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 세자를 장사지내다. 시민당에 나아가 망곡을 행하고, 백관들은 집양문 밖에서 곡하다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장사지냈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망곡(望哭)을 행하였고, 백관(百官)들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곡하였다. 묘(墓)는 파주(坡州)의 순릉(順陵) 왼쪽 언덕에 있는데, 을좌(乙坐)·신향(辛向)이고, 외안산(外案山)은 묘좌(卯坐)이다. 무신년067) 12월 9일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선릉사(先陵祠)의 후토신(后土神)에게 고하고, 풀을 베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15일에 옹가(瓮家)068) 를 짓고 21일에 금정(金井)069) 을 열었는데, 혈(穴)의 깊이는 8척(尺) 9촌(寸)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했다.】 이었다. 그리고 광(壙)을 파는 일을 끝마친 뒤 외재실(外榟室)을 내렸다. 정월 26일 신미(辛未) 묘시(卯時)에는 묘소(墓所)의 찬실(攅室)을 열었다. 하루 전날 전설사(典設司)에서 길유궁(吉帷宮)을 정자각(丁字閣) 영유궁(靈帷宮)의 서남향(西南向)에 설치하였는데, 장막을 치고 남쪽에 유문(帷門)을 두었다. 당일 전의(典儀)가 궁관(宮官) 및 익위사(翊衛司) 관원들의 위차(位次)를 유문(帷門) 밖에 북향(北向)해서 설치하고, 찬의(贊儀)·인의(引儀)의 위차를 평상시처럼 설치하였다.
전설사(典設司)에서는 재실(榟室)을 안치할 악차(幄次)을 현실(玄室) 문 밖에 남향(南向)으로 설치하고, 유사(攸司)는 욕석(褥席)을 악(幄) 안에 설치하였다. 전의(典儀)는 참찬(參贊)이 옥백(玉帛)을 올릴 위차(位次)를 악(幄)의 동쪽에다 북쪽 가까이 서향(西向)하여 설치했고, 애책(哀冊)을 들 관원과 옥백(玉帛)을 들 관원의 위차(位次)를 그보다 남쪽으로 조금 물려 서향(西向)으로 북쪽이 위가 되게 설치하였다. 또 정자각(丁字閣)의 영장궁(靈帳宮) 유문(帷門) 밖에 길흉 거여(吉凶車轝)를 발인(發靷) 및 의장 명기(儀仗明器)를 발인(發靷) 때의 의식대로 진설하였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올리자 영좌(靈座) 앞에 설치했고, 향로(香爐)와 향합(香盒)과 촛불까지 그 앞에 설치하였다. 축문(祝文)을 영좌의 왼쪽에 두고 준(樽)을 영장궁(靈帳宮) 동남(東南)쪽에 북향(北向)으로 설치하였으며, 잔(盞) 셋을 준소(樽所)에 두었다. 방상씨(方相氏)070) 가 먼저 들어와서 현실(玄室)에 이르러 창[戈]으로 네 구석을 쳤고, 명기(明器)·복완(服玩)·증옥(贈玉)·증백(贈帛) 등의 물건이 이르자 현실 문 밖 동남쪽에 북쪽을 위로 하여 설치하였다.
인의(引義)가 궁관(宮官) 이하를 인솔해 들어가서 위차(位次)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재배(再拜)를 마치자 대전관(代奠官)이 세 번 향(香)을 올리고, 술을 따라 영좌(靈座) 앞에 올렸다. 대축(大祝)이 축문(祝文)을 읽고 이를 마치자 궁관(宮官) 이하가 곡하며 슬픔을 다하였다. 유사(攸司)가 찬(饌)을 거두고 축문을 감(龕)에 묻자, 인의(引儀)가 참찬(參贊)을 인솔하여 꿇어앉아 찬도(攅塗)를 열 것을 아뢰었다. 선공감(繕工監) 관원이 찬도를 걷자 참찬(參贊)이 수건으로 재실(榟室)을 닦았다.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영좌(靈座) 앞에 꿇어앉자 찬(贊)이 좌(座)에서 내려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내시(內侍)가 교명책인(敎命冊印) 및 시책인(諡冊印)을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자 각각 요여(腰轝)에 두었고,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받들어 집사자에게 주자 각각 향정(香亭)에 두었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여(轝)에 봉안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로 두고서는 받들어 길유궁(吉帷宮)으로 나아가니, 섭상례(攝相禮)는 꿇어앉았고 찬(贊)은 여(轝)에서 내려 좌(座)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영좌(靈座)에 봉안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에 두었다. 책인(冊印)·향로(香爐)·향합(香盒) 등의 물건은 의식(儀式)대로 영좌(靈座) 앞에 두었고, 길장(吉仗)은 유궁문(帷宮門) 밖 좌우에 진설하였다.
