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창군 이탱 등이 조선 열전을 받들고 청에서 돌아오니, 책을 보고 하문하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부사(副使) 조상경(趙尙絅), 서장관(書狀官) 이일제(李日躋)가 《명사(明史)》의 조선 열전(朝鮮列傳)을 받들고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책을 받아 펼쳐 보고 인하여 하문(下問)하기를,
"우리 태조조(太祖朝)의 일은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는데, 이는 누구의 의논인가?"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바로 한인(漢人) 왕유돈(汪由敦)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명사(明史)》의 본문(本文)인가?"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명사》로 인하여 청나라 사람이 수찬(修撰)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립(自立)했다는 ‘자(自)’는 끝내 고치지 못했다."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명본기(明本紀)에도 이 두 글자가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개국(開國)하는 즈음에는 으레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촉한(蜀漢)은 바로 정통(正統)인데도 주자(朱子)가 특별히 한중왕(漢中王)이 자립(自立)했다고 썼으니, 우리 조정의 일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오히려 석연치 못하다."
하였다. 탱(樘)이 또 〈명나라〉 태조(太祖)와 희종(熹宗)의 본기(本紀)를 받들어 올리면서 아뢰기를,
"태조 본기(太祖本紀)에는 우리 태조조의 일이 기재되어 있고, 희종 본기(熹宗本紀)에는 인조조의 일이 기재되어 있는데, 모두 대강(大綱)을 간략하게 썼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제신(諸臣)은 등본(謄本)을 인본(印本)보다 못하다고 여기지만, 나의 뜻은 그렇지 않다. 옹정(雍正)099) 이 어문(御門)에서 친히 반포(頒布)한 것이니, 어찌 믿을 만한 사기(史記)가 아니겠는가? 다만 반드시 전부(全部)의 간본(刊本)을 얻은 후에야 바야흐로 성공했다고 하겠다."
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신 등이 반드시 전부를 가지고 오려고 하였지만, 장정옥(張廷玉)이 어렵게 여겼습니다. 대체로 《명사(明史)》의 편집(編輯)은 강희(康熙)100) 때부터 웅사리(熊賜履)·왕홍서(王鴻緖) 등이 시작하였었는데, 단지 열전(列傳)만 찬집하여 올리자, 강희(康熙)가 묻기를, ‘어찌하여 본기(本紀)를 먼저 찬집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명나라 조정의 문자에 기휘(忌諱)할 부분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강희가 말하기를, ‘노(奴)자 같은 것은 바로 욕설(辱說)이니 삭제하는 것이 좋고, 노(虜)자 같은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두는 것이 좋다.’고 하므로, 인하여 본기 20여 권과 열전 74권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장정옥이 총괄하여 잇따라 지(志)와 표(表)를 편수(編修)하였다고 하니, 전부를 아직 반포하지 않는 것은 기휘(忌諱)하는 글자를 아직 모두 고치지 못해서인 듯합니다."
하고, 탱(樘)이 아뢰기를,
"이 책을 미처 보지 못하였을 때에는 우려(憂慮)가 실로 많았었는데, 이제 종계(宗系)에 관한 일과 열성조(列聖朝)에 관한 일은 모두 뜻대로 고쳤으니, 만번 다행스럽게 여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상명(常明)과 유보(留保)의 힘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은화(銀貨)와 과하마(果下馬)·진주(眞珠) 등의 물품을 상명이 요구하기 때문에 신 등이 수석 역관(首席譯官)으로 하여금 임시 방편으로 대답하게 하였으나,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는 예(禮)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에 무왕(武王)이 미녀(美女)와 옥백(玉帛)을 사용하였었다.101) 이미 선왕의 무함을 분변하려고 한다면, 어찌 뇌물을 주는 혐의를 피할 수 있겠는가? 은(銀)은 윤필(潤筆)의 대가라는 명목으로 지급하고, 진주와 말은 명분이 없는 물건이니 이목을 번거롭게 한다는 것으로 핑계대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31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03면
- 【분류】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註 099]옹정(雍正) : 청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곧 세종을 가리킴.
- [註 100]
강희(康熙) : 청나라 성조(聖祖)의 연호.- [註 101]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에 무왕(武王)이 미녀(美女)와 옥백(玉帛)을 사용하였었다. :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학정(虐政)이 극도에 이르렀을 무렵 숭후호(崇侯虎)가 서백(西伯:주(周)나라 문왕을 일컬음)을 주왕(紂王)에게 참소하기를, "서백이 선(善)과 덕(德)을 쌓아 제후(諸侯)들이 모두 그에게 쏠리니, 장차 임금에게 불리(不利)해질 것입니다." 하자, 주왕이 그 말을 듣고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었음. 서백의 신하인 굉요(閎夭)의 무리가 그러한 상황을 근심하여 미녀(美女)와 좋은 말, 그리고 기타 진기한 물건을 구하여 주왕의 폐신(嬖臣)인 비중(費仲)을 통하여 주왕에게 바치니, 주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서백을 석방한 고사임.○甲子/冬至正使洛昌君 樘、副使趙尙絅、書狀官李日躋奉《明史》 朝鮮列傳, 還自淸國。 上御時敏堂, 受冊披覽, 仍下問曰: "我太祖朝事, 不可釐正云者, 是誰之議耶?" 尙絅曰: "卽漢人 汪由敦也。" 上曰: "此皆《明史》本文乎?" 尙絅曰: "因《明史》, 而淸人修之也。" 上曰: "自立之自字, 終不得改矣。" 尙絅曰: "明本紀, 亦有此二字。 自古開國之際, 此是例用之語也。" 上曰: "蜀漢卽正統, 而朱子特書漢中王自立, 我朝事, 亦類此。 然予心猶未釋然矣。" 樘又奉進太祖、熹宗本紀曰: "太祖本紀, 載我太祖朝事, 熹宗本紀, 載仁祖朝事, 而皆略書大綱矣。" 上曰: "諸臣以謄本, 謂不如印本, 而予意則不然。 雍正旣御門親頒, 豈非信史乎? 第必得全部刊本, 然後方爲成功矣。" 尙絅曰: "臣等必欲購全部以來, 而張廷玉難之。 蓋《明史》編摩, 自康熙時熊賜履、王鴻緖等始, 而只撰進列傳, 康熙問何不先撰本紀云, 則對曰: ‘明朝文字, 多有忌諱’ 康熙曰: ‘如奴字, 卽辱說可削, 如虜字, 從古有之, 可存。’ 仍成本紀二十餘卷、列傳七十四卷。 而今則張廷玉摠裁續修志表云, 全部之姑未頒似, 以忌諱字之尙未盡改也。" 樘曰: "此冊未見之前, 憂慮實多, 今則宗系事、列聖朝事, 俱如意釐正, 不勝萬幸。 實多常明及留保之力。 銀貨及果下馬、眞珠等物, 常明責徵, 故臣等使首譯, 彌縫答之, 而不可無致謝之禮矣。" 上曰: "文王囚羑里, 武王有美女、玉帛之用。 旣欲辨先誣, 則何可避行貨之嫌乎? 銀則名以潤筆之資而給之, 珠馬則是無名之物, 辭以耳目之煩可也。"
- 【태백산사고본】 24책 31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03면
- 【분류】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註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