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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 1월 19일 신축 4번째기사 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이광좌가 상소하니 민진원과 함께 들어오라 하여 밤중에 탕평의 일에 대해 하교하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도성(都城) 밖에 와서 상소하였다. 임금이 비답을 내려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과 함께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약방(藥房)에서도 같이 들어오게 하였는데, 시간이 벌써 밤 2경(二更)이 되었다. 임금이 좌우의 근신(近臣)을 물리치고 주서(注書)에게는 붓을 멈추고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사관(史官)에게만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경(卿) 등이 각각 겨울의 긴 밤과 같은 시대에 있은 지 오래 되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여 경 등을 꼭 오게 한 것은 진실로 마음먹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애통하다. 내가 말하려고 하면서도 말을 못한 것이 이제 몇 해나 되었던가? 나는 궁중(宮中)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세상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는데, 신축년034) 이후로 지극히 애통함을 가슴에 품고 있은 지 이제 13년이나 되었다. 지금 경 등을 보니 비록 각자가 의리라고 여기고 있으나 사실은 그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다면 다만 심기(心氣)만 상할 뿐이므로, 나라의 형편을 돌아볼 때 장차 어찌 할 방법이 없어 이제 자세히 말하는 것이니, 경 등은 조용히 들으라. 내가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말하려면 어찌 다만 두 경(卿)뿐이겠는가? 그것은 고집을 부리는 자가 경 등이기 때문에 일깨워 주려는 자도 경 등일 뿐이다. 아!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면 거의 마음에 맺힌 통한은 풀리겠지만 그것이 제갈양(諸葛亮)이 피를 토한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사실 어리석은 것이다. 시상(時象)의 근원과 사문(斯文)의 시비(是非)에 대해서는 나는 말하지 않겠다. 아! 경자년035) 국휼(國恤) 이후로 3백 년 동안 지켜오는 예의(禮義)가 아주 무너져서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고 신하가 신하 구실을 하는 의리가 점점 땅에 떨어져 밝혀지지 아니하였다. 노론(老論)은 스스로 나를 위한다고 하고, 소론(少論)은 스스로 무신년036) 의 추대한 사람을 위한다고 하고, 남인(南人)은 스스로 낙산(駱山)을 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색목(色目)에 든 사람이 다 역심(逆心)이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그것은 그중에 이익을 탐하는 효경(梟獍) 같은 무리가 한 짓인데, 경 등이 만약에 그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결코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제각기 무엇인가를 한다.’는 말은 다른 데서 들은 것이 아니고 서덕수(徐德修)에게 들은 것이다. 아! 신축년037) 부터는 내가 더욱 문을 닫고 들어앉아 방문객을 사절(謝絶)했는데 비록 전날 후하게 대하던 종신(宗臣)들이라도 번번이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서덕수는 평소부터 그들 부자(父子)의 사람됨이 달성(達城)038) 처럼 근신(謹身)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런 때 어찌 만나보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세상의 도의(道義)는 이를 두려워하면서 처족(妻族)을 소홀히 대하면 반드시 부부(夫婦) 사이가 화목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런 까닭으로 그가 열 번 오면 하는 수 없이 두세 번은 만나 보았다. 그러자 먼저 백망(白望)에게 부탁하여 나의 동정을 살피곤 하였는데, 백망은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을 알고 말하기를, ‘이것은 신자(臣子)로서 할 일이 못된다. 더구나 선왕(先王)의 혈속(血屬)이 지금 몇 사람이나 되는가? 이 무리들이 만약에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위하여 이런 계획을 세웠다면, 마땅히 충심으로 나라를 부지하면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내가 알게 하려고 하는가? 이는 이익만을 탐할 뿐 충성을 다하지 않는 무리이니, 너는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며 또한 드러내놓고 배척하지도 말아라. 그의 마음이 여기게 이르렀으니, 반드시 장차 나라 일을 그르치고 나를 해치고야 말 것이다. 그대는 되도록이면 그를 삼가고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후에 온갖 계책을 부려가며 찾아오면서 끈질기게 매달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멀리 외방(外方)으로 피하게 하였는데, 과연 해서(海西) 지방으로 내려갔다. 신축년에 왔을 적에는 반드시 일이 정해졌다고 여겼는데 결국 목호룡(睦虎龍)의 그물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이른바 은화(銀貨) 문제는 비록 미처 듣지는 못했으나 그때 뇌물을 주었다는 말이 많이 돌아다녔으므로 내가 매양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르니 장차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 비록 좋지 못한 일이기는 하나 그때 되돌려 주게 되면 반드시 다른 길을 통하여 내 마음을 더럽힐 것이니, 너는 굳게 간직하여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만약 목호룡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 은화일 것이다. 임인년039) 공초(供招) 중 남인(南人)·소론(少論)의 완론(緩論)은 곧 정인중(鄭麟重)·목호룡의 말이고, 백망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닌데, 역적 박상검(朴尙儉)이 그 준엄한 논설을 질시하여 홀로 면대(面對)를 요구해 반드시 죽이고야 말았다. 