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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35권, 영조 9년 9월 10일 무자 2번째기사 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헌릉을 전알하다

임금이 헌릉(獻陵)을 전알(展謁)하였다. 묘시(卯時) 초3각(刻)에 소여(小輿)를 타고 인정전(仁政殿)을 나와 인정문 밖에 이르러 말을 탔고,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교(駕轎)를 탔다. 사시(巳時) 광진(廣津)주정소(晝停所)499) 에 이르니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가 지영(祗迎)하였으므로, 임금이 불러 보았다. 인하여 배 위의 장전(帳殿)에 올랐고, 이미 건너서는 다시 교자(轎子)를 탔으며 안향청(安香廳)에 이르러 천담복(淺淡服)으로 갈아입었다.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려 할 즈음에 좌상(左相)과 우상(右相) 및 약방 제조(藥房提調)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홍살문에 들어가 망릉례(望陵禮)를 행하고, 걸어서 능소 위로 나아가 봉심하고는 내계(內階) 위에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갑술년500) 에 행행(幸行)하신 뒤로 이제 40여 년이 되었는데, 어찌 내가 거듭 오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갑술년은 바로 내가 태어난 해니, 옛날의 감회가 절로 갑절이나 된다."

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전부터 이 능소에 행행하려고 하면 번번이 사고가 있었습니다. 숙종께서 비로소 행행하셨고 이제 성상께서 또 전알하셨으니 효성(孝誠)이 더욱 빛이 납니다."

하고, 도승지 윤양래(尹陽來)가 말하기를,

"효종조(孝宗朝)에도 일찍이 행행하려 하였으나, 칙사(勅使)의 행사와 상치되어 중지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전의 일을 비록 알지는 못하나 세종조(世宗朝) 이후로는 행행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서쪽을 따라 북쪽으로 해서 도로 남쪽 뜰에 이르렀고 비각(碑閣)으로 내려가 각문(閣門) 안에 머물고는 새로 세운 비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갑술년에 행행하신 뒤로 곧 이 비석을 세운 것인가?"

하니, 윤순이 말하기를,

"임진년501) 난리가 난 뒤로 옛날의 비석이 파손되었는데 갑술년 행행 때에 매안(埋安)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 옛날의 비석은 전과 같이 두고 다시 그 옆에 새로 비석을 세워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면(下面)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숙종조 때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걸어서 홍살문 안에 이르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는 소여(小輿)를 타고 재실(齋室)에 이르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7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註 499]
    주정소(晝停所) : 임금이 거둥 중에 잠시 머물러 낮 수라(水剌)를 드는 곳.
  • [註 500]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501]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上展謁獻陵。 卯初三刻乘小輿, 出仁政殿, 至仁政門外, 御馬至興仁門外, 始駕轎。 巳時至廣津晝停所, 奉朝賀李光佐祗迎, 上召見之。 仍御船上帳殿, 旣渡復御轎, 至安香廳, 改具淺淡服。 將奉審陵寢, 命左右相及藥房提調從之。 上入紅箭門, 行望陵禮, 步詣陵上奉審, 至內階上。 上曰: "甲戌幸行後, 至今四十餘年, 豈意予之重來也? 甲戌是予生年, 感舊之懷, 自倍矣。" 副提調尹淳曰: "自前如欲幸行此陵, 則輒有事故。 肅廟始爲幸行, 今聖上又爲展謁, 誠孝益光矣。" 都承旨尹陽來曰: "孝宗朝嘗欲行之, 而以勑行相値中止矣。" 上曰: "其前雖不可知, 世宗朝後, 不爲幸行明矣。" 上仍循西而北, 還至南階, 降詣碑閣, 次于閣門內, 指新建碑曰: "甲戌幸行後, 仍建此碑耶?" 曰: "壬辰亂後, 舊碑傷缺, 而甲戌幸行時, 以埋安爲未安, 舊碑仍前置之, 復建新碑於其傍, 以記事實。 下面所載錄者, 肅廟朝人也。" 上步至紅箭門內, 行四拜禮, 乘小輿至齋室。


  •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7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