섭상례가 나아가 재실(榟室) 앞에 꿇어앉으니, 찬(贊)이 순(輴)에 올려 현실(玄室)로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내시(內侍)가 애책함(哀冊函)을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어 요여(腰轝)에 안치했고, 순(輴) 앞에 세웠다. 충의위(忠義衛)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앞을 인도하자, 참찬(參贊)이 재실(榟室)을 마주들 관원 등을 인솔하여 재실을 받들어 순에 올렸다. 섭상례가 앞을 인도하며 삽(翣)을 받들고는 그 삽으로 재실을 가렸으며, 여사(轝士)가 순을 받들어 나아갔다. 인의(引儀)가 궁관(宮官) 이하 및 배종(陪從)했던 백관(百官)들을 인솔하여 곡하며 따라가 연도(羨道)071) 의 남쪽 봉사위(奉辭位)에까지 이르렀다. 순(輴)이 현실(玄室)의 방목(方木) 위에 이르자 녹로대(轆轤臺)를 이용하여 재궁(榟宮)을 받들어 내렸는데, 내시(內侍)가 관의(棺衣)를 덮고 명정(銘旌)을 가져와서 강(杠)을 제거한 다음 그 위에 놓았다. 인의(引儀)가 참찬(參贊)을 인도하여 옥백위(玉帛位)로 나아가니, 애책(哀冊)을 받든 관원과 옥백(玉帛)을 받든 관원이 그들을 따랐다. 참찬(參贊)이 재실(榟室)을 마주들 관원 등을 거느리고 윤여(輪轝)로 재실(榟室)을 대관(大棺) 안에 봉안하여 북쪽으로 하였다. 참찬(參贊)이 내시(內侍)를 거느리고 다시 관의(棺衣)·명정(銘旌)을 정돈하여 평평하고 바르게 하자, 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가 그 소속을 인솔하여 보불삽(黼黻翣)·화삽(畫翣)을 재실(榟室) 양쪽가에 세웠으며, 집사자(執事者)가 명기(明器)·복완(服玩) 등의 물건을 각각 차례대로 올렸다.
묘소 도감 제조(墓所都監提調)가 그 소속을 인솔하여 현실(玄室)을 자물쇄로 잠그자, 참찬(參贊) 및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함께 자물쇄로 잠그는 것을 감독하였다. 【장령이 신(臣)이라 일컬으며 서명(署名)했다.】 참찬(參贊)이 흙 9삽을 덮고 이어 회(灰)를 쌓아 막았다. 또 애책(哀冊)을 가지고 들어가 꿇어앉아 퇴광(退壙)의 서쪽에 두었으며, 증옥(贈玉)과 증백(贈帛)을 넣은 함(函)을 꿇어앉아 애책(哀冊)의 남쪽에 두었다. 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가 그 소속을 거느리고 명기(明器)·복완(服玩) 등 제구(諸具)를 받들어 각각 차례대로 진설하였고, 묘소 도감(墓所都監)에서는 지석(誌石)을 내렸다. 【묘(墓) 남쪽의 가까운 땅에 묻었는데, 석상(石床)의 북쪽이다.】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세자(世子)의 휘(諱)는 행(緈)이고 자(字)는 성경(聖敬)이며, 기해년072) 숙종(肅宗) 45년 2월 15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그를 잉태하게 되자, 꿈속에서 상서로운 새가 방에 모여드는 것을 보았고, 다시 금빛 거북을 보기도 하였으니, 곧 정빈 이씨(靖嬪李氏)가 낳은 바이다. 겨우 두 서너 살 때 마치 어른과 같음이 있어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났다. 신축년073) 가을 저사(儲嗣)의 명(命)을 받들고 입궐(入闕)하게 되었을 적에 세자(世子)는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으므로 어린 나이라 능히 따라서 궐중(闕中)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우선 사제(私第)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런데 장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꿈속에서도 자주 불러대었으며, 혹 울부짖음으로 인하여 목이 메이기도 했던 것은 효친(孝親)의 마음이 천성(天性)에 근본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 입궐(入闕)한 뒤 동조(東朝) 양전(兩殿)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응대(應對)하는 것이 울림이 소리에 응하듯 했으므로, 삼전(三殿)께서 기특히 여기시고 사랑하셨다. 갑진년074) 겨울에 비로소 경의군(敬義君)에 봉하였고, 을사년075) 봄에 저부(儲副)076) 에 올려서 책봉했으니, 곧 나의 원년(元年)이었고 나이 겨우 일곱 살 때였다. 그러나 대체로 대정(大庭)에서 예(禮)를 행하고 정당(正堂)에서 하례(賀禮)를 받을 때에 이르러 행동과 주선이 예절(禮節)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본성(本姓)이 그러했던 것이다. 어찌 평상시의 가르침이 미친 바이겠는가?