비록 조금만 이론(異論)이 있어도 완화(緩和)한다는 이름을 싫어하여 이것으로 억지로 버티다가 을사년040) ·병오년041) 이후까지도 이것으로써 한쪽 사람을 모함하는 계제(階梯)로 삼았으니, 이 무리들의 말을 외우고 있는 자가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무릇 백망이 시골로 피한 후와 노론(老論)이 또 서덕수를 얻은 이후부터는 내가 본래 남을 위해 말하는 것이 유익함이 없는 것을 알았으므로 마치 귀머거리처럼 지냈으나, 귀로 들은 일을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처음에는 노론들이 나를 후하게 해 준다고 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처럼 하였더니, 나를 협박하기를, ‘이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을 얻어 이 계책을 소론에게 주어 잿골[灰洞]을 만들겠다.’ 하였으니, 이에서도 영화를 탐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임을 알았다. 이 말을 들으니, 그 기세가 그치지 않으면 장차 나를 해쳐 선왕(先王)의 피붙이가 남아나지 않게 하려는 뜻임을 더욱 알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경종(景宗)까지도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과 뼛속까지 소름이 끼쳐 다만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고 울 뿐이었다. 아! 나의 그러한 마음은 천지신명에게도 질정(質正)할 수가 있다. 집이름에다가 뜻을 나타내고 분수를 지키며 여생을 보내고 싶은 것이 나의 지극한 소망이었다. 그런데 신축년에 명을 따른 것은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생각하건대, 마음에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계력(季歷)042) 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또 양백기(楊伯起)043) 에게 부끄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무리들이 감히 동조(東朝)를 의심하여 이석효(李錫孝)의 말대로 백금(百金)을 봉하여 들여보냈는데, 이는 대궐 안으로 유입(流入)시키려고 하는 계획이었다. 내가 이런 전갈을 듣고 급히 그 은(銀)을 찾아 그 속에 싼 것은 그대로 두고 다시 단단히 봉하여 스스로,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라고 기록하여 두었다. 그랬다가 명을 듣고 난 뒤에는 들여온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상이 이와 같았으므로 동조(東朝)께서 매양 슬퍼하고 애절하게 여기시는 하교(下敎)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들은 자도 많았는데, 그들은 소인(小人)의 복안(腹案)으로써 성인(聖人)의 도량을 헤아렸던 것이었다. 이 일은 측근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이 나를 칭찬하기를 바란 뜻이었는데, 내가 즉시 되돌려 주지 않고 연·월·일을 기록하여 두었던 것은 만약 돌려보내면 반드시 다른 길을 통하여 그들의 뜻을 행하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조(東朝)의 대공(大公)·무사(無私)하신 처분에 대해 그들은 반드시 그 계획을 이루었다고 여길 것이니, 그렇게 되면 누(累)를 끼침이 어떠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처음에는 그냥 두어 그 무리들로 하여금 그 뜻이 행해진 것처럼 여기게 했다가 종말(終末)에는 연·월·일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돌려 보냈으니 이렇게 해야 그들의 간사한 마음을 깨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비록 학문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으나 노론들이 만약에 범진(笵鎭)044) 의 마음을 갖고 범진의 일을 행했다면 내가 마땅히 그들의 충성심을 가상(嘉尙)히 여겨 내가 마땅히 그들의 충성심을 공심(公心)으로 임용(任用)했을 것이고 결단코 그 무리들이 나의 마음을 유혹시키는 데에 현혹되어 녹훈(錄勳)을 책정(策定)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 계책은 또한 어리석은 것이었다. 녹훈을 정하는 말에도 내력이 있다. 서덕수로 하여금 도목(都目)을 들여보내게 했는데 사대신(四大臣)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그 중에 있었으나, 이는 이건명(李健命)도 아니고 조태채(趙泰采)도 아니었고, 장세상(張世相)의 이름이 있었으며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제겸(李濟謙)의 무리도 모두 그 중에 있었다. 장세상이란 자는 곧 내가 번저(藩邸)에 있을 적에 차지 중관(次知中官)045) 이었는데도 잡된 무리들과 서로 결탁했으니 본래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항상 멀리했더니, 다른 중관들은 모두 나를 괴이하게 여겼지만 나의 소견은 헛되지 아니하였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나와 친근하여 별도로 그 길을 얻어 대궐 안의 뜻을 탐지하려는 것이었으나, 이 세상에 어찌 사대부로서 환시(宦寺)들과 결탁을 하고서 실패하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옛날에 남인(南人)·소론(少論)들은 박상검(朴尙儉)을 통하여 궁중의 일을 서로 알아내었다. 이것이 내가 장세상에게 한계를 엄격히 한 까닭이었다. 경술년046)최필웅(崔必雄)도 그러한 나머지 습관을 주워모은 것이었다. 통탄스럽다! 내가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부형(父兄)에 대한 의리는 대략 알고 있다. 선왕(先王)의 혈맥(血脈)은 황형(皇兄)047) 과 나뿐인데, 환득 환실(患得患失)048) 하는 무리가 우리 형제 사이에 있으면서 고금(古今)에 없던 일을 만들어 냈으니, 어찌 대단히 상심(傷心)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옛날 우리 선왕을 섬기던 정성을 다하여 우리 황형을 섬기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갑진년049) 의 일을 당하였으니,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면서 진실로 죽고 싶은 심정(心情)이었다. 민 판부사(閔判府事)050) 가 나의 이런 말을 듣고서도 또다시 차마 스스로 그의 당(黨)을 옳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경(卿)은 만약에 저사(儲嗣)를 세울 때 주고받은 것을 광명(光明)하다고 생각한다면 괜찮겠지만, 신하의 행위로서는 다시 무어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서 스스로의 의리라고 생각하여 나를 거의 불의(不義)에 빠지게 한다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소론들도 역시 잘못이다.

