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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3월 9일 정축 2번째기사 1730년 청 옹정(雍正) 8년

세자와 옹주를 매흉한 궁인들을 인정문에서 친국하다

임금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元任大臣) 및 금오(金吾)의 당상(堂上)·포도 대장(捕盜大將)을 명초(命招)하여 3경(三更)에 매흉(埋凶)070) 한 궁인(宮人) 순정(順正)세정(世貞) 등을 인정문(仁政門)에서 친국(親鞫)하였다. 그 이튿날 임금이 장전(帳殿)에 나아가자, 홍치중(洪致中)·이태좌(李台佐)·이집(李㙫)이 나아가 부복(俯伏)하였다. 임금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기를,

"말을 하고 싶으나 마음속이 먼저 나빠지니 마땅히 진정시키고 말하겠다. 이는 외간(外間)의 일과 다른 것이니, 사관(史官)은 상세히 듣고서 상세히 기록하도록 하라.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순정(順正)이란 이름의 한 궁인(宮人)이 있었는데, 성미가 불량하여 늘 세자(世子) 및 세자의 사친(私親)에게 불순(不順)한 짓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쳐 버렸다. 신축년071) 에 건저(建儲)한 뒤 궁인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도로 들어오도록 했는데, 혹은 마음을 고쳤으리라고 생각했다. 갑진년072) 에 사복(嗣服)한 뒤에는 세자 및 두 옹주(翁主)를 보양(保養)하게 하다가 세자 책봉(冊封) 뒤에 그를 옹주(翁主房)에 소속시켰으므로 동궁(東宮)의 나인(內人)이 되지 못한 것 때문에 항시 마음속으로 앙앙불락하였으니, 이른바 기심(忮心)073) 이 있는 자였던 것이다. 대개 신축년 겨울의 일이 한밤중에 일어났는데, 궐녀(厥女)에게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의심스러운 것을 가지고 남을 죄주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그냥 두고 묻지 않았다. 그 뒤 행약(行藥)한 한 가지 일이 나온 뒤로 궐녀가 매번 이 일에 관해 들을 적마다 안색이 바뀌는 일이 없지 않았으니, 마치 춘치자명(春稚自鳴)074) 과 같은 격이었다.

재작년 원량(元良)의 병이 증세가 자못 이상하게 되었을 적에 도승지(都承旨) 또한 ‘의원도 증세를 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진실로 의심했지만 일찍이 입에 꺼내지 않았고, 지난 번 화순 옹주(和順翁主)가 홍진(紅疹)을 겪은 뒤에 하혈(下血)하는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마음에 괴이하게 여기며 의아해 하다가, 이제 와서야 비로소 독약(毒藥)을 넣어 그렇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미 세자(世子)의 사친(私親)에게 독기(毒氣)를 부렸기 때문에 세자가 점점 장성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또 다시 흉악한 짓을 하였고, 강보(襁褓)에 있는 아이인 4왕녀(王女)에게도 또한 모두 독약을 썼다. 나의 혈속(血屬)을 반드시 남김없이 모두 제거하려 했으니,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아니한가? 정명(正命)으로 죽어도 오히려 애통하기 짝이 없거늘, 하물며 비명(非命)에 죽는다면 부모가 된 사람의 마음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신축년의 일은 내가 제기해 말하고 싶지 않으나, 무신년부터 흉악한 짓을 하기 시작하여 이미 원량(元良)을 해쳤으니, 그가 아무리 지극히 흉악한 사람이라 해도 또한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반드시 4왕녀를 모두 독살(毒殺)하고야 말려 했으니, 그의 마음의 소재가 어찌 너무나도 음흉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만일 원량에게 독약을 쓴 일이 없었다면 금내(禁內)에서 다만 마땅히 장살(杖殺)하고 말았을 뿐이겠지만, 동궁에게 흉악한 짓을 한 정상이 이번에 이미 탄로났고 금내에서 구문(究問)하자 그가 또한 지만(遲晩)으로 납초(納招)하였으니, 만일 이런 일이 명백하여 의심없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겠는가? 접때 거동했을 때 금내에서 파수(把守)하는 일이 있어 비로소 수상한 흔적이 있음을 알게 되어 내가 빈궁(嬪宮)으로 가는 길에 잡게 되었는데, 대저 창경궁 근처는 한 조각도 말끔하고 깨끗한 땅이 없었다. 그로 하여금 매흉(埋凶)한 곳을 가리키도록 하여 파 보았더니, 뼛가루와 뼛조각 그리고 쇠기름 같은 것이 곳곳마다 있었고, 빈궁 및 옹주방(翁主房)의 담장 밖에도 모두 묻은 데가 있었으니, 이 얼마나 흉악한 뱃속이란 말인가?