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있으면서 이 이극(貳極)077) 를 이어받았는데도 비단 궁료(宮僚)를 접대할 때뿐만이 아니라 중관(中官)과 더불어 거처하면서도 의젓한 대인(大人)과 같아 일찍이 장난하고 논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소내관(小內官)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 말로 따지고 거조(擧措)가 근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자가 묵묵히 한참 동안 보다가 다른 중관(中官)을 불러 ‘이 내관은 모름지기 다시 시중들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중관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그 까닭을 청해 물으니, 곧 말하기를, ‘조금 전에 내 앞에서 서로 따졌는데 공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중관이 청하기를, ‘이것은 대조(大朝)께 여쭈어 경칙(警飭)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그가 잠깐 사이에도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평상시에는 중관과 더불어 강학(講學)하거나 글씨를 썼고 나이 젊은 내관(內官)과 더불어 놀지 아니하였으며, 언제나 노성(老成)한 중관과 더불어 거처하였으니, 그 상정(常情)을 초월한 것이 한결같았다. 무릇 여러 가지 완호물(玩好物)에 잠심(潛心)하는 법이 없었고, 항상 말하기를, ‘비록 볼 만한 것이라 해도 한번 보면 되는데 어찌 반드시 마음에 둘 것인가?’라고 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문신종(問辰鐘)을 올렸으나 이것 역시 한 번 보았을 뿐이었고 그냥 서당(書堂)에 두었다. 젊은 한 내관(內官)이 보고서 우연히 손상시키고는 이 일을 나에게 고했는데, 사건이 정상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었기에 묻지 않았다. 그런데 세자가 곁에서 웃었으므로, 내가 돌아보며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찮은 물건입니다. 그런데 하찮은 물건 때문에 사람을 벌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 때문에 웃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나도 몰래 마음속으로 감탄하고 스스로 기뻐하며 ‘세자의 기도(器度)와 관용(寬容)이 이와 같으니, 우리 동방의 복이다.’라고 하였다. 《효경(孝經)》의 강(講)을 마치고 나에게 전강(殿講)할 때 내가 ‘《효경》이란 어떤 일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 효(孝)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요지(要旨)를 알고 있음이 이와 같았다. 주연(胄筵)의 소대(召對)에 있어서 궁관(宮官)이 진달한 바가 전에 강(講)한 것일 경우 강(講)이 끝나고 나서 측근에게 묻기를, ‘전후(前後) 궁관(宮官)의 말이 어찌하여 서로 어긋나는가? 또 진달한 것은 《효경》의 아무 장(章)이 아니고, 《소학(小學)》 아무 편(篇)에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으니, 그가 잠심(潛心)하여 듣고 평상시에 유의(留意)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정미년078) 봄 알성(謁聖)하고 태학(太學)에 입학(入學)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관례(冠禮)를 행하였고 또 같은 달에는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그때 나이 9세이었는데, 강(講)하는 목소리는 맑고 명랑하였으며 행동과 예절(禮節)은 의젓하게 어른과도 같았다. 육례(六禮)를 치르던 날 일기(日氣)가 모두 청명(淸明)하길래 마음속으로 스스로 기뻐서 ‘그 형태를 보지 못하면, 그 그림자를 살피기 원하는 법이다. 모든 일이란 하루의 겨를도 어려운 것인데, 책봉(冊封) 때부터 입학(入學)·관례(冠禮)·가례(嘉禮)하는 날까지 날씨가 모두 맑고 명랑하였다. 그리고 밤이나 아침에는 비록 흐리긴 했지만, 예(禮)를 행할 때가 되면 언제나 이와 같았으니, 하늘이 종팽(宗祊)079) 을 도우심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비록 덕(德)이 적지마는 우리 나라는 희망을 가질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을 하다 이에 이르니, 나도 몰래 긴 한숨이 나온다. 언제나 새로운 식물(食物)이 있으면 차마 먼저 맛보지 않고 반드시 모두 올렸고, 아무리 병이 있어도 위중한 데 이르지 아니하면, 관세(盥洗)하고 의대(衣帶)를 갖추고서 나를 보았다. 