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에 이광좌·이삼을 논하고 송인명 등을 논척한 조관빈의 상소
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막대한 것은 오직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인륜이니, 그것이 있는 바에 목숨을 바쳐 오직 의리만을 볼 따름입니다. 신은 신의 아비의 자식으로서 전하의 신하가 되었는데, 또 능히 할말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아비를 죽게 하는 것이고 임금을 잊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정미년505) 에 추가로 삭탈 관직(削奪官職)한 것은 전하께서 좋아서 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이광좌(李光佐)의 위협에 협박당한 것이며, 두 집안이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도 또한 전하께서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시어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저들 무리의 조절(操切)에 구애를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임금의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현명하심으로써 흉당(凶黨)에게 속고 가리워짐을 면치 못하여 처분이 끝내 뒤죽박죽으로 귀결되고 의리(義理)가 점차 회색(晦塞)되는 데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이 《감란록(勘亂錄)》을 보았더니,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의 십적(十賊)을 역적의 괴수(魁首)로 삼았는데, 십적은 다만 보잘것없는 광망(狂妄)하고 교활한 무리일 뿐입니다. 만일 그 당시의 장상(將相)들이 모두가 전하께서 가까이하고 신임하는 사람으로서 과연 국가와 더불어 안위(安危)를 함께 할 마음이 있었다면, 비록 이인좌·정희량의 무리가 천만 명이 있다 한들 또한 어찌 감히 하루아침에 창궐하여 방자하게 거침없이 몰아쳐서 대궐을 침범할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반드시 거흉(巨凶)·대특(大慝)으로 그 안에서 모략을 세워 그 기회를 빌려 그 세력을 조장한 자가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부녀자와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으로도 다 이광좌와 이삼(李森)을 무신년506) 의 역괴(逆魁)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광좌의 죄상에 대해서는 이양신(李亮臣)이 12조로 나열한 상소보다 상세한 것이 없습니다.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흉계에 있어서는 더욱 막대한 죄안(罪案)이 되는데, 그 자신이 변명한 말에서도 또한 그 정절(情節)을 다 엄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머리를 들고 버젓이 살아 있으니, 그래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가 고발되었을 때의 일로 말하더라도 조금도 황송해 하거나 위축되는 의사가 없이 손님을 맞이하기를 스스로 보통사람과 같이 하여 경재(卿宰)가 몰려들고 거마(車馬)가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는 안옥(按獄)하는 위관(委官)507) 으로 하여금 왕명(王命)을 기다리는 사차(私次)에 재차 문안을 드리도록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기세와 권력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다시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도록 한다면, 어찌 후일의 화(禍)가 무신년보다 심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이삼은 여러 번에 걸쳐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니 본디 살려 둘 만한 이치가 없으며, 또한 의심할 만한 정절(情節)이 있습니다. 조카를 보내 가서 의논하였다는 설은 처음에 역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감히 하순(下詢)할 즈음에 ‘열 살 남짓한 서조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삼에게 장성한 서조카가 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인데, 단지 열 살 남짓한 어린애만을 들었으니, 분명히 은휘(隱諱)한 정상이 있습니다. 국체(鞫體)로써 논한다면 그가 어찌 감히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나필웅(羅必雄)의 변란이 반드시 이삼이 다 친병(親兵)을 관장하는 시일을 기다린 것도 또한 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매우 의혹스럽게 여기는 바이며, 신겸제(申兼濟)가 경조(京兆)의 세 당상(堂上)을 공격해 제거하여 장임(將任)을 변환(變幻)하는 기회로 삼은 것은, 더욱 이삼의 의심할 만한 하나의 긴요한 단서입니다. 오늘날 탕평을 주장하는 자들은 위포(韋布)508) 로 있을 때부터 일찍이 이러한 의논을 주장하였고, 신도 또한 그 마음이 반드시 참으로 나라를 그르치게 하고자 하는데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견처(見處)가 밝지 못하고 용처(用處)가 바르지 못합니다.