신축년과 임인년의 일도 곡절이 있었으니, 내가 또한 자세히 말하겠다. 아!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필정(必貞)·박상검(朴尙儉)의 무리를 얻어 밖으로는 조정 신하를 모함하고 안에서는 외부와 통하여 함정을 파고 있었다. 그래서 신축년의 김일경이 올린 상소를 가지고 박상검이 동궁(東宮)의 상소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어찌 간사하고 흉악스럽지 않은가? 역적 박상검은 곧 남인(南人) 심익창(沈益昌)의 제자(弟子)로서 그의 뜻은 먼저 소론을 선봉(先鋒)으로 삼아 반드시 폐족(廢族)들을 쓰려고 하는 의도(意圖)였는데, 스스로 나에게 그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아! 경종께서는 지극히 인자(仁慈)함과 대단한 효성(孝誠)으로써 우리 성모(聖母)이신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섬기시는 것이 어릴 때부터 빈틈이 없었고, 경자년 이후에 능히 선왕(先王)의 처분을 지켰으니, 이는 지나간 역사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역적 환관(宦官)들은 뜻을 잃은 무리들과 결탁하여 감히 해와 달처럼 명백한 처분을 어지럽히고자 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해야 할 임무는 주상의 잠자리의 안부를 묻고 아침저녁으로 주상의 수라상(水剌床)을 몸소 살펴보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보고서 입을 다물고 아뢰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성모(聖母)와 황형(皇兄)을 저버리고서 홍수(紅袖)051) 들과 서로 결탁한다는 것이 반드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먼저 국구(國舅)에게 서신(書信)으로 아뢰어서 곤전(坤殿)에게 말씀드리도록 했더니, 국구께서는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답을 하여 나로 하여금 양성(兩聖)052) 에게 말씀드리게 하였다. 그래서 먼저 곤성(坤聖)053) 께 아뢰고 그 다음에 요망스러운 환관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이유를 말씀드렸더니, 경종께서는 흔쾌히 따르셨다. 황형과 나는 이렇게 틈이 없었다. 그러나 소인(小人)의 해는 성세(聖世)에도 면하기 어려운 것인지라,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위조(僞造)한 하교(下敎)가 내려와 그날의 승전내관(承傳內官)을 먼저 파면시켰는데, 이는 비망기(備忘記)를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일이 순조롭지 못함을 알고 동궁(東宮)으로 물러와 들어앉게 되어 문안을 드리는 일이 이 일로 인하여 막혀버렸다. 그후 이틀 뒤 어명(御命)으로 나를 불렀는데, 이는 필정과 박상검이 국구(國舅)의 서신 사연 중의 내용을 알고자 하여 그 서신을 찾아내기 위한 뜻이었다. 나는 곤전(坤殿)께 아뢰어 승낙을 얻은 다음에 그것을 드리면서 다시 요망한 환관들의 죄상을 밝힐 것을 청하고 물러나왔다.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를 인견(引見)하였을 적에 필정과 박상검의 심복 환관이 그 서신을 용안(龍案)054) 에 두었는데, 이는 한번의 거사(擧事)에 둘을 다 해치려는 의도였으나, 다행히 경종의 지극한 우애에 힘입어 그 계책이 성공하지 못하고 인하여 나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가짜 전지(傳旨)가 내려졌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하는 수 없이 사위(辭位)하였던 것이다.