언제나 국기일(國忌日)을 만나면 그 어린 나이에도 만약 소찬(素饌)을 갖추지 아니하면 중관(中官)을 시켜 찬(饌)을 맡은 궁인(宮人)을 불러 엄한 말로 타이르니 안팎의 사람들이 안색을 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기간의 우애(友愛)도 또한 본연(本然)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대궐 안의 사례(事例)는 거처를 달리하는 법인데 자주 찾아가 보았으며, 측근의 궁인(宮人)이 만약 화합하지 않은 말을 하면 세자가 그것이 혹시나 흘러들어가 이간시킬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나에게 고하였으니, 그 효우(孝友)의 성품은 한결같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모든 일에 미안(未安)한 일이 있으면, 당황하는 안색을 짓지 않고 중관(中官)을 시켜 엄정(嚴正)하게 효유(曉諭)하였으므로 궁인(宮人)들이 두려워하며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 병이 위독해졌을 때 그 사(師)가 들어오는 것을 듣자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용모를 단정히 하였고, 또 빈객(賓客)이 들어오는 것을 듣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힘이 부쳐 하지 못하였으니, 이에서도 또한 평일의 성품(性稟)을 볼 수 있었다. 한 번 병이 오래 끌기 시작한 뒤로부터 보사(補瀉)080) 가 서로 어지럽히고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자 탄식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고하기를, ‘세상에 명의(名醫)가 없으므로 여러 가지 약을 섞어 썼지만 한갓 번거롭게 고하게만 만들었습니다. 원하건대 다시 약을 쓰지 마시고, 조용히 스스로 정양(靜養)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그 오래 묵은 약초 뿌리를 물리치고 천명(天命)에 맡긴 것이 만약 노사(老師)·숙유(宿儒)로서 이치에 통달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미칠 수 있었겠느냐? 무릇 병세가 극심할 때 임하여 내가 내 얼굴을 그 얼굴에 갖다대며 ‘나를 알아보겠느냐?’ 하고 부르자,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하며 눈물이 뺨을 적셨으니, 진실된 효심(孝心)이 걱정이 가득한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통탄스럽다. 무신년081)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昌慶宮)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으니 곧 사기일(私忌日)이며, 나이 겨우 10세로써 이극(貳極)에 있는 지 겨우 4년이었다. 같은 해 2월 초 2일에 시호(諡號)를 의정(義定)하여 ‘효장(孝章)’이라 하고, 기유년082) 정월 26일에 예(禮)를 갖추어 파주(坡州) 조리동(條里洞) 을좌(乙坐) 신향(辛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순릉(順陵)083) 의 왼쪽 산등성이다. 아! 나의 비덕(匪德)으로 믿는 바는 오로지 원량(元良)084) 이었고,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았기에 동방(東方)의 만년의 복이 될 것을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10세 만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했겠는가? 종사(宗社)를 생각하니 아픔을 더욱 억제하기가 어렵다. 이번의 이 행록(行錄)은 다만 평일에 눈에 띄게 드러난 것을 기술한 것일 뿐이니, 어찌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본래의 일을 과장했겠는가? 내가 비록 배우지 못하였으나 이런 짓은 하지 않으며, 모두 중관(中官)이 함께 들은 바이고 조신(朝臣)이 함께 본 바인 것이다. 꿈의 상서로움에 이르러서는 비록 부회(傅會)한 데 가까우나 전후의 시장(諡狀)에 이미 이러한 말이 있었으며, 모두 내가 꿈을 꾸었던 바이므로 여기에 대략 기록한 것이다. 아! 애통(哀痛)한 가운데 생각하자니 마치 살을 베는 듯하여 대략 줄여 찬술(撰述)한 것인데,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사신(詞臣)에게 다시 지문(誌文)을 찬술하지 않게 하고, 다만 행록(行錄)에 몇 가지 문자(文字)를 첨가해 친히 돌에 새겨 넣고 유실(幽室)에 간직하게 한다. 아! 이 회포를 거의 펼 수 있겠는가? 아! 슬프고 아! 슬프도다."