사류(士類)가 옳고 충성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에 도리어 겉으로는 협조하고 속으로는 배척하며 저들의 무리가 잘못이고 역적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닌데도 으레 비호하고 추켜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그 설에 현혹되시어 온나라를 기울여 그 말을 들으시고, 당(黨)을 제거하는 성효(成效)를 책임지우시며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다스림을 기대하십니다. 음양(陰陽)은 구분이 고정되어 본디 사람의 힘을 변개(變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따로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닌 물건이 있어 음양과 나열하여 셋이 되어, 나아가서는 군자(君子)가 되지 못하고 물러가서는 차라리 소인(小人)도 되지 못하니, 이것이 근래에 탕당(蕩黨)509) 의 칭호가 하나의 새로운 색목(色目)이 된 까닭입니다. 한번 탕당이 출현한 이후로부터 기상이 갑자기 바뀌고 풍절(風節)이 모조리 사라져 군주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서로 잊어버리는 곳에 두고 아름다운 관직과 좋은 작위만을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니,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장차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못하고 나라는 나라의 도리를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히 국가의 변고를 당하여 권흉(權凶)의 저 왕망(王莽)·동탁(董卓)510) 과 같은 자가 이익으로 달래고 위력으로 공갈한다면 크게는 순욱(筍彧)511) 과 진군(陳群)512) 이 모주(謀主)가 되어 힘을 바칠 것이고, 작게는 문울(文蔚)513) 과 풍도(馮道)514) 가 보책(寶冊)을 받들어 신하라 칭할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가 막히고 마음이 떨립니다.
더욱 통탄할 만한 일은 그 사람의 자임(自任)하는 바가 어떠하고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는 것이 어떠한데 혈성(血誠)으로 나를 구원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사리(私利)를 앞세워 자신을 도모할 계획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신년 변란(變亂)이 일어났을 즈음에 비록 전혀 그 공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경영하고 계교하여 상하를 광혹(誑惑)시켰습니다. 일찍이 신의 종형(從兄)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을 개오(開悟)시키고 선류(善類)를 이끌어 진출시키는 것은 오직 내가 있을 뿐이라.’ 하였고, 또 달려와 묻는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외부에 있는 적(賊)은 족히 염려할 것이 없고 모자[帽] 밑의 적이 가장 걱정스럽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변화가 약간 진정되자 능히 본색(本色)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가 부식(扶植)한 바는 지난번에 이른바 모자 밑의 적의 무리가 아님이 없었으니, 이른바 나라와 휴척(休戚)을 같이 한다는 신하도 또한 이와 같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국옥(鞫獄)을 심리(審理)하는 사체(事體)야말로 얼마나 엄중하고 시급한 것입니까? 그런데 죄수를 심문하는 일은 마음 밖에 두고서 시구(詩句)나 수창(酬唱)하며 한가로운 풍류나 즐겼으니, 그가 옥정(獄情)을 소홀히 여기고 나랏일에 무관심한 것을 여기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법을 수호하는 가제(家弟)와 법을 전하는 전장(銓長)의 운용(運用)하는 기괄(機括)이 동일한 수법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역적(逆賊) 김일경(金一鏡)을 상소 때문에 주벌(誅伐)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오로지 육적(六賊)을 애호(愛護)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고, 이광좌의 지금의 영수(領袖)라는 칭호도 또한 차마 드러내놓고 배척하지 못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마음가짐과 지론(持論)은 몹시 험악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송인명(宋寅明)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심함이 있습니다. 