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작통편》을 강하고 탕평의 일, 민형수의 상소 및 의에 대해 논의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講)했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문의(文義)로 인해 아뢰기를,
"〈송(宋)나라〉 영종(寧宗)이 처음에 주자(朱子)를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토록 했는데, 주자가 임금을 도와 잘 다스리게 하려고 일에 따라 규계(規戒)하고 권면하여 숨기는 바가 없자, 영종이 ‘강관(講官)을 설치한 것은 단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매사에 간여하는가?’ 하고, 이로 인해 궁관(宮觀)을 주고 그 보좌하여 인도하는 것을 책임지워 그 규계하고 권면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니, 이는 후세에 끼친 한(恨)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명겸이 또 말하기를,
"전하의 근래 처분은 중도(中道)에 넘는 지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삼사(三司)의 소장(疏章)에 이르러서는 비답없이 도로 내어 주셨으니, 더욱 지나치며, 크고 작은 소장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성의(聖意)에 부합되지 않으면 곧 도로 다 내리십니다. 대개 조종조(祖宗朝)의 한 마디의 말과 한 행동은 후세의 법이 됩니다. 전하의 자손 가운데 어찌 혼란(昏亂)한 군주(君主)가 없을 줄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혹 그 법도를 무시하고 그 덕(德)을 어지럽혀 삼사(三司)의 진계(陳戒)를 듣기 싫어하여 문득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비답을 내리지 않은 일이 있었다.’하며 일체 모두 물리친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자가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이는 참으로 아는 것이 못된다. 과연 참으로 안다면 행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행하여진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언로가 막히는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단서가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연중(筵中)에서 ‘비답없이 도로 내주는 것이 나로부터 열린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전하께서 알고도 고의로 하신다면 그 해는 도리어 모르는 것보다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기뻐하고 추구(推究)해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였다. 내가 참으로 알지 못하고 이런 일을 즐겨 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전하의 이번 처분은 중도에 지나쳐 너무나 놀란 나머지 감히 들을 수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분부가 많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위엄과 벌로 억제하고자 하시나 무릇 신하를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그 마음을 감화시킨 뒤에야 하시려고 하는 정치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니, 위엄과 벌로 억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윤득화(尹得和)·오원(吳瑗)은 자신이 숙직(宿直) 중에 있으면서 예사롭지 아니하게 지나친 거조를 목도하였으니,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다투어 논한 것은 곧 그의 직책입니다. 만약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옛날 세종조(世宗朝)에 한 간신(諫臣)을 죄주었는데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가 사람을 시켜 대청(臺廳)을 헐었습니다. 세종께서 그 까닭을 물으시자, 황희가 대답하기를, ‘대각(臺閣)을 둔 것은 장차 그들이 말한 것을 쓰고자 해서인데 이제 말한 것으로 인해 죄를 얻었으니, 대청은 쓸데가 없습니다. 때문에 신이 과연 헐었던 것입니다.’ 하니, 세종께서 태도를 고쳐 가납하고 그 대신(臺臣)을 발탁해 썼습니다. 그리고 효종조(孝宗朝)에도 대사헌 유철(兪㯙)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일로써 크게 저촉된 것이 있었으므로 전정(殿庭)에서 친국(親鞫)하면서 하교하시기를, ‘감히 유철을 두호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죄줄 것이다.’ 하였으나, 사간(司諫) 윤집(尹鏶)이 홀로 대각(臺閣)에 나아가 곧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습니다. 효종께서 비록 따르지는 않으셨으나 며칠 뒤 윤집을 발탁하여 대사간으로 삼았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언로(言路)를 열어 인도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누가 분발하고 격동(激動)하여 말을 다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격려 권장하는 방도가 있음을 듣지 못하고 다만 꺾어버리는 것만 일삼아 왔습니다. 지난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세 유신(儒臣)이 서로 잇따라 멀리 쫓겨났으니,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라고 할 만한데도 한 사람의 대신(臺臣)도 도로 거두라는 계사(啓辭)를 발론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에 있어서 언로란 사람에게 핏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핏줄이 끊기면 사람은 반드시 죽고 언로가 끊기면 나라는 망합니다. 지금 위망(危亡)의 조짐이 하나만이 아닌데, 언로의 막힘은 반드시 망할 조짐입니다.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되면 전하께서 훗날 무슨 면목으로 열성(列聖)을 돌아가 배알(拜謁)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유년411) 폐합(閉閤)된 뒤에도 여전히 옛날 습관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말을 처음 꺼내게 되었다. 그리고 19일 하교에 이미 말하기를, ‘여러 당(黨)에서 모두 난역(亂逆)이 있다. 먼동이 틀 무렵 이후로 다시 이 일을 제기하는 자는 오늘의 신하가 아니다.’고 하였다. 유신(儒臣)의 입장에서 본다면 민형수(閔亨洙)의 말이 지나친가 지나치지 않은가? 19일 하교를 들은 뒤로 옥당(玉堂)에서는 영호(營護)하지 않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오원이 만약 위로 현종(顯宗)을 생각하고 아래로 과궁(寡躬)을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당론(黨論)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만약 오원이 아니었다면 글을 엮은 것이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외방에 보직(補職)하는 벌은 그에게는 상이지 벌이 아니다. 이른바 ‘성무(聖誣)’란 것은 갑진년412) 즉위한 뒤로는 다시 제기해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성무를 칭탁하고 저쪽과 이쪽에서 서로간에 언쟁(言爭)을 하다가 무신년413) 의 변란(變亂)을 빚어냈으니, 또 어찌 다시 오늘날에 제기할 수 있겠는가?"