하였으니, 어제(御製)였다. 현실(玄室) 왼쪽의 땅을 깨끗이 소제하고 관상감(觀象監)에서 처음처럼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영여(靈轝) 및 순(輴) 등속은 백성(柏城)085) 안의 경지(庚地)에서 불사르고 인신(人臣)과 통용(通用)하는 것은 불사르지 않았다. 재실(榟室)이 현실(玄室)로 들어갈 때 궁관(宮官) 이하 배종(陪從)한 백관(百官)들이 곡(哭)하고 재배(再拜)하였고, 또 곡하고 재배하였다. 현실(玄室)을 닫는 것이 장차 끝나려 하자, 전의(典儀)가 궁관 및 익위사(翊衛司) 관원의 자리를 길유궁(吉帷宮) 문 밖에 남쪽 가까이 북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제주관(題主官)·전의(典儀)·찬의(贊儀)·인의(引儀)의 자리를 궁관의 북쪽에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였으며, 또 찬의·인의의 자리를 궁관의 북쪽과 동쪽을 향하여 설치하되 모두 북쪽을 위로 하였다.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의 탁자(卓子) 세 개를 영좌(靈座) 동쪽·남쪽에 서쪽을 향하여 【제주 탁(題主卓)은 북쪽에 있고 그 다음은 필연탁(筆硯卓)이고 그 다음은 반이탁(槃匜卓)이다.】 설치하고 필연(筆硯)·먹·반이(槃匜) 【향탕(香湯)을 갖추었다.】 ·건(巾) 【백세저포(白細苧布)이다.】 을 갖추어 놓았다. 제주관(題主官)·전의(典儀)·찬의(贊儀)·인의(引儀)가 먼저 들어가 그 장소로 나아가자, 인의가 궁관 및 익위사(翊衛司)를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갔으며, 또 도제조(都提調) 및 예조 당상(禮曹堂上)·빈궁 도감 제조(殯宮都監提調) 각 1원(員)을 인도하였다. 승지(承旨)가 탁자 앞으로 나아가자 대축(大祝)이 영좌(靈座) 앞으로 올라가 꿇어앉은 채 우주(虞主)를 받들어 건(巾)으로 닦고 나서 탁자에 눕혀 두었다. 제주관이 손을 씻고 탁자 앞으로 올라가 서쪽을 향하여 서서 법식대로 앞면에 먹으로 쓰기를 마치자 대축(大祝)이 우주(虞主)를 받들어 궤(櫃)에 넣고 덮개를 덮어 영좌(靈座)에 봉안하였으며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두었다. 유사(攸司)가 영좌 앞에 찬(饌)을 설치하자 대축이 우주(虞主)를 받들어내어 영좌(靈座)에 설치하고 백저건(白苧巾)으로 덮었으며 호궤(護几)는 그 뒤에 두었다. 대전관(代奠官)이 술잔을 드리고 이를 마치자 대축(大祝)이 축문(祝文)을 읽고 궁관(宮官) 이하가 곡(哭)하고 재배(再拜)하였으며 대축이 우주(虞主)를 받들어 궤(櫃)에 넣었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2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01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語文學)
