(辛壬士禍) : 경종(景宗) 원년[辛丑年]·2년[壬寅年]에 일어난 사화(士禍), 소론(少論)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의 무고(誣告)로 노론(老論)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이 사사(賜死)되었음.- [註 559]
회맹제(會盟祭) : 임금이 공신(功臣)들과 희생(犧牲)을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피를 서로 나누어 빨며 단결을 맹세하던 일.- [註 560]
삽혈(歃血) : 굳은 언약을 다질 때에 그 표시로 짐승의 피를 서로 나누어 먹거나 입가에 바르는 일.- [註 561]
이두(利竇) : 이익이 생길만한 구멍.○行晝講。 檢討官趙明謙曰: "李亮臣與重臣宋寅明言及疏下五賊事, 入侍所達, 蓋出無隱之忱, 非爲訐揚至親之意。 己酉所奏, 亦出衷曲, 而辭不達意, 見阻於聖明之下矣。" 上曰: "亮臣初則以宋寅明爲負東宮, 後則以爲有功, 前後之言, 豈非逕庭乎?。" 知事宋寅明曰: "亮臣向來所達, 卽與臣平日酬酢之言。 殿下以前後抑揚, 疑之亮臣極冤矣。 臣則洞知其本情, 而爲臣至親, 故只自隱痛, 今因言端, 敢達矣。" 明謙曰: "亮臣爲人, 謂之慈良則可矣, 謂之小人則非其情。 廢枳已五年矣。" 寅明曰: "其父喜朝南竄北謫, 終死於道路。 故亮臣刻骨痛傷, 或有所激, 而意見非峻論矣。" 上曰: "今聞戶判言, 大體則然矣。 自有論議以來, 同室之內, 干戈相尋。 予非偏惡於亮臣, 以趙觀彬事言之, 其疾痛呼冤, 在其私情, 不是異事。 辛壬之事, 每歸於其時在下之人, 然其結梢則在於君上。 揆以分義, 豈於今日而發諸口乎? 苟訟冤於景廟朝則可也, 今日訟冤, 大不可矣。 會盟祭時, 卿不爲奉血乎? 予則以匙歃血, 非參於會盟也, 乃隨景廟而往, 卿猶不知予心矣。 亮臣處地, 實如觀彬、喜朝之當時竄謫, 亦云刻薄, 亮臣豈不爲峻論乎? 使亮臣痛祛舊心, 則雖不開釋, 自然消融矣。" 檢討官吳瑗曰: "臣於昨年往北京, 聞通官輩言于譯官曰: ‘北道開市, 爾國若欲罷, 則大國亦當罷之。 蓋開市爲貿農器及鹽, 而今寧古塔能鑄器煮鹽, 互市不甚關緊。’ 云。 今於補外時, 聞開市之弊, 罔有紀極。 非但六鎭之民皆倒懸, 咸鏡一道均受其弊, 人皆言罷市, 則北民可以支保云。 請詢于廟堂焉。" 上曰: "開市之弊, 予亦知之。 今金是瑜手本, 亦有開市欲罷, 則可罷之語。 然行之已久, 且爲利竇則今雖革罷, 必生他弊, 莫如仍舊矣。" 上復問便否於筵臣備堂, 宋眞明曰: "會寧開市, 則北關物貸, 全出於此所, 益固大而至於慶源, 則六鎭之浮費甚多, 民皆苦之云矣。" 靈城君 朴文秀曰: "兩國之間, 何可無互市耶? 有一譯官, 來言于臣, 臣答以罷開市, 則利歸於譯官矣, 其人赧然而退。 此是譯官輩從中用奸之致, 彼雖請罷, 決不可許矣。"
- 【태백산사고본】 27책 3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85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가족(家族) / 신분-중인(中人) / 정론(政論) / 인물(人物) / 외교(外交) / 무역(貿易) / 상업(商業)
- [註 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