하니, 조명겸이 말하기를,
"민형수가 무단히 소란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한 장의 상소가 도리어 부도(不道)하다는 지목을 받았으니, 그가 과연 태연히 감수한다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설왕설래하다가 스스로 근원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니, 이는 바람이 없는데 물결이 일어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민형수가 만약 곧바로 진소(陳疏)하였다면 단지 천극(栫棘)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사직소를 핑계로 이처럼 끌어대었으니, 더욱 교묘하고 치밀한 일이었다. 민형수가 다시 제기하는 것이 불가한 것인 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뜻이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쫓아버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너무 세밀히 살피시는 것이 사실 병통이 됩니다. 민형수가 사직(辭職)한다는 명목으로 진소(陳疏)하였으니 전하께서 다만 사직하는 것이라고 하시면 옳을 것인데, 어떻게 억지로 실정 밖의 명목을 더하여 곧 교묘하고 또 치밀하다고 하십니까? 오원이 민형수를 구호(救護)한 것은 전하를 저버린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박대(薄待)하여 규례(規例)에 따라 진언(進言)한 것에도 또한 위벌(威罰)을 가하시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삼사(三司)를 사지(死地)와 같이 회피(回避)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길하고 상스러운 좋은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성미가 몹시 괄괄하다. 그 ‘법도를 무너뜨리고 그 덕을 어지럽혔으니, 무슨 얼굴로 돌아가서 선조를 배알하겠는가?’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지나치다. 이것이 곤궐(袞闕)414) 을 보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내가 어찌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것은 내가 이미 밝게 알고서 말한 것이다. 만약 과연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위하는 데서 오로지 나왔다면 옳다 하겠지만 건저(建儲)니 대리(代理)니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면서 변명하니 듣기가 괴롭다. 그때 만약 사세(事勢)를 알았다면 의당 정청(庭請)을 설행(設行)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조태구(趙泰耉)를 따라 같이 들어가서 번거롭게 사죄(謝罪)하고 도로 작환(繳還)했던가? 세종(世宗)을 책립(冊立)한 뒤에 곧바로 어보(御寶)를 보냈으니, 이는 부자간(父子間)이므로 오히려 혐의할 것이 없어서 마침내 무사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건저(建儲)한 뒤로 해괴한 말이 많이 있었다. 근본이 이미 어긋났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더욱 격렬해져 점차 깊은 데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대개 할 만한 일이라면 대신이 마땅히 곧 해야 할 것이니, 당당한 도리라면 어찌 내가 응하고 불응하는 것을 기다려서 하겠으며, 19일 하교에 이미 다 효유(曉諭)하였는데 무슨 다시 할 말이 있겠는가? 경신년415) 이후로 각각 명목(名目)을 둔 것은 대개 방례(邦禮)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누가 옳은지 알지 못하겠으나 그 뒤로 기사년416) ·갑술년417) 에 이르러 처분이 지극히 엄하였는데, 병신년418) 이후로 또 별다른 논란이 생겨 점점 더 괴격(乖激)한 데 이르게 되었다. 이만유(李萬維)의 무리와 같은 경우는 내가 용서할 수 없어 지난번에 이미 처분하였다. 19일 이후로는 두 개의 글자를 마음속에 두지 않았으나 오히려 내 말을 믿지 않으니, 고금(古今)에 어찌 이러한 세계(世界)가 있단 말인가? 지난번 김유경(金有慶)의 처분이나 오늘 민형수의 찬배(竄配)는 또한 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만한데 과중(過中)하다고 하니, 과연 옳겠는가? 저번 이광세(李匡世)나 김상규(金尙奎)가 말한 것도 또한 지나치다. 지금부터 만약 네 신하의 일을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국문(鞫問)할 것이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19일 하교는 저쪽이나 이쪽의 신료(臣僚)들의 당고(黨錮)의 마음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송인명(宋寅明)이 ‘이광세(李匡世)의 상소 가운데 귀착(歸着)된 바가 있다고 하신 것은 한 사람을 지칭한 말입니다.’ 하니, 전하께서 ‘한 사람은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한쪽편 사람들은 이 분부를 듣고부터 기화(奇貨)나 얻은 양 능멸(凌蔑)을 가하려고 했으니, 어찌 이 때문에 남의 능멸을 받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세의 말은 진실로 지나치기는 하다. 하지만 또한 어찌 문자(文字) 때문에 죄주겠는가? 이광세가 아무리 이와 같더라도 아울러 이 봉조하(李奉朝賀)를 배척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네 신하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하여는 민 봉조하(閔奉朝賀)가 오히려 말하기를 ‘1백 사람으로서 그 신분(身分)을 보증한다.’고 하였다."