- [註 067]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068]
옹가(瓮家) : 장사(葬事) 때 비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임시로 뫼의 굿 위에 베푸는 뜸집. 묘상각(墓上閣).- [註 069]
금정(金井) : 무덤을 팔 때 굿의 길이와 넓이를 정하기 위해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틀을 만들어 땅위에 파들어 가는데, 그 도구를 금정틀이라 하고, 그 정해진 공간을 금정이라 함.- [註 070]
방상씨(方相氏) : 악귀(惡鬼)를 쫓는 나자(儺者)의 하나. 곰 가죽으로 된 탈을 쓰고 창과 방패를 들었는데, 장례(葬禮) 때에는 광중(壙中)의 악귀를 쫓는 데 썼음.- [註 071]
연도(羨道) : 광중(壙中)에 난 길.- [註 072]
기해년 : 1719 숙종 45년.- [註 07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074]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註 075]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註 076]
저부(儲副) : 왕세자.- [註 077]
이극(貳極) : 왕세자.- [註 078]
정미년 : 1727 영조 3년.- [註 079]
종팽(宗祊) : 종묘(宗廟).- [註 080]
보사(補瀉) : 의서(醫書)의 《소문(素問)》에 나오는 말로 부족한 바는 보충하고 남는 바는 쏟아내게 한다는 뜻. 즉 약재(藥材) 따위를 써서 치료한다는 것.- [註 08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082]
기유년 : 1729 영조 5년.- [註 083]
○辛未/葬孝章世子。 上御時敏堂, 行望哭, 百官哭於集英門外。 墓在坡州 順陵左岡, 乙坐、辛向, 外案卯坐。 以戊申十二月初九日始役, 告先陵祠后土, 斬草破土。 十五日, 作甕家, 二十一日, 開金井, 穴深八尺九寸。 【用營造尺。】 穿壙畢後, 下外梓室。 正月二十六日辛未卯時, 啓墓所欑室。 前一日, 典設司設吉帷宮於丁字閣靈帷宮之西南向, 施障, 南寘帷門。 其日, 典儀設宮官及翊衛司官位於帷門外北向, 設贊儀、引儀位如常。 典設司設安梓室幄於玄室門外南向, 攸司設褥席於幄內。 典儀設參贊進玉帛位於幄東近北西向, 捧哀冊官、玉帛官位於其南差退西向北上。 又於丁字閣靈帳宮帷門外, 陳吉凶車轝及儀仗明器, 如發靷儀。 攸司進禮饌, 設於靈座前, 設香爐、香盒, 竝燭於其前。 奠祝文於靈座之左, 設樽於靈帳宮東南北向, 寘盞三於樽所。 方相氏先入至玄室, 以戈擊四隅, 明器、服玩、贈玉、贈帛等, 至陳於玄室門外, 東南北上。 引儀引宮官以下, 入就位哭。 再拜訖, 代奠官三上香, 酌酒奠於靈座前。 大祝讀祝文訖, 宮官以下哭盡哀。 攸司撤饌, 瘞祝於龕, 引儀引參贊跪達, 啓欑塗。 繕工監官撤欑塗, 參贊以巾拭梓室。 