바야흐로 변란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 감히 역적 남태징(南泰徵)을 곧바로 참형(斬刑)에 처하기를 청하였다가 결국은 단서를 알 수 없도록 만들었으니, 인심이 분개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들 가운데의 한 평범한 무리로서 불시에 갑자기 발탁되어 지위가 총재(冢宰)515) 에 이르고 은우(恩遇)가 특별하여 분수에 넘치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마땅히 공평한 정사로 나라에 진력하고 겸손한 도리로 자신을 신칙(申飭)해야 할 것인데, 정주(政注)를 사정(私情)에 따른 것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며, 세력은 온세상을 기울게 하니, 감히 힐문(詰問)할 수도 없었습니다. 태복시(太僕寺)의 제거(提擧)에 있어서는 본래 좋은 벼슬자리로 칭하는데, 일부러 그 자리를 남겨 두었다가 필경은 자신이 차지하였으니, 그 방자하고 비루한 것은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해도 오히려 소소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김일경의 무리들과 단절할 것을 허락하였다가 종말에는 차례로 불식(拂拭)하고 다시 구별함이 없어 스스로 임금을 망각하고 역적을 비호하는 죄과로 돌아감을 달갑게 여겼으니, 아! 역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권력을 탐하고 세력을 좋아함은 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류(士類)들이 이광좌를 성토할 때 송인명이 사실 협조하였으니, 그 뜻이 징토(懲討)에 엄정한 것 같으나 병용(柄用)516) 됨에 이르러서는 또한 이광좌가 하던 투식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광좌를 배척했던 까닭은 그의 흉악함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의 권력을 빼앗고자 함에서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수상(首相)과 결탁하여 탕평(蕩平)의 당(黨)이 되었을 때는 그 입은 꿀과 같고 그 마음은 칠(漆)과 같았는데, 그의 세력과 지위가 점차 핍박함에 미쳐서는 또 대관(臺官)을 모집하여 암암리에 물리쳐 축출하는 모략을 실현시켰습니다. 그의 앞으로의 형세를 살펴본다면, 만일 온나라를 저 혼자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만족하지 않을 것아니, 신은 그윽이 이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우의정 조문명이 곧바로 도성(都城)을 나가 명소를 반납했다. 승정원에서 그 사실을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환수(還授)할 것을 명하였고, 조관빈으로 하여금 와서 대명(待命)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30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8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註 505]정미년 : 1727 영조 3년.
- [註 50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507]
위관(委官) : 죄인을 추국(推鞫)할 때 의정 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던 재판관.- [註 508]
위포(韋布) : 벼슬하지 아니한 빈한한 선비.- [註 509]
탕당(蕩黨) : 탕평(蕩平)을 주장하는 당(黨).- [註 510]
