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의 행록을 지어 정원에 내리다
임금이 친히 세자의 행록(行錄)을 지어 정원(政院)에 내렸는데, 그 행록에 이르기를,
"세자의 휘(諱)는 행(緈)이고, 자(字)는 성경(聖敬)이다. 기해년762) 2월 15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서조(瑞鳥)가 당(堂)에 모인 것을 보았고 또 금귀(金龜)를 보았는데, 곧 정빈(靖嬪) 이씨(李氏)가 낳은 바이다. 겨우 두어 살에 성인(成人) 같은 데가 있어서 행동거지가 여느 아이보다 뛰어났다. 신축년763) 가을에 내가 세제(世弟)가 되어 대궐에 들어올 때에 세자는 나이 겨우 세 살이므로, 어린 나이여서 일찍이 대궐에 같이 들어오지 못하고 잠시 사제에 남겨 두었더니, 노는 중에나 자고 깨는 사이에 자주 아버지를 부르고 혹 계속 부르다가 목이 멘 것은 어버지를 효사(孝思)하는 마음이 천성에 뿌리박혔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대궐에 들어온 뒤로 동조(東朝) 양전(兩殿)을 모실 때에는 무릎꿇고 바로 앉아 응대하는 것이 영향(影響) 같으므로, 삼전(三殿)에서 특별히 사랑하였다. 갑진년764) 겨울에 비로소 경의군(敬義君)에 봉하였고, 을사년765) 봄에 세자로 진봉(進封)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으나 대정(大庭)에서 행례(行禮)하고 정당(正堂)에서 하례(賀禮)받을 때에 거동하고 주선하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본성이 그런 것이다. 어찌 보통 가르침이 미칠 바이겠는가?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세자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궁료(宮僚)를 접대할 때뿐만 아니라 한가한 가운데 중관(中官)과 있을 때에도 엄연하기가 어른 같아서 장난하는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작은 내관(內官)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하여 행동을 삼가지 않으므로 세자가 한참 잠자코 보다가 다른 중관을 불러 말하기를, ‘이 내관은 다시 시종하지 말게 하라.’ 하였는데, 중관이 그 까닭을 몰라서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조금 전에 내 앞에서 서로 다투어 공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중관이 이 일을 대조(大朝)께 여쭈어 경계하겠다고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으니, 잠시 사이에도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 이러하였다. 또 평소에 중관과 학문을 강구하며 글자를 썼으며, 젊은 내관과 놀지 않고 늘 노성(老城)한 중관과 있었으니, 그 상정(常情)보다 뛰어난 것이 한결같았다. 모든 완호(玩好)에 조금도 마음두지 않고 늘 말하기를, ‘볼 만하기는 하나 한 번 보면 족하다. 어찌하여 반드시 마음두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운관(雲觀)766) 에서 문신종(問辰鍾)을 바쳤으나, 이것도 한 번 보고는 서당(書堂)에 두었는데, 젊은 내관이 보다가 우연히 손상하였다. 이 일을 나에게 고하므로, 다른 뜻이 없이 일어난 일이라 하여 문책하지 말게 하였더니, 세자가 옆에서 웃었다. 내가 돌아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하치않은 물건인데, 하찮은 물건 때문에 웃었습니다.’ 하므로, 내가 절로 마음이 감탄되어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세자의 도량이 너그러워 이와 같이 용납하니, 이것은 우리 동방의 복이다.’ 하였다. 《효경(孝經)》을 다 강독(講讀)하고 내 앞에서 전강(殿講)할 때에 내가 효란 어떤 것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버이를 섬기되 도리를 다하는 것이 효입니다.’ 하였으니, 그 요지(要旨)를 아는 것이 이러하였다. 주연(胄筵)767) 에서 소대(召對)할 때에 궁관(宮官)이 아뢴 것이 혹 틀리거나 아뢴 것이 전에 강독한 것이면, 그 주연을 마치고서 좌우에게 묻기를, ‘전후의 궁관이 말이 어찌하여 서로 다른가? 또 아뢴 것은 《효경》 어느 장(章)과 《소학(小學)》 어느 편(篇)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으니, 그 마음을 쏟아 듣고 늘 유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미년768) 봄에 선성(先聖)을 전알(展謁)하고 입학하였고, 그해 가을 9월에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또 그 달에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그때 아홉 살이었는데, 강독하는 소리가 청랑(淸朗)하고 거동하는 예절이 성인(成人)처럼 엄연하였다. 육례(六禮)를 행한 날은 날씨가 모두 청명하였다. 마음이 절로 기뻐서 ‘그 형상을 보지 못하나 그 그림자를 살피고 싶다.’ 하였으나, 모든 일에 하루도 한가한 틈이 없었다. 책봉(冊封)하고부터 무릇 입학·관례·가례(嘉禮)하던 날에 일기가 모두 청랑하여 밤이나 아침이나 흐리지 않았고 그 행사가 번번이 이러하였으니, 하늘이 종사(宗社)를 돕는 것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었다. 나는 덕이 없을망정 세자는 동국(東國)의 희망이었는데, 어찌 오늘날 갑자기 서거할 줄 알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길게 탄식하게 된다. 새것을 맛볼 때마다 차마 먼저 맛보지 못하고 반드시 다 바쳤고, 병이 있더라도 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세수하고 의대(衣帶)를 갖추고 나를 찾았다. 동기를 우애(友愛)하는 것도 본연(本然)에서 말미암았는데, 대궐 안의 사례(事例)는 거처하는 곳이 다르므로 자주 가서 보았고, 좌우의 궁인(宮人)이 불화한 말을 하면 세자가 혹 틈이 벌어질 것을 마음 아파하여 눈물을 머금고 나에게 고하였으니, 그 효우(孝友)하는 성품이 모두 이러하였다. 또 모든 일에 미안한 일이 있으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중관(中官)을 시켜 엄정하게 타이르니, 궁인이 모두 두려워하고 탄복하였다.