아! 소론들은 이런 줄도 모르고 도리어 남인(南人)의 길잡이가 되었으니, 어찌 웃을 일이 아닌가? 잘못된 것은 항상 노론의 마음을 불편하게 여기면서 스스로 그 당(黨)을 옳게 여기는 것이다. 아! 김일경박필몽의 마음을 경(卿) 등이 이미 알지 못하는데, 정인중(鄭麟重)과 김용택(金龍澤)의 마음을 유락(唯諾)한 사람들이 어찌 홀로 알겠는가? 더구나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것은 역모(逆謀)가 아니고 그런 마음가짐이 역모인 것이니, 그 마음가짐만을 거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선왕(先王)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당저(當宁)055) 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그 중에서 이이명(李頤命)에 대해서는 서덕수가 독대(獨對)한 일을 가지고 노론들의 올바르지 못한 말을 받아들여 나를 섬에 안치(安置)시켜야 한다 했고, 이건명(李健命)에 대해서는 서덕수 등과 사이가 좋지 못함은 나도 알고 있으니, 그 무리들과 혼동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조태채(趙泰采)는 본래 피차간에 미움을 받지 않았는데, 이미 그러함을 알았으면 이를 구별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김창집(金昌集)·이이명 두 사람에 대해 처분을 내리지 않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을사년 사충사(四忠祠)를 세운 것은 신축년과 임인년의 참혹함을 애통하게 여겨 그러한 풍습을 억제하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백금(百金)의 뇌물이 어찌 곤궁한 선비로서 마련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나는 그렇게만 알고 그 문제를 잠시 중지시켰는데, 지금 생각하고 깊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어찌 다시 그 옛방식을 따르겠는가? 장차 처분을 할 적에는 김창집이이명에 대해 반드시 구별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아직까지 늦춘 것은 그 뜻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그러나 이희지(李喜之)는 아무리 형편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일가야 무슨 상관이며, 김제겸(金濟謙)은 비록 역심(逆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일가야 무슨 연루될 것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지난번 조참(朝參) 때와 어제 경연(經筵)에서 견록(牽錄)하라고 교시(敎示)한 것도 곧 그런 뜻이었다. 이 영부사(李領府事)가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어찌 끝까지 처음의 마음을 지키겠는가? 아! 노론은 기사년056) 이후로부터 모두가 경종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졌고, 소론은 병신년057) 이후로 모두 ‘저들은 반드시 이심(異心)을 갖고 있다.’고 하며, 그런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미루어 노론 중에는 김제겸(金濟謙)의 무리를 꾸며내고, 소론 중에는 마침내 김일경·박필몽의 무리가 있었는데, 노론은 오히려 그의 당을 비호하다가 스스로 김제겸의 무리와 결과가 같은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소론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다가 역시 자신도 모르게 김일경·박필몽과 구별이 없게 되었다.

나의 견해로 보건대,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는 자는 다같이 김제겸박필몽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경 등이 지금 이후로 어찌 차마 ‘노소(老少)’ 두 글자를 마음에 싹틔울 수가 있으랴? 아! 지금의 처지는 지극히 어렵다. 아주 공평하게 하면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 될 수 있으나,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을 가지면 어떠한 임금이 되겠는가? 나의 마음은 얼음이나 옥처럼 깨끗하다. 황형(皇兄)에게 만약 후사(後嗣)가 있었다면, 나는 본래의 뜻을 굳게 지키면서 스스로 분수대로 산야(山野)에서 살았으리라. 이것이 나의 지극한 소원이었으나, 자성(慈聖)의 지극하신 하교(下敎)에 감동하고 경종의 지극하신 우애를 입었는지라 위로는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의 중대함을 생각하여 나 자신의 덕이 모자람도 헤아리지 않고 감히 현재 나의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태백(泰伯)·중옹(仲雍)058) 을 생각할 적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아! 증자(曾子)의 어머니처럼 현명(賢明)한 분도 똑같은 말이 세 번 이르니 베틀에서 내려오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며059) , 송나라 태종(太宗)처럼 현철(賢哲)한 군주도 부자(父子) 사이에서 ‘짐(朕)을 어느 곳에 두려는가?’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경종께서는 시종 나를 보호하였으니, 이는 지나간 역사에도 드물게 있던 일이다. 세상 일을 예측할 수 없는 때를 만나 남들이 견딜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 미처 그 남은 정성을 다 바칠 수가 없었다. 황형께서 예척(禮陟)060) 하신 뒤 갑진년 이후로는 오히려 경휘전(敬徽殿)061) 만을 의지하였었는데, 작년 이후로는 만사(萬事)가 이미 끝나 버렸다. 잊을 수 없는 이 정성을 어느 곳에 다시 펴겠는가? 저 멀리 의릉(懿陵)062) 을 바라보니, 애통한 감회가 가슴을 메운다. 아! 이 일을 동조(東朝)와 경종에게 자세히 말씀드린 것은 오래 되었으나 이제 와서 경 등에게 다 말하게 되니, 다시 유감이 없다. 그래도 한 가지가 있는데, 이는 마땅히 유교(遺敎)를 기다려야 할 것이나 그것도 이미 10분의 9는 설명이 되었다. 아! 당론(黨論)이 나를 모함하고 당론이 나를 해쳤다. 서덕수 등이 말한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 이쪽에서는 초(楚)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고063) 하여 나를 그처럼 얽어 매었고, 저쪽에서는 올바르지 못한 자들이 말하는 바를 이용하여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말을 첨가시키는지라. 이미 황형에게 정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어 그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듣고서도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으니, 또한 미련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내가 탄식과 눈물이 함께 나오는 까닭이다. 아! 삼당(三黨)이 이와 같으니, 지금 가장 중요한 방법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등용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비록 올바르지 못한 무리가 있을지라도 저절로 마음을 고칠 수가 있을 것이니, 조정이 공고해지고 나라의 형편도 자연히 굳혀질 것이다. 원컨대 경 등은 모름지지 옛버릇을 잊어버리고 한마음을 아주 결백하게 가지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下敎)를 마친 뒤 약방(藥房)에서 탕제(湯劑)를 올리겠다고 거듭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고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그리고서 임금이 오른손으로는 이광좌(李光佐)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閔鎭遠)의 손을 잡고서 이대로 머물러 있고 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감히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만약 윤허를 받는다면 여유를 갖고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만약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어 어렵겠는가?"