하니, 참찬관(參贊官) 이성룡(李聖龍)이 말하기를,
"민진원의 심사(心事)를 전하께서 여전히 다 살피지 못하고 계십니다. 평생에 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이 있을 뿐이니 반드시 죽은 자를 위하여 전하께 속여서 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명겸이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늘 하나의 ‘의(疑)’자를 성심(聖心)에 두시니, 비록 관계없는 일일지라도 곧 의심하고 믿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그 도끼를 잃고 그 이웃 늙은이를 의심하였는데 이웃 늙은이를 보면 앉아 있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고 서 있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더니, 얼마 후 방안에서 도끼를 찾고 나서 또 이웃 늙은이를 보았는데 앉아 있어도 도끼를 움치지 않은 것 같고 서서 있어도 도끼를 훔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하나의 ‘의(疑)’자를 마음에 두면 보이는 것이 분명하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에 유념(留念)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6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변란-정변(政變)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註 411]기유년 : 1729 영조 5년.
- [註 412]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註 413]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414]
곤궐(袞闕) : 임금의 과실.- [註 415]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416]
○行召對。 講《節酌通編》。 侍讀官趙明謙因文義奏曰: "寧宗初使朱子, 入侍講筵, 朱子欲致君爲治, 隨事規勉, 無所隱諱。 寧宗以爲設置講官, 只爲講學, 何可每事參預? 仍授宮官, 責其輔導, 而厭其規勉, 此爲後世遺恨。" 上然之。 明謙又曰: "殿下近來處分, 無非過中之擧, 而至於三司疏章, 無批還給, 尤爲過矣。 大小疏章, 少不合於聖意, 則輒皆還下。 蓋祖宗朝一言一動, 爲後世之法。 殿下子孫中, 安知無昏亂之主乎? 若或敗厥度亂厥德, 而厭聞三司之陳戒, 輒曰: ‘我祖宗亦有不賜批之擧。’ 一倂斥退, 則國其不亡乎? 朱子曰: ‘知而不行者, 是未眞知也。 果能眞知, 則不期行而行之。’ 殿下則非不知言路之閉塞, 爲亡國之端。 昨日筵中, 有無批還給自我啓之之敎, 則殿下知之而故爲之, 其害反甚於不知者。" 上曰: "孔子曰: ‘悅而不繹, 末如之何也。 予不是不能眞知, 而樂爲此也, 蓋出於不得已也。" 明謙曰: "殿下今番處分過中, 多有可驚可愕, 不敢聞不忍言之敎。 殿下雖欲以威罰鉗制, 然凡御下之道, 必感化其心, 然後可以贊從欲之治, 不可以威罰制之矣。 尹得和、吳瑗身在直中, 目覩非常過擧, 則陳箚爭論, 乃其職事。 若緘口不言, 是負殿下也。 昔世宗朝罪一諫臣, 翼成公 黃喜使人毁臺廳。 世宗問其故, 喜對曰: ‘有臺閣者, 將欲用其言, 而今以言獲罪, 無用臺廳。 故臣果毁之。’ 世宗改容嘉納, 擢用其臺臣。 孝宗朝大司憲兪㯙以麟坪大君事, 大有觸諱, 親鞫殿庭, 而下敎曰: ‘敢有救㯙者當罪之。’ 司諫尹鏶獨自詣臺, 直請還收。 