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27권, 영조 6년 7월 5일 임신 1번째기사
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묘터는 의릉 아래에 정하다. 신하들이 임시 방편으로 원기를 붙들도록 청하다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 등이 복명(復命)하기 위해 입시(入侍)하여 산릉(山陵)은 의릉(懿陵)191) 의 하혈(下穴)에 정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죄인(罪人) 김남복(金南復)과 나숭열(羅崇說)은 요란스레 승관(承款)192) 을 한 뒤에 경폐(徑斃)193) 하여 정법(正法)194) 에 처하지 못하였으니, 노적(孥籍)195) 의 형전(刑典)을 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大臣)과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합사(合辭)하여 권도(權道)를 좇아 원기(元氣)를 돕도록 간청하고, 어유귀(魚有龜)는 아뢰기를,
"지금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았다가 혹시라도 건강에 손상을 입게 되면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영혼이 반드시 척강(陟降)하는 가운데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달 27일 밤에 시질(侍疾)하고 있는데 자전(慈殿)께서는 내 몸이 혹시라도 더위에 손상될까 염려하여 창문을 열어 놓으라고 하셨는데, 평일에 진념(軫念)하여 주시는 지극한 뜻을 내 어찌 우러러 받들지 않을까마는, 계체(繼體)196) 의 의리가 중한데 미진(未盡)한 점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1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식생활(食生活)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