하고, 마침내 윤허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도 벼슬을 그만두는 윤허를 받게 되면 마땅히 서울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역시 윤허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비록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하더라도 간혹 상참(常參) 등의 큰 일을 만나면 당연히 들어와 참여해야 할 것이며, 강연(講筵)의 빈대(賓對)에도 때때로 입시(入侍)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고, 이튿날 임금이 어제 밤에 있었던 하교 내용을 친히 한 통을 써서 사관(史官)에게 주어 역사를 편수(編修)할 적에 참고하게 하였는데, 대교(待敎) 김한철(金漢喆)이 그 글을 되돌려 보내면서 아뢰기를,

"삼가 손수 써주신 글을 받고 물러나와 신(臣)의 초책(草冊)064) 과 고증(考證)해 보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군주가 글을 써서 사관(史官)에게 주어 역사 편수(編修)를 지휘하게 되면, 아마도 후일의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의 말이 옳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임금이 지난해에는 합문(閤門)을 폐쇄하였고 이번에는 약을 중지시켰는데, 이는 다른 의견을 억지로 합쳐서 탕평(蕩平)을 단단히 이루려는 뜻이었으나 옳고 그른 것이 모두 뒤섞이고 의리(義理)가 마침내 명백히지지 아니하여, 다만 임금의 위엄만 날로 위에서 손상되고 성의는 아래로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밤중에 전석(前席)에서 눈물을 흘리며 은밀하게 말한 것은 대개 두 정승을 개도(開導)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함을 깨닫게 한 말은 별로 없고, 심지어는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모두 윤허했으니, 이는 또 애써 불러온 뜻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주서(注書)에게 붓을 멈추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발설하지 못하게 했으니, 무릇 밖에 있는 사람이야 그 누가 다시 이 일을 알겠는가? 그런데 그후 상소에 다시 이 일을 주달(奏達)하는 것 중에 만약에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말하기를, ‘19일 하교한 뒤에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하여 의혹을 면하지 못하게 했으니, 온 세상에서 보고 듣는 자와 식견이 있는 이들이 남몰래 탄식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25책 33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2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역사-사학(史學)

  • [註 03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35]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03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03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38]
    달성(達城) :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
  • [註 039]
    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040]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041]
    병오년 : 1726 영조 2년.
  • [註 042]
    계력(季歷)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셋째 아들로서, 형(兄)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양위(讓位)를 하므로 아버지의 대를 잇고 문왕(文王)을 낳았음.
  • [註 043]
    양백기(楊伯起) : 백기(伯起)는 후한(後漢) 때 사람인 양진(楊震)의 자(字). 청렴결백하여 자기가 추천한 사람 왕밀(王密)이 밤중에 몰래 황금(黃金) 10근을 갖다 주니, 그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왕밀을 꾸짖으니, 왕밀이 부끄러워 물러갔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 [註 044]
    범진(笵鎭)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간관(諫官)으로서 나라 일에 충성을 다바쳤음.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간절하게 청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며, 전후(前後)하여 19차례나 상소(上疏)하였는데, 그에 대한 하명(下命)을 1백여 일이나 기다리느나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게 될 정도로 정성을 다하였음.
  • [註 045]
    차지 중관(次知中官) : 각 궁방(宮房)의 일을 맡아 보는 환관(宦官).
  • [註 046]
    경술년 : 1730 영조 6년.
  • [註 047]
    황형(皇兄) : 경종.