攝相禮進靈座前跪, 贊請降座。 陞轝。 內侍捧敎命冊印及謚冊印, 授執事者, 各寘於腰轝, 捧香爐香盒, 授執事者, 各寘於香亭。 大祝捧魂帛凾, 安於轝, 虞主櫃, 寘其後, 捧詣吉帷宮, 攝相禮跪, 贊請降轝陞座, 大祝捧魂帛凾, 安於靈座, 虞主櫃寘其後。 冊印、香爐、香盒等, 寘於靈座前如儀, 吉仗陳於帷宮門外左右。 攝相禮進, 當梓室前跪, 贊請陞輴, 卽玄室。 內侍捧哀冊凾, 授執事者, 安於腰轝, 立於輴前。 忠義衛捧銘旌前導, 參贊帥舁梓室官等, 捧梓室陞輴。 攝相禮前導, 捧翣, 以翣障梓室, 轝士捧輴以行。 引儀引宮官以下及陪從百官, 哭從至羡道南, 奉辭位。 輴至玄室方木上, 用轆轤, 捧下梓宮, 內侍覆棺衣, 取銘旌, 去杠, 寘於上。 引儀引參贊, 就進玉帛位, 捧哀冊官、捧玉帛官隨之。 參贊帥舁梓室官等, 以輪轝捧梓室於大棺內北首。 參贊帥內侍再整棺衣、銘旌, 令平正, 禮葬都監提調率其屬, 以黼黻翣、畫翣, 樹於梓室兩傍, 執事者捧明器、服玩等, 各以次進。 墓所都監提調, 率其屬, 鎖閉玄室, 參贊及司憲府掌令, 竝監鎖閉。 【掌令稱臣着名。】 參贊覆土九鍤, 仍築灰以塞。 又以哀冊入跪, 奠於退壙之西, 以贈玉、贈帛凾跪, 奠於哀冊之南。 禮葬都監提調帥其屬, 捧明器、服玩等諸具, 各以次陳, 墓所都監下誌石。 【埋於墓南近地, 石床之北。】 誌文曰:
世子諱緈, 字聖敬, 己亥肅廟四十五年二月十五日申時, 生于順化坊 彰義宮私第。 及其妊娠, 夢見瑞鳥集于室, 復見金龜焉, 卽靖嬪 李氏所誕也。 甫數歲, 有若成人, 行動擧止, 超于凡兒。 辛丑秋, 承儲入闕也, 世子年纔三歲, 故沖幼之年, 趁未能同詣闕中, 姑留私第矣。 遊戲之中, 夢想之間, 頻呼也, 或因呼嗚咽者, 孝親之心, 根於天性故也。 其冬入闕之後, 侍於東朝兩殿也, 跪膝正坐, 應對如響, 三殿奇愛之。 甲辰冬, 始封敬義君, 乙巳春, 進冊儲副, 卽予元年, 年甫七歲。 而及夫大庭行禮, 正堂受賀, 動容周旋, 無不中禮, 是本性之然也。 豈常敎所及哉? 方在沖年, 承此貳極, 而非特接待宮僚, 燕居與中官處, 儼若大人, 未嘗遊戲焉。 一日小內官兩人, 相與言詰, 擧措不謹, 故世子默視良久, 招他中官而言曰: "此內官須更勿侍。" 中官莫知其由, 請問其故, 乃曰: "俄於余前相詰, 不恭故也。" 中官請以此, 稟于大朝警飭焉, 則始許。 其造次之間, 從容嚴肅若此也。 且於平時, 與中官, 講學書字也, 不與年少內官遊, 而每與老成中官處焉, 其超于常情, 一如也。 凡諸玩好, 其無潛心, 常曰: "雖可觀者, 一見足也, 何必心着?" 自雲觀進問辰鍾, 此亦一覽而已, 寘諸書堂矣。 年少一內官, 見而偶傷, 以此告于予, 以事出無情, 勿問矣。 世子從傍而笑焉, 予顧問其由, 對曰: "此微物也。 而因微物, 請罰人, 是以笑。" 云, 故予不覺心歎而自喜曰: "世子器度、寬容若此, 吾東之福矣。" 畢講《孝經》, 殿講于予, 予問《孝經》者何事, 對曰: "事親盡道者孝矣。" 其得要旨, 若此也。 於冑筵召對, 宮官所達者, 其或差焉或所陳者, 前所講者, 則及夫講畢, 問于左右曰: "前後宮官之言, 其何相違? 且所東者, 非《孝經》某章, 《小學》某篇所在者耶?" 其潛心聽焉, 常時留意, 可知也。 丁未春, 謁先聖, 齒于學。 同年秋九月, 行冠禮, 又同月行醮禮。 時九歲, 而講聲淸朗, 動容禮節, 儼若成人。 