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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29권, 영조 7년 5월 19일 신사 1번째기사 1731년 청 옹정(雍正) 9년

실록을 완성 후 시정기를 세초하는 문제 등을 의논하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응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이 아미 완성되었는데 아직도 세초(洗草)177) 하지 못하였으니, 사연(賜宴)하는 한 절차는 그 시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석실(石室)에 봉안한 후에 시정기(時政記)178) 는 마땅히 즉시 세초해야 합니다."

하고, 한림(翰林) 홍창한(洪昌漢)은 말하기를,

"예로부터 시정기는 세초할 필요가 없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선배로서 이 직책에 있었던 사람들이 세초를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은 대개 권질(卷帙)이 많아 보관하기가 어렵고 실록을 이미 완료하면 남겨 두어도 무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의 실록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세초할 때 매몰(埋沒)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연된 것이니, 뜻한 바가 있는 것이다. 시정기를 한결같이 관중(館中)에 보관(保管)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속히 세초하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지금 한재(旱災)가 몹시 긴박한 상태이라 샘물이 다 마르고 전답(田畓)이 모두 갈라져 백성들이 모두 비를 바라고 있습니다. 근일 일변(日變) 및 우박의 재변도 또한 매우 마음에 놀라운데 늙은 농부에게 들으니 크게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합니다. 여러 해 풍년이 든 나머지에 곡식이 천하다가 귀하게 되는 것은 예사입니다.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것은 묘당(廟堂)에 달려 있고, 정성을 다하여 수성(修省)함은 성상께 달려 있습니다. 올해는 신해년179) 인데, 옛날 현종(顯宗) 때 이 해에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정성을 다해 구제하였고, 또 기근(饑饉)과 여역(癘疫)으로 백성들이 많이 요사(夭死)하자 특별히 명하여 동서(東西) 두 교외(郊外)에 단(壇)을 설치하여 뇌제(酹祭)를 특별히 내렸으니, 대성인(大聖人)의 백골에까지 미친 덕은 유명(幽明)을 감읍(感泣)시키기에 족하였습니다. 세성(歲星)이 다시 돌아와 또 이 해를 만났으니 허다한 원울(冤鬱)의 기운이 위로 천화(天和)를 해쳐 재변을 부를지 어찌 알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그 귀신(鬼神)이 아니면 제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전하의 적자(赤子)이니 마땅히 민휼(愍恤)하는 전례(典禮)를 행해야 할 것입니다. 선조(先朝) 정축년180) 에도 역시 강도(江都)에서 전사(戰死)한 사람에게 제사를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신은 단을 설치해 사뢰(賜酹)하는 것이 역시 족히 화기(和氣)를 이끌어 맞이하는 단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실로 내 마음을 감동시킨다. 현묘조(顯廟朝)의 고사(故事)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왕자(王者)가 백성을 돌보는 것은 살고 죽은 차이가 없다. 해조로 하여금 단을 설치하여 치제(致祭)함이 옳다."

하고, 이어 승지 조명신(趙命臣)을 입시하라 명하여 전옥(典獄)으로 달려가 옥에 있는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9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5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과학-천기(天氣) / 농업-농작(農作) / 역사-편사(編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풍속-예속(禮俗) / 사법(司法)

  • [註 177]
    세초(洗草) : 존치(存置)할 가치가 없는 문서(文書)를 없애버림. 실록(實錄)이나 선원보략(璿源譜略)의 편찬을 마치고 그 원고(原稿)의 폐기, 또는 정세 변동이나 기휘 저촉(忌諱抵觸)에 의하여 보관할 필요가 없는 문서의 폐기 등을 이르는 말. 초(草)했던 원고나 폐기 문서를 물에 빨아 먹물을 빼고 환지(還紙)를 만드는 데 이용하였으므로 세초(洗草)란 말이 생겼음.
  • [註 178]
    시정기(時政記) : 정무(政務) 가운데서 역사의 자료가 될 만한 것을 사관(史官)이 채록(採錄)한 것. 정기(政記).
  • [註 179]
    신해년 : 1731 영조 7년.
  • [註 180]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辛巳/上御召對。 講畢, 應敎金尙星曰: "先朝實錄已成, 而尙未洗草賜宴一節, 此非其時。 然今於奉安石室之後, 時政記, 宜卽洗草也。" 翰林洪昌漢曰: "自古有時政記, 不必洗草之議, 而先輩之居是職者, 不以洗草爲爭執, 蓋卷帙浩多, 藏之爲難, 實錄旣了, 留亦無益故也。" 上曰: "先朝實錄, 事體至重, 洗草之時, 不宜埋沒, 故尙今遷就, 意故有在。 而時政記, 不宜一向留置於館中, 速令洗草可也。" 尙星曰: "顧今旱災悶迫, 井泉俱涸, 田疇皆坼, 民情擧皆望雨。 近日日變及雹災, 亦極驚心, 聞之老農, 以爲大無之兆云, 屢豊之餘, 穀賤則貴, 乃其常也。 儲積有備, 在於廟堂, 對越修省, 在於聖上。 而今年, 卽辛亥也, 昔在顯廟朝, 此歲適大無, 竭誠救濟, 而又以饑饉癘疫, 民多夭札, 特命設壇於東西二郊, 別賜酹祭, 大聖人及骨之德, 有足以感泣幽明。 歲星環回, 又當此歲, 亦安知無許多冤鬱之氣, 上干天和, 召致災沴耶? 傳云: ‘非其鬼不祭。’ 而此則皆殿下之赤子也, 宜施愍恤之典。 先朝丁丑, 亦有江都戰亡人致祭之擧。 臣意則設壇賜酹, 亦足爲導迎和氣之端矣。" 上曰: "所達實感予心。 顯廟故事, 予未及知之, 王者恤民, 無間存沒。 令該曹, 設壇以祭可也。" 仍命入侍承旨趙命臣, 馳往典獄, 釋輕囚之在獄者。


  • 【태백산사고본】 22책 29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5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과학-천기(天氣) / 농업-농작(農作) / 역사-편사(編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풍속-예속(禮俗)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