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가 창경궁에서 훙서하다
밤 3경(三更) 1점(一點)에 왕세자가 창경궁(昌慶宮)의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이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하였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亥時)에 훙서하였다.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 등을 대하여 슬피 곡하며 말하기를,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고, 한참 만에 곡을 그쳤다. 임금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내시(內侍)를 시켜 흑곤포(黑袞袍)를 담은 검은 함을 들려 앞세우고 임금이 뒤따라 나왔다. 장차 복(復)727) 하려 할 때에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들은 춘방(春坊) 및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계하(階下)에서 곡한 뒤에 나가서 옷을 갈아입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사(師)·부(傅)·빈객(賓客)을 지낸 사람과 입학 때의 박사(博士)와 시임(時任) 사·부·빈객과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은 마찬가지로 계하에서 거애(擧哀)하라. 을유년728) 소현 세자(昭顯世子) 상사(喪事) 때의 전례에 따라 궁성을 호위(扈衛)하고, 시임·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예판(禮判)·승지(承旨)·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는 모두 유문(留門)729) 하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광조가 말하기를,
"소현 세자의 상사 때의 전례를 춘추관(春秋館)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을 시켜 등록(謄錄)에서 상고해 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오례의(五禮儀)》를 들여오고 예방 승지(禮房承旨)도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어둑새벽에 예방 승지가 흑곤포를 담은 함을 받쳐들어 내시에게 전해주니, 내시가 전(殿)의 지붕 모퉁이에 올라가 호복(呼復)하고 내려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성군(礪城君) 이집(李㙫)·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 유학(幼學) 조재호(趙載浩)·조재혼(趙載混)은 모두 와서 기다리라."
하였는데, 조재호·조재혼은 빈궁(嬪弓)의 오라버니이기 때문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2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90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註 727] 복(復) : 초혼.[註 728] 을유년 : 1645 인조 23년.[註 729] 유문(留門) :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궁궐문이나 성문(城門) 닫는 것을 유보하던 일.
○壬戌/夜三更一點, 王世子薨逝于昌慶宮之進修堂。 是日, 再行祈禱于宗廟社稷, 夜, 疾益㞃, 亥時薨。 上對領議政李光佐、兵曹判書趙文命等, 哭之慟曰: "將奈宗廟、社稷何?" 良久哭已。 上起而入內, 須數使內侍, 捧黑函, 盛黑袞袍, 前行, 上隨後出臨。 將以復也, 光佐曰: "臣等與春坊及入侍諸臣, 哭於階下而後, 出而易服矣。" 上曰: "曾經師、傅、賓客及入學時博士、時任師、傅、賓客與藥房諸臣, 一體擧哀於階下。 依乙酉年昭顯世子喪例, 宮城扈衛, 時任、原任大臣及禮判、承旨、侍講院、翊衛司, 竝令留門入來。" 光佐曰: "昭顯世子喪事時前例, 令春秋館堂郞, 考出謄錄宜矣。" 允之。 仍下敎曰: "《五禮儀》入之, 禮房承旨亦令入侍。" 昧爽, 禮房承旨捧黑袞袍所盛函, 傳授內侍, 內侍陞殿角, 呼復而下。 上曰: "礪城君 楫、咸平君 泓、幼學趙載浩ㆍ趙載混, 竝爲來待。" 載浩、載混, 嬪宮之兄也。
- 【태백산사고본】 16책 2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90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