궐녀는 성질이 본래 흉악하여 다른 궁인(宮人)을 사주하여 동류들을 욕하게 하였고, 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어 세자 및 세자의 사친(私親)을 욕하기까지 하였다. 한문제(漢文帝)가 ‘나는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 아들이다.’라고 했거니와, 궐녀가 침욕(侵辱)한 뜻은 대개 항시 능모(凌侮)하는 마음을 가졌던 데서 나온 것이다. 그가 세자를 보양(保養)한 것은 2세에서 7세까지였다. 그러므로 결코 이런 흉악한 일은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어찌 그가 이처럼 낭자하게 흉악한 짓을 할 줄 생각이나 했으랴? 죄인 순정(順正) 및 함께 음모한 복랑(福娘)·구월(九月)·김덕이(金德伊) 네 사람을 내수사(內需司)에 가두고, 세정(世貞)·거어지(去於之)·박경유(朴景裕) 세 사람을 단봉문(丹鳳門) 밖에 대령하도록 하고 도사(都事)를 보내어 잡아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니, 홍치중(洪致中)·이태좌(李台佐)·이집(李㙫)·조현명(趙顯命) 등이 모두들 끝까지 다스려 실정을 알아내고 법대로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순정을 국문(鞫問)하니 흉악한 짓을 한 정절(情節)을 낱낱이 직초(直招)하였으므로, 결안(結案)을 만들어 무기고(武器庫) 앞에서 처참(處斬)하였다. 그 결안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감히 궁내(宮內)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제멋대로 악한 짓을 했고 집에 있으면서도 죄를 저질렀습니다. 신축년 저위(儲位)를 이어받으신 뒤에는 구악(舊惡)을 씻어주시고 다시 입궐(入闕)을 허락하셨으니 은혜가 지극히 두터웠습니다. 그런데도 그전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서 감히 매흉(埋凶)하였고, 동궁께도 흉악한 짓을 하여 흉악한 마음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또 빈궁(嬪宮)과 강보(襁褓)에 있는 모든 옹주(翁主)에게까지 흉악한 짓을 하여, 국가의 혈속(血屬)을 반드시 남겨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신명(神明)은 흉악한 짓을 돕지 않는 법이라 흉악한 흔적이 성감(聖鑑)에 잡혀 낱낱이 실토(實吐)하였던 것이니, 아무리 은휘(隱諱)하려 한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친하게 지내는 과부(寡婦) 세정(世貞)이 들여보낸 흉하고 더러운 물건으로 대궐 안에서 흉악한 짓을 해 모해(謀害)하려 한 것이 적실합니다."

하였다. 죄인 세정을 국문하였다. 세정은 곧 여항(閭巷)의 과부로 순정과 친밀했는데, 뼛가루를 구하면 편지 봉투에 싼 뒤 거어지(去於之)란 이름의 사람을 시켜 매번 순정에게 전해 준 자이다.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발명(發明)하다가 복랑(福娘)과 대질(對質)시키자 말문이 막혔다. 낙형(烙刑)을 가하자, 비로소 고하기를,

"뼛가루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순정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르,

"이른바 뼛가루란 무슨 뼛가루이고 어디서 구한 것이냐?"

하니, 말하기를,

"세교(細橋)에서 거름을 지는 사람인 김중청(金重淸)에게서 구했습니다."

하였다. 또 국문하기를,

"복랑의 말에 ‘흰 가루와 검은 가루가 있다.’고 하였다. 흰 가루는 사람뼈일 것이나 검은 가루는 과연 무슨 뼈이냐?"

하니, 말하기를,

"검은 가루는 곧 여우 뼈인데 이도 또한 김중청에게서 구했습니다."

하였다. 순정(純正)과 결탁하여 궁중(宮中)에 흉악한 짓을 하여 동궁(東宮)을 모해(謀害)한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은 다음 법대로 처참(處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5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91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사법-재판(裁判) / 변란(變亂)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70]
    매흉(埋凶) : 특정인이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리도록 저주(咀呪)하는 의미로 흉한 물건을 만들어 일정한 곳에 파묻는 것.
  • [註 07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072]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註 073]
    기심(忮心) : 남을 시기하여 해롭게 하려고 하는 마음.
  • [註 074]
    춘치자명(春稚自鳴) : 봄철의 꿩이 스스로 운다는 뜻으로, 시키거나 요구하지 않아도 제스스로 함을 말함.