孝廟雖不從, 數日後擢鏶爲大司諫。 列聖朝開導言路, 有如是者, 孰不奮發激起, 以思盡言乎? 殿下卽阼以來, 不聞有激勸之道, 只以摧折爲事。 以日昨事言之, 三儒臣相繼竄逐, 可謂無前過擧, 而不聞有一臺臣, 發還收之啓, 豈不慨然乎? 言路之於國家, 猶人之有血脈, 血脈絶則人必死, 言路絶則國必亡。 目今危亡之兆非一, 而言路之閉塞, 是爲必亡之兆。 國家將亡, 則殿下他日, 以何面目歸拜列聖乎?" 上曰: "己酉閉閤後, 猶不悛舊習, 故始發臣擇君之說, 而十九下敎旣曰: ‘諸黨俱有亂逆, 則昧爽以後, 更提此事者, 非今日臣子也。’ 自儒臣觀之, 閔亨洙之言, 過乎不過乎? 聞十九下敎後, 玉堂不當營護, 而吳瑗若上思顯廟, 下念寡躬, 豈敢爲黨論? 觀其箚辭, 若非吳瑗, 不能綴文如此矣。 補外之罰, 於渠賞也, 非罰也。 所謂聖誣, 甲辰嗣服後, 更不當提說, 而稱以聖誣, 於彼於此, 瓦相爲言, 釀成戊申變亂, 又何可更提於今日乎?" 明謙曰: "閔亨洙不是, 無端起鬧。 頃年一疏, 反被不道之目, 其果晏然甘受, 則將爲何如人耶? 說去說來, 自不得不劈破源頭, 此異於無風生浪。" 上曰: "十九下敎後, 閔亨洙若直爲陳疏, 則不但栫棘而止。 今托以辭疏, 如是攙及者, 尤極巧密。 閔亨洙非不知更提之爲不可, 而意在逐去李奉朝賀故也。" 明謙曰: "殿下太聰察, 實爲病痛。 閔亨洙以辭職陳疏, 則殿下但謂之辭職可也, 何可勒加以情外之目, 乃謂之巧且密乎? 吳瑗之救亨洙, 非負殿下也, 乃是不得已之事也。 殿下薄待言官, 循例進言, 亦加威罰, 在廷之臣, 避三司如死地。 此豈吉祥善事乎?" 上曰: "儒臣性甚傑驁, 至於敗厥度亂厥德, 何面歸拜之說, 誠過矣, 而此出於衮闕之補, 則予豈不寬容乎?" 上又曰: "十九下敎, 予旣明知而言之也。 若果專出於爲三宗血脈則可也, 而以建儲代理, 互相爭辨, 聽之苦矣。 其時若知事勢, 則當不設庭請, 豈可隨泰耉而同入, 僕僕謝罪而繳還乎? 世宗冊立之後, 直送御寶, 此則父子間猶無所嫌, 而畢竟無事矣。 今則自建儲以後, 多有怪駭之說。 根本旣誤, 故轉輾層激, 漸至於深入。 蓋可爲之事, 則大臣當直爲之者, 堂堂底道理, 何待予之應不應而爲之乎, 十九下敎, 已盡諭之, 有何更言者乎? 自庚申以後, 各有名目, 蓋自邦禮始矣。 予未知孰是, 其後至己巳、甲戌處分至嚴, 而丙申以後, 又生別論, 轉至乖激, 而如李萬維輩, 予不饒貸, 頃已處分矣。 十九以後兩箇字, 當不着肚裏, 而猶不信予言, 古今安有如許世界乎? 頃者金有慶之處分, 今日閔亨洙之竄配, 亦可謂不嚴, 而以爲過中者, 果是耶? 向來李匡世、金尙奎之言亦過矣。 從今以後, 若以四臣事, 復有言者, 則予當鞫問之矣。" 明謙曰: "十九日下敎, 欲使彼此臣僚, 消融黨錮之心也。 宋寅明以爲: ‘李匡世疏中, 以有所歸云者, 指一人而言也。’ 殿下答以一人指誰某乎? 一邊之人, 自聞此敎, 如得奇貨, 欲加凌藉, 豈可以此, 受人之凌藉乎?" 上曰: "李匡世之言, 誠過矣。 亦豈可以文字罪之乎? 李匡世雖如此, 不當竝斥李奉朝賀也。" 上又曰: "四臣中一人, 閔奉朝賀猶云: ‘百口保之。’" 參贊官李聖龍曰: "閔鎭遠心事, 殿下猶未盡燭。 平生只有愛君憂國之苦心、血誠, 必不爲死者, 瞞告殿下矣。" 明謙曰: "十九下敎之後, 若有言者, 則常以一疑字, 着在聖心, 雖是不干之事, 輒疑而不信。 古人有失其斧, 疑其隣翁, 及見隣翁, 則坐亦竊斧, 立亦竊斧, 厥後乃得斧於房中, 又見隣翁, 則坐亦非竊斧。 立亦非竊斧。 一疑字在心, 則所見之不明如此, 願殿下留心于玆。"
- 【태백산사고본】 26책 3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6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변란-정변(政變)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註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