왕망(王莽)·동탁(董卓) : 왕망은 한(漢)나라 효원 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서 평제(平帝)를 죽이고 한조(漢朝)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자, 동탁은 후한(後漢)의 장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헌제(獻帝)를 세워 허수아비로 만들고 전횡을 일삼다가 여포(呂布)·왕충(王充)에게 살해된 자. 두 사람 모두 왕위를 찬탈하거나 찬탈에 관계한 자임.- [註 511]
순욱(筍彧) : 후한(後漢) 때 사람. 조조(曺操)의 신하가 되어 자문에 응했음.- [註 512]
진군(陳群) :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사람. 조조를 보좌했음.- [註 513]
문울(文蔚) : 후한(後漢) 노수(路粹)의 자(字). 조조를 섬겼음.- [註 514]
풍도(馮道) : 후주(後周) 때 사람. 지조가 없어 4성 10군(四姓十君)을 섬겼음.- [註 515]
총재(冢宰) : 이조 판서.- [註 516]
병용(柄用) : 중용(重用)하여 정권을 잡게 함.○大司憲趙觀彬上疏, 略曰:
莫大者, 惟君臣、父子之倫, 所在致死, 惟義是視。 臣以臣父之子, 爲殿下之臣, 而又不能盡言, 則是死其父也, 忘其君也。 臣豈忍爲此? 噫! 丁未之追削, 非殿下之所樂爲, 特迫於光佐之脅持, 而兩家之至今未復, 亦非殿下之所樂爲, 特拘於彼輩之操切也。 以吾君至仁至明, 不免爲凶黨所欺蔽, 處分終歸斑駁, 義理漸至晦塞, 寧不痛哉? 臣得見《勘亂錄》, 以麟、亮十賊, 爲逆魁, 而十賊特幺麽狂狡之類耳。 若使當日將相, 盡是殿下親信之人, 而果有與國安危之心, 則雖有麟佐、希亮輩千萬, 亦安敢一朝猖獗, 肆然爲長驅犯闕之計哉? 必有巨凶、大慝, 從中立謀, 借其機而助其勢者, 此所以婦孺之愚, 皆以光佐、森, 爲戊申之逆魁者也。 若光佐之罪狀, 莫詳於李亮臣十二條臚列之疏。 至於不設侍藥廳之凶計, 尤爲其莫大之罪案, 而其所自明之言, 亦不能盡掩其情節。 至今戴頭, 偃息自如, 猶可謂國有法乎? 雖以渠被告時事言之, 少無惶縮之意, 延攬賓客, 自同平人, 卿宰輻輳, 車馬駢闐, 至使按獄之委官, 再候於胥命之私次, 其氣勢權力, 據此可見。 若使復擅朝柄, 安知他日之禍, 不甚於戊申也? 森之屢出賊招, 固無可生之理, 而亦有情節之可疑者。 遣姪子往議之說, 始出賊口, 而敢於下詢之際, 以十餘歲庶姪, 何所知識爲對。 森之有長成庶姪三人, 衆所共知, 而只擧十餘歲稚兒, 明有隱諱之情。 論以鞫體, 渠焉敢逭? 且必雄之變, 必待森復掌親兵之日者, 亦國人所甚疑惑, 申兼濟之擊去京兆三堂, 以爲變幻將任之機者, 此尤森可疑之一緊關也。 今之主蕩平者, 自在韋布, 嘗主此論, 臣亦以爲其心, 未必出於眞欲誤國, 而見處不明, 用處不正。 非不知士類爲是爲忠, 而乃反陽與陰排, 非不知彼輩爲非爲逆, 而類多洗濯吹噓。 今殿下惑於其說, 擧國而聽, 責以祛黨之效, 期以建極之治。 陰陽定分, 固非人力所可變改, 而別有非陽非陰之物, 與陰陽列而爲三, 進不得爲君子, 退不得爲索性小人, 此所以近來蕩黨之號, 作一新般色目者也。 一自蕩黨之出, 氣像頓變, 風節蕩然, 君讎國賊, 置之相忘, 美官好爵, 惟意所欲, 若此不已, 其將人不人而國不國矣。 不幸値國家之變故, 權凶如莾、卓者, 利啗而威喝之, 則大而苟彧、陳羣爲謀主而効力, 小而文蔚、馮道奉寶冊而稱臣, 思之及此, 不覺氣短心寒。 尤可痛者, 其人之自任者如何, 殿下之倚毗者如何, 而不思血誠扶國之道, 只懷騁私謀身之計。 當戊申變亂之際, 雖不可謂全無其功, 而經營計較, 誑惑上下。 嘗謂臣從兄曰: "開悟君心, 引進善類, 惟我在耳。" 又語奔問諸臣曰: "在外賊不足慮, 帽下賊最可憂。" 及夫變亂之稍定, 不能脫灑於本色, 其所扶植, 無非向所謂帽下賊之類, 所謂休戚之臣, 亦若是乎? 按鞫事體, 何等嚴急? 而罪囚訊問, 置諸心外, 詩句酬唱, 便作閑致, 其慢忽於獄情, 應泛於國事, 從可知矣。 且其護法之家弟、傳法之銓長, 運用機括, 如出一手。 逆鏡不以疏誅之論, 專出於愛護六賊之計, 光佐當今領袖之稱, 亦出於不忍顯斥之意, 其處心持論, 可謂崎嶇之甚矣。 至若宋寅明, 則慜有甚焉。 方其變亂之始發也, 敢請逆徵之直斬, 終致端緖之莫究, 人心憤惋, 至今未已。 而彼以自中之一凡類, 不時驟擢, 致位冡宰, 恩遇曠絶, 涯分濫溢。 在渠之道, 惟當體國以公平之政, 飭己以謙挹之道, 而政注循私, 不可殫記, 勢力傾世, 無敢誰何。 至於太僕提擧, 素稱腴官, 而故爲留窠, 畢竟自占, 其放肆鄙陋, 不忍正視, 而此猶小事。 始則自許以割斷鏡黨, 終乃次第拂拭, 無復區別, 甘自歸於忘君護賊之科, 吁! 亦痛矣。 若其貪權好勢, 尤有不可說者。 士類之聲罪光佐也, 寅明實助之, 其意似嚴於懲討, 而及至柄用, 亦循光佐餘套, 則其所以排光佐者, 非惡其凶也, 欲奪其權也。 始與首相, 結爲蕩平之套, 其口如蜜, 其心如漆, 及其勢位漸逼, 又募得臺官, 暗售斥逐之謀。 觀其頭勢, 若不擧國而獨擅, 則猶不饜矣, 臣竊憂之。
疏入, 右議政趙文命, 卽出城納命召。 政院啓達之, 命遣史官還授之, 令觀彬來待。
- 【태백산사고본】 23책 30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8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註 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