六禮之日, 日氣俱淸明, 心自喜曰: "不見其形, 願察其影。 凡事難乎一日之暇, 而自冊封與夫入學、冠ㆍ嘉之日, 日皆淸朗。 而夜朝雖陰, 及夫行禮, 每也如此, 天祐宗祊, 可以仰料。 予雖涼德, 東國其庶幾。" 豈意今日, 遽以逝焉? 興言及此, 不覺長吁。 每當新物, 不忍先嘗, 必皆獻之, 雖有疾恙, 不至重焉, 必盥洗衣帶而見予焉。 每當國忌, 以其沖年, 若不備素饌, 則以中官召掌饌宮人, 嚴辭諭焉, 內外之人, 莫不動色矣。 友愛同氣, 亦由本然。 闕中事例, 所處異焉, 頻頻往視, 而左右宮人, 若有不協之言, 世子痛其或流間焉, 飮泣告予, 其孝友之性, 一若此也。 且凡事有未安之事, 則不以遽色, 以中官嚴正曉諭, 宮人莫不畏以歎服焉。 嗚呼! 疾篤也, 聞其師之入, 幡然起坐, 更以斂容, 又聞賓客之入, 欲起而力未能焉, 此亦可見平日性稟也。 一疾沈綿之後, 補瀉相眩, 醫藥罔效, 歎聲告予曰: "世無名醫, 雜施諸藥, 徒致煩告。 願勿更藥, 從容自靜焉。" 其却乎陳根, 付之天命, 若非老師、宿儒達理者, 何可及也? 及夫臨革, 予以顔接顔, 呼而知予否云, 則微微應聲, 眼淚霑腮, 洞洞孝心, 不泯于耿耿中故也。 嗚呼! 痛哉。 戊申十一月十六日亥時, 薨逝于昌慶宮之進修堂, 卽私忌日也, 壽甫十歲, 居貳極者纔四年矣。 同年十二月初二日, 議謚曰孝章, 己酉正月卄六日, 以禮葬于坡州 條里洞乙坐辛向原, 順陵左岡也。 嗚呼! 予以匪德, 所恃者惟元良, 而性又若此, 冀東方萬年之福矣, 何意年纔一旬, 至於此境? 言念宗社, 痛尤難抑。 今玆行錄, 只述平日表表者, 豈一字一句, 夸乎本事? 予雖不學, 不爲此也, 皆中官之所共聞, 朝臣之所共覩者也。 至於夢瑞, 雖近傅會, 前後諡狀, 已有此等語, 而俱予所夢也, 略記于此焉。 嗚呼! 哀痛之中, 思焉若割, 略略撰焉, 而因大臣陳達, 不以詞臣, 更撰誌文, 而只以行錄, 添補如干文字, 親寫入石, 藏于幽室。 嗚呼! 此懷庶可伸也夫? 嗚呼! 痛哉, 嗚呼! 痛哉。
御製也。 除地於玄室之左, 觀象監祠后土如初。 靈轝及輴之屬於拍城內庚地焚之, 其通人臣用者, 則不焚。 梓室入玄室時, 宮官以下陪從百官, 哭再拜, 又哭再拜。 閉玄室將畢, 典儀設宮官及翊衛司官位於吉帷宮門外近南北向, 題主官、典儀、贊儀、引儀位於宮官之北西向, 又贊儀、引儀位於宮官之北東向俱北上。 奉常寺官, 設卓三靈座, 東南西向, 【題主卓在北, 次筆硯卓, 次槃匜卓。】 具筆硯、墨、槃匜、 【具香湯。】 巾。 【白細苧布。】 題主官、典儀、贊儀、引儀先入就所, 引儀引宮官及翊衛司, 入就位, 又引都提調及禮曹堂上、殯宮都監提調各一員。 承旨詣卓前, 大祝陞詣靈座前跪, 捧虞主, 拭以巾, 臥寘於卓。 題主官盥手陞詣卓前西向立, 題前面, 墨書如式訖, 大祝捧虞主, 納于櫃, 加蓋, 安於靈座, 魂帛凾寘其後。 攸司設饌于靈座前, 大祝捧出虞主, 設於座, 覆以白苧布, 護几於後。 代奠官奠爵訖, 大祝讀祝文, 宮官以下哭再拜, 大祝奉虞主, 納于櫃。
- 【태백산사고본】 17책 2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01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語文學)
- [註 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