  • [註 048]
    환득 환실(患得患失) : 녹위(祿位)에 집착하는 것을 말함.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비부(鄙夫)들은 벼슬을 얻기 전에는 못얻어 걱정이고 얻고나서는 놓칠까 걱정하여 그것을 지키려고 못하는 짓이 없다."라고 한 말임.
  • [註 049]
    갑진년 : 1724 경종 4년.
  • [註 050]
    민 판부사(閔判府事) : 민진원(閔鎭遠).
  • [註 051]
    홍수(紅袖) : 궁녀의 별칭.
  • [註 052]
    양성(兩聖) : 경종과 왕비.
  • [註 053]
    곤성(坤聖) : 왕비.
  • [註 054]
    용안(龍案) : 임금의 책상.
  • [註 055]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 경종을 이름.
  • [註 056]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057]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 [註 058]
    태백(泰伯)·중옹(仲雍)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와 차자(次子)로, 아우인 계력(季歷)에게 양위(讓位)하였으므로 후세에서 그 덕을 일컬었음.
  • [註 059]
    증자(曾子)의 어머니처럼 현명(賢明)한 분도 똑같은 말이 세 번 이르니 베틀에서 내려오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며 : 증자(曾子)의 어머니가 베를 짜고 있었는데, 어떤 이가 와서 ‘증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하니, 증자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 후 다른 사람이 또 와서 독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하니, 아들을 믿던 어머니도 베틀에서 내려와 달려가 보았음. 거짓도 자주 되풀이하면 사실로 믿는다는 뜻.
  • [註 060]
    예척(禮陟) : 승하했다는 말.
  • [註 061]
    경휘전(敬徽殿) : 경종의 계비(繼妃) 선의 왕후(宣懿王后).
  • [註 062]
    의릉(懿陵) : 경종의 능.
  • [註 063]
    초(楚)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 ‘위초비위조(爲楚非爲趙)’의 귀절(句節)을 변조(變造)한 것으로, 겉으로는 위하는 체하면서 실상은 딴 것을 위함을 이름.
  • [註 064]
    초책(草冊) : 초벌로 기록한 문서.

○領府事李光佐進城外陳疏, 上賜批, 命與判府事閔鎭遠入侍, 藥房亦同入, 時夜已二更矣。 上屛左右近習, 命注書停筆勿書, 只使史官記事, 敎曰: "卿等各在長夜久矣。 今予作此擧, 致卿等乃爾者, 固心在焉。 痛矣, 予之欲諭未諭者, 今幾年? 予生長宮中, 不知人間之苦, 而自夫辛丑以後, 抱至痛者, 于今十三載。 今見卿等, 雖各自爲義, 實莫知其眞個。 若未詳諭, 徒傷心氣而已, 環顧國勢, 將無奈何, 今乃詳諭焉, 卿等靜聽。 予諭原任大臣, 豈特兩卿, 而固執者, 卿等故欲使開曉者, 亦卿等也。 噫! 今予諭此, 庶解方寸之痛結, 其不至諸葛之嘔血, 實冥頑矣。 時象源頭、斯文是非, 予不諭焉。 噫! 自庚子國恤之後, 三百年禮義大壞, 君君臣臣之義, 漸墜不明。 老論則自以謂爲予, 少論則自以謂爲戊申推戴之人, 南人則自以謂爲駱山。 雖然, 是豈色目中人, 皆逆心而然哉? 此其中貪利梟獍之徒所爲, 使卿等若少知此心, 決不同此。 其各有爲之說, 非聞于他, 乃聞乎德修。 噫! 