아! 병이 위독하여졌을 때에도 그 스승이 들어온다는 말을 들으면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용모를 단정히 가다듬고 또 말하기를, ‘빈객(賓客)이 들어오므로 일어나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평소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한 번 병들어 낫지 않은 채 오래 끌게 된 뒤로 설사를 막고 어지러움을 돕는 데에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으니, 탄식하며 나에게 고하기를, ‘세상에 명의(名醫)가 없는데 잡되게 여러 약을 써보면 괴로움만 가져올 뿐이니, 다시 약을 쓰지 말고 조용히 스스로 안정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그 약을 물리치고 천명에 맡기는 것은 노사(老師)·숙유(宿儒)가 사리에 통달하여도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임종 때에 내가 얼굴을 얼굴에 대고 나를 알겠느냐고 부르자 희미하게 응답하는 소리를 내며 눈물이 뺨을 적셨으니, 간절한 효심(孝心)이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마음 아프다. 무신년769)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昌慶宮)의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니, 수(壽)는 겨우 10세이고, 세자 자리에 있었던 것이 겨우 2년이다. 아! 내가 덕이 없어서 믿는 것이 오직 원량(元良)이었고, 성품도 이러하므로 동방의 만년의 복이기를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열 살에 이 지경이 될 줄 알았겠는가? 종사를 생각하면 아픔 또한 누르기 어렵다. 이제 행록에는 평소에 뛰어난 것만을 기술하였으니, 어찌 한 자 한 구라도 그 일보다 불렸겠는가? 내가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모두 중관이 함께 듣고 조신(朝臣)이 함께 본 것이었다. 꿈이 상서로워 상서로운 조짐에 가까웠던 것으로 말하면 전후의 시장(諡狀)에 이미 이러한 말이 있으나, 모두 내가 꿈꾼 것이므로 처음에 대략 적었다. 아! 애통한 가운데 차마 상세히 쓰지 못하고 간략하게 지었다. 시장을 제술(製述)하는 관원은 내가 다하지 못한 곳을 상세히 해야 하나, 과대하지 않아야 한다. 국기(國忌)를 당할 때마다 어린 나이라 하여 소선(素膳)을 장만하지 않으면 중관을 시켜 장선 궁인(掌膳宮人)을 불러 엄한 말로 타일렀으므로, 안팎 사람들이 모두 동색(動色)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20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92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편사(編史)
- [註 762]기해년 : 1719 숙종 45년.
