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29권, 영조 7년 3월 25일 무자 3번째기사
1731년 청 옹정(雍正) 9년
홍치중이 양역 변통의 일을 아뢰다. 노비 종부·종모법을 정하라고 명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홍용조(洪龍祚)가 군액(軍額)에 궐원이 많고 양정(良丁)을 얻기 어렵다 하여 다른 고을로 이송하기를 청하였고, 도신(道臣)이 장문(狀聞)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정사와는 다름이 있어 해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호적법(戶籍法)을 엄중히 하여 민호(民戶)가 줄어드는 것을 금하며, 원우(院宇)를 줄이고 투속(投屬)하는 폐단을 금한 연후에 양역(良役)을 변통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금하라 명하고, 원유(院儒)들이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는 경우가 있으면 그 상소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또 남자는 부역(父役)을 따르고 여자는 모역(母役)을 따르는 것으로 공사천(公私賤)의 법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9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49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사법-법제(法制) / 신분-천인(賤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