自辛丑, 予尤杜門謝客, 雖前日厚待之宗臣, 輒稱疾而不見矣, 而況德修素知其父子爲人, 不如達城之謹身。 尤況此等之時, 豈欲見也, 而世道嘵嘵, 必以踈待妻族, 謂夫妻之不睦, 故其來十也, 不獲已二三見之矣。 先諉白望, 探予動靜, 白望則與他人有異故也。 予知此事, 而言曰: ‘此非臣子所爲。 況先朝血屬, 今幾人? 此輩若爲宗社有此計, 但當以赤心扶國, 何必欲使予知之哉? 此貪利不忠之徒, 汝當愼之, 亦勿顯斥。 其心至此, 必將誤國害予而後已, 爾須謹遠之。’ 云, 而其後百計尋訪, 操之不捨, 故予使之遠避外方, 則果下海西。 辛丑之來, 必也意謂事定也, 而果入虎龍之綱矣。 所謂銀貨, 雖未及聞之, 其時行賂之說大行, 故每謂曰: ‘此輩無厭, 將無所不至。 雖有無狀之事, 此時還與, 則必也從他路累我丹心, 爾須堅藏以俟。’ 云。 此若非虎龍構說, 則必也是銀。 壬寅招中南小緩論之說, 乃麟重虎龍之言, 非白望創道, 而賊嫉其峻論之說, 獨求對而必殺乃已, 雖稍異者, 亦惡緩名。 以此勒持, 而乙丙以後, 亦以此爲構一邊人之階梯, 誦此輩之言者, 豈不冤哉? 自夫白望避鄕之後, 老論又得德修以來, 予素知爲人言之無益, 故若聾者然, 而耳聞之事, 豈不記焉? 初則老論爲予厚云, 而其若不聞不覩, 則脅我曰: ‘若此則得他人, 遂此計付少論爲灰洞。’ 云, 此亦知其貪榮賣國, 而聞此言, 尤曉其勢不已, 將害于予, 使先朝血屬, 無遺之意也。 推其心, 景廟亦危矣, 心寒骨靑, 只自飮泣。 噫! 予心可質神明。 寓意于舍名, 守分餘年, 是予至願, 而辛丑膺命者, 念三宗之血脈, 不忍于心。 故而若有季歷, 予豈到此? 又有無愧楊伯起之事矣。 此輩敢疑東朝, 若錫孝之言, 封入百金, 此欲流入闕中之計。 予聞此報, 亟尋其銀, 存其內封, 堅封自書某年月日以置。 及夫聞命之後, 自流入處封還。 此無他, 噫時象若此, 東朝每嘗痛恨惻怛之敎。 承聞者亦多, 而渠輩以小人之腹, 揣聖人之量。 此擧則欲賂左右, 求其譽我之意, 予之卽不封還, 書年月而置者, 若送則必從他逕行之乃已。 然則我東朝大公無私之處分, 渠輩必自以爲其計遂云, 若此則貽累何如? 故初則留置, 使渠輩意謂行也, 而末乃封還年月明白, 足可以破渠等之邪心故矣。 吁! 予雖不學, 使老論若以范鎭之心行范鎭之事, 則予當嘉其赤心, 公心任用矣, 決不邪惑于此輩, 釣我之心, 以定策錄勳也, 計亦愚矣。 策勳之說, 亦有來歷。 使德修飛入都目, 而四大臣中一人, 名在其中矣, 此非也。 世相之名在焉, 麟重龍澤濟謙之輩, 俱在其中。 世相者, 卽予藩邸時次知中官, 而交結雜類, 本非善人, 故予常踈之, 他中官亦皆怪予矣, 予見非虛矣。 錄名于此者, 謂與予別欲得其逕, 探知闕中之意也。 世間豈有士夫交結宦寺, 不敗之人乎? 故南、少得尙儉, 互知宮闈之事, 此予所以嚴界限于世相者。 庚戌必雄亦掇拾此等餘習矣, 痛矣! 予雖不敏, 粗知父兄之義。 先朝血脈, 只有皇兄與我, 而患得失之徒, 處我兄弟之間, 作亘古亘今所無之事, 豈不痛心? 惟有此心, 欲盡昔日事先朝之誠, 事我皇兄, 遽遭甲辰, 俯仰痛泣, 良欲溘然。 閔判府事聞我此敎, 更忍有自是其黨之心? 卿若以建儲授受, 謂光明則可也, 於人臣所爲, 更無可謂。 不知此而自謂義理, 使予幾陷不義, 豈不誤哉? 少論亦非矣。 辛壬之事, 亦有曲折, 予亦詳諭。 噫! 之徒, 得之輩, 外搆廷臣, 內應推穽。 辛丑疏, 曰: ‘爲東宮疏。’ 其言豈不奸凶? 逆乃南人沈益昌之弟子, 其意先以少論爲鋒, 而必用廢族之意, 渠自露其心於予矣。 噫! 景廟以至仁盛孝, 事我仁顯聖母, 自幼沖時無間, 故庚子之後, 能守先朝處分, 此則往牒所無, 而幺麽賊宦, 交結失志之徒, 敢欲亂如日月之處分, 豈不痛心? 予之職任, 不過問寢視膳, 而見此擧, 默而不達, 則此負我聖母與皇兄, 而紅袖交結, 必也審矣。 先以書報國舅, 開達坤殿, 則國舅所答, 斷斷忠赤, 使予替達兩聖。 故先達坤聖, 次陳妖宦亂國之由, 則景廟欣然快從。 皇兄與我若是無間, 而小人之害, 聖世亦難免。 俄頃之間, 從中僞敎, 先罷其日承傳內官, 此使備忘, 不能傳故也。 予知事不諧, 退伏東邸, 問寢之路, 因此阻隔矣。 厥後二日, 以命召予, 此欲知國舅上書中辭意, 覓其書之意也。 