○上命招時原任大臣及金吾堂上捕盜大將, 三更, 親鞫埋凶宮人順正世貞等於仁政門。 翌日, 上御帳殿, 洪致中李台佐李㙫進伏。 上嗚咽流涕曰: "欲試言之, 而方寸先惡, 當鎭定而言之。 此異於外間事, 史官詳聞而詳記之。 自在潛邸時, 有一宮人名順正, 性道不良, 常於世子及世子之私親, 多有不順之事, 故黜之矣。 辛丑建儲後, 宮人不備, 故更令還入, 或意其改革心矣。 甲辰嗣服後, 使之保養世子及兩翁主, 而世子冊封之後, 則使渠屬於翁主房, 故以不得爲東宮內人, 心常怏怏, 俗所謂忮心者也。 蓋辛丑冬間事, 出於半夜之間, 厥女不無可疑之端, 而予不欲以疑罪人, 故置而不問矣。 其後行藥一節, 出後, 厥女每聞此等事, 則不無色動之事, 有同春雉自鳴矣。 再昨年, 元良之病症涉殊常, 都承旨亦不曰: ‘醫不能執症。’ 云耶? 予固疑之, 而未嘗發口矣, 向者和順翁主經疹後, 有下血之症, 故心甚怪訝, 到今始知其寘毒而然矣。 渠旣逞毒於世子之私親, 故不悅世子之漸長, 又爲行凶, 而至於四王女襁褓之兒, 而亦皆寘毒。 予之血屬, 必欲無遺盡除, 豈不凶慘乎? 以正命而死, 猶爲痛迫, 況死於非命, 則爲父母之心, 當復如何耶? 辛丑年事, 予不欲提說, 而自戊申始爲行凶, 旣害元良, 則雖渠至凶, 亦可休矣。 而必欲盡毒四王女而後已, 其心所在, 豈不萬萬凶獰? 若無寘毒元良之事, 則自內但當杖殺之而已, 而行凶東宮之狀, 今旣綻露, 自內究問, 渠亦遲晩納招, 此若非明白無疑, 則豈至於設鞫之擧乎? 向日擧動時, 有自內把守之事, 始知有殊常之跡, 而予於嬪宮去路, 乃爲捉得’, 大抵昌慶宮近處, 無一片乾凈之地。 使渠指示埋凶處而掘之, 則骨末骨片及如牛脂之物, 處處有之, 嬪宮及翁主房墻外, 皆有所埋, 此何凶腸耶? 厥女性本凶惡, 嗾他宮人, 辱其同類, 高聲發怒, 至辱世子及世子之私親。 文帝曰: ‘我高皇帝側室之子也。’ 厥女侵辱之意, 蓋出於常有凌侮之心故也。 渠之保養世子, 自二歲至七歲。 故謂決不爲此等凶事。 豈意其行凶, 若是狼藉乎? 罪人順正及其同謀福娘九月金德伊四人, 則囚於內司, 世貞去於之朴景裕三人, 則待令於丹鳳門外, 遣都事拿來可也。" 洪致中李台佐李㙫趙顯命等, 皆請窮治得情, 以正其法。 於是, 鞫問順正, 行凶情節, 箇箇直招, 捧結案處斬於武庫前。 其結案曰:

殿下潛邸時, 敢高聲肆惡於宮內, 作罪在家, 辛丑承儲之後, 滌其舊惡, 更許入闕, 恩至厚也。 而不悛舊習, 敢爲埋凶, 和凶於東宮, 凶心不除。 又行凶於嬪宮。 諸翁主至及襁褓, 國家血屬, 必欲無遺。 神不助凶, 凶贓見捉於聖鑑, 一一吐實, 雖欲隱諱, 其可得乎? 凶穢之物, 所親寡婦世貞之入送者, 行凶闕中, 謀害的實云云。

問罪人世貞, 世貞卽閭巷寡女, 而與順正親密, 得骨末, 裹之書封, 使去於之爲名者, 每每傳給順正者也。 初則以無是事發明, 及與福娘面質, 語屈。 施烙刑, 始告曰: "以骨末殺人之法, 敎順正矣。 上曰: "所謂骨末, 何骨末也?" 問從何得之。 曰: "得之於細橋輦糞者金重淸矣。" 又問, 福娘以爲: "有白黑末。" 云。 白則人骨, 黑是何骨? 曰: "黑是狐骨, 此亦得之重淸矣。" 以締結順正, 行凶宮中。 謀害東宮, 捧結案後, 處斬如法。


  • 【태백산사고본】 20책 25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91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사법-재판(裁判) / 변란(變亂)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