- [註 76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764]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註 765]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註 766]
운관(雲觀) : 관상감(觀象監).- [註 767]
○上親製世子行錄, 下于政院, 其行錄曰:
世子諱緈, 字聖敬。 己亥二月十五日申時, 生于順化坊 彰義宮私第。 及其妊娠, 夢見瑞鳥, 集于室, 復見金龜焉, 卽靖嬪 李氏所誕也。 甫數歲, 有若成人, 行動擧止, 超乎凡兒。 辛丑秋承儲入闕也, 世子年纔三歲, 故幼沖之年, 趁未能同詣闕中, 姑留私第矣, 遊戲之中, 夢醒之間, 頻呼爺, 或仍呼嗚咽者, 孝親之心, 根於天性故也。 其冬入闕之後, 侍於東朝兩殿也, 跪膝正坐, 應對如響, 三殿奇愛之。 甲辰冬, 始封敬義君, 乙巳春, 進冊儲副, 年甫七歲, 而及夫大庭行禮, 正堂受賀, 動容周旋, 無不中禮, 是本性之然也。 豈常敎所及哉? 方在沖年, 承此貳極, 而非特接對宮僚,燕居之中, 與中官處, 儼若大人, 未嘗遊戲焉。 一日, 小內官兩人, 相與言詰, 擧措不謹, 故世子默視良久, 招他中官而言曰: "此內官須更勿侍。" 中官莫知其故, 請問其故, 乃曰: "俄於余前相詰, 不恭故也。" 中官請以此稟于大朝, 警飭焉, 始許, 其造次之間, 從容嚴肅, 若此也。 且於平時, 與中官講學書字也, 不與年少內官遊, 而每與老成中官處焉, 其超乎常情, 一如也。 凡諸玩好, 無一潛心, 而常曰: "雖可觀, 一見足也。 何必心着?" 自雲觀進問辰鍾, 此亦一覽而已, 置諸書堂矣。 年少一內官, 見而偶傷, 以此告于予, 以事出無情, 勿問矣, 世子從傍而笑焉。 予顧問其由, 對曰: "此微物也, 因微物而請罰人, 是以笑。" 云, 故予不覺心嘆而自喜曰: "世子器度寬容若此, 此吾東之福矣。" 畢講《孝經》, 殿講于予, 予問孝者何事? 對曰: "事親盡道者, 孝矣。" 其得要旨若此也。 於冑筵, 召對宮官, 所達者其或差焉, 或所陳者, 前所講者, 則及夫筵畢, 問于左右曰: "前後宮官之言, 其何相違? 且所陳非《孝經》某章、《小學》某篇所載者耶?" 其潛心聽焉, 常時留意, 可知也。 丁未春, 謁先聖, 齒于學, 同年秋九月, 行冠禮, 又同月, 行醮禮。 時九歲, 而講聲淸朗, 動容禮節, 儼若成人。 六禮之日, 日氣俱淸。 明心自喜曰: "不見其形, 願察其影。" 凡事難乎一日之暇。 而自冊封與夫入學、冠禮、嘉禮之日, 日皆淸朗, 夜朝無陰, 及夫行事, 每也如此, 天佑宗祊, 可以仰料。 予雖涼德, 東國其庶幾, 豈意今日, 遽以逝焉? 興言及此, 不覺長吁。 每嘗新物, 不忍先嘗, 必皆獻之, 雖有疾恙, 不至重焉, 則必盥洗衣帶而見予焉。 友愛同氣, 亦由本然, 闕中事例, 所處異焉, 頻頻往視, 而左右宮人, 若有不協之言, 世子痛其或流間焉, 飮泣告予, 其孝友之性, 一若此也。 且凡事有未安之事, 則不以遽色, 使中官, 嚴正曉諭, 宮人莫不畏而嘆服。 嗚呼! 疾篤也, 聞其師之入來, 幡然起坐, 更以斂容, 又曰: "賓客之入, 欲起而力未能焉。" 此可見平日性稟也。 一疾沈綿之後, 補瀉相眩, 醫藥罔效, 嘆聲告予曰: "世無名醫, 雜試諸藥, 徒致煩苦, 願勿更藥, 從容自靜焉。" 其却乎陳根, 付之天命, 非老師、宿儒達理所可及也。 及夫臨革, 予以顔接顔, 呼以知予乎云, 則微微應聲, 眼淚沾腮, 洞洞孝心, 不泯乎耿耿之中故也。 嗚呼! 痛矣。 戊申十一月十六日亥時, 薨逝于昌慶宮之進修堂, 壽甫十歲, 居貳極者, 纔二年矣。 嗚呼! 予以匪德, 所恃者惟元良, 而性又若此, 冀東方萬年之福矣, 何意年纔一旬, 至乎此境? 言念宗社, 痛又難抑。 今玆行錄, 只述平日表表者, 豈一字一句, 溢乎本事? 予雖不學, 不爲此也, 皆中官之所共聞, 朝臣之所共覩者也。 至於夢瑞, 近乎符瑞, 前後諡狀, 已有此等語, 俱予所夢, 略記于初焉。 嗚呼! 哀痛之中, 忍寫若割, 略略撰焉。 諡狀製述之官, 予未盡處, 其須詳焉, 不當夸大焉。 每當國忌, 以其沖年, 若不爲備素膳, 則以中官, 召掌膳宮人, 嚴辭諭焉, 內外之人, 莫不動色矣。
- 【태백산사고본】 16책 20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92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편사(編史)
- [註 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