予請得於坤殿而進之, 復請妖宦之罪狀而退。 領相趙泰耉之引見也, 腹心之宦, 置其札於龍案, 此一擧兩害之意, 而幸賴景廟, 友愛所曁, 其計未遂, 因僞下予自爲之旨。 自此以後, 不獲已辭位矣。 噫! 爲少論者, 不知此, 而反爲南人引路, 豈不哂哉? 所非者, 恒日不便老論之心, 自是其黨。 噫! 之心, 卿等旣不知, 重澤之心, 唯諾之人, 豈獨知哉? 尤況聯箚非逆, 將心是逆, 只擧將心可也。 且於先王則可也, 於當宁則未安。 其中李頣命德修以獨對事, 承老論不逞者之說, 謂予可爲島置, 李健命德修輩之不好, 予亦知之, 混置其類, 不亦冤乎? 趙泰采則本非見惡於彼此者, 旣知于此, 區別奚難, 而兩人不處分者, 予有所料矣。 乙巳四忠祠, 痛辛壬之慘刻, 抑制其習之意, 而百金之賂, 豈窮儒所辦? 予知若此, 姑息此擧, 自今思之, 深竊自愧, 豈復循其舊套哉? 將處分也, 於, 必也區別。 故尙且遲回, 抑此意也。 雖然, 喜之雖無狀, 其族何間, 濟謙有逆心, 其族何累? 故頃於朝參, 昨日筵中, 牽錄之敎, 乃此意也。 李領府事自聞此敎之後, 豈終守初心乎? 噫! 老論自夫己巳以後, 擧皆有不安景廟之心; 少論則丙申以後, 皆謂彼必有異心。 推此心之害, 老論之中, 粧出濟謙之輩; 少論之中, 終有之徒。 老論則猶護其黨, 自不免乎與輩同歸; 少論則自謂見是, 亦不覺其與無別。 以予觀之, 不去此心者, 俱難免乎矣。 卿等自此之後, 豈忍老少二字, 萠于心乎? 噫! 此地極難。 大公則, 少私則爲何如主? 我心若氷玉, 皇兄若有嗣, 則我固守本志, 自分山野, 是我至願, 而感慈聖之至敎, 蒙景廟之友愛, 上念三宗血脈之重, 不揆寡躬之涼德, 不敢固守, 卽予之意。 已到于此, 每思泰伯仲雍, 不覺恧于心。 噫! 以母之賢, 三至之說, 不免下機; 以太宗之賢, 父子之間, 有置朕何地之說, 而景廟之終始保我, 往牒所罕。 遭世道罔測之時, 經人所不堪之事, 未能盡其餘誠, 而皇兄禮陟之後, 甲辰以後所依仰者, 猶敬徽殿。 昨年以後, 萬事已訖, 耿耿此誠, 何處復伸? 遙望懿陵, 痛隕抑塞。 噫! 此事陳白其詳于東朝曁景廟者久, 而于今洞諭卿等, 更無餘憾, 而猶有一間者, 當待遺敎, 而此已諭十分之九矣。 吁! 黨論陷我, 黨論害我。 德修等所謂於我何有, 而此則以非爲楚之心, 累我若此, 彼則乘不逞之所謂加我罔測之說, 旣不盡誠于皇兄, 聞此不忍聞之說, 至今泯默, 亦謂冥頑矣。 此予所以聲淚俱下者。 噫! 三黨若此, 卽今要道, 惟才是用。 君臣之間, 雖有不逞之徒, 自可革心, 朝廷鞏固, 國勢自固。 願卿等須忘舊習, 精白一心。" 下敎訖, 藥房申請進湯劑, 上始許之, 命取進御。 於是, 上右手執光佐手, 左手執鎭遠手勉之, 以仍留勿往。 鎭遠曰: "臣於頃疏, 敢請休致, 今若蒙許, 可得優遊自便矣。" 上曰: "卿若欲留, 則何難之有?" 遂許之。 光佐曰: "臣亦蒙休致之許, 則當留城中矣。" 上亦許之。 敎曰: "雖云致仕, 或値常參等大節, 則自當入參, 講筵賓對亦時時入侍可也。" 翌日, 上親書昨夜下敎一通, 付史官, 使之參考修史, 待敎金漢喆還納手書奏曰: "伏奉手書, 退而考證於臣等草冊, 則無少差異, 而人君書付史官, 指揮修史, 恐有後弊。" 上曰: "史官之言是矣。"

【史臣曰: 上之頃年閉閤, 今此停藥, 出於强合同異, 硬做蕩平之意, 而是非一切混淆, 義理終不明白, 徒使主威日損於上, 而誠意未孚於下。 且半夜前席, 垂涕密諭, 蓋爲開導兩相, 而別無令人覺迷之語, 至於竝許休致, 則又無辛勤招徠之意。 況命注書停筆, 戒群臣勿泄, 則凡在外者, 誰復知之, 而其後章奏之間, 若有不摡於上心者, 則輒曰: ‘十九下敎之後, 爲臣子者, 安敢乃爾?’ 未免疑惑, 一世之觀聽, 有識之竊歎, 爲如何哉?"】


  • 【태백산사고본】 25책 33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2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왕실-궁관(宮官)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