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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9권, 영조 4년 9월 24일 신미 2번째기사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판결사 박사수의 과거 제도의 시정에 대한 상소문

판결사(判決事)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국제(國制)는 3년마다의 대비(大比)658) 이외에 즉위의 경사에 증광시(增廣試)가 있고 황제의 등극과 태자의 탄생과 왕비·왕세자의 책봉과 세자의 입학·가례(嘉禮)와 원자(元子)·원손(元孫)의 탄생과 친경(親耕)·친잠(親蠶)·부태묘(祔太廟)·존숭(尊崇)·토역(討逆)의 경사에 다 별시(別試)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과거(科擧)의 명목이 이처럼 많으니, 인재를 뽑는 방도가 본디 처음부터 넓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증광과(增廣科)는 액수가 대비와 대등하고 생원(生員)·진사(進士)도 아울러 뽑는데, 구제(舊制)는 즉위의 경사 이외에는 따로 설행(設行)하지 않았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상신(相臣) 유영경(柳永慶)이 재위 40년의 경사는 처음 즉위 때와 다름없다 하여 설행하기를 건의하고 액수를 40인으로 늘려 대증광(大增廣)이라 불렀는데, 혼조(昏朝)659) 에 이르러서는 또 합부묘(合祔廟)·존숭·책례(冊禮) 등의 여러 경사를 합하여 대증광을 설행하였고, 인조(仁祖) 이후에는 잘못된 것을 이어받아 그대로 고전(故典)이 되었으며, 숙종(肅宗) 말년에 단경(單慶)으로 증광을 설행한 것도 예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임금의 환후가 회복된 것을 경축하여 과거를 설행한 것은 중세(中世)에서 비롯하였고, 또 따라서 자전(慈殿)·중궁(中宮)·동궁(東宮)이 회복된 경사에도 다 별시를 설행하였습니다. 별시에는 오히려 사서(四書)와 일경(一經)의 강서(講書)가 있고 전시(殿試)660) 때에 또 책문(策問)661) 으로 시험하므로 선비들이 경서를 익히 강독하고 학문에 힘썼으나, 중간에 별시가 정시(庭試)로 변하여서는 변려(駢儷)662) 의 말로 시험하므로 사람들이 다 자구(字句)를 표절(剽竊)하고 청백(靑白)을 짝짓는 것을 힘써서 글을 읽고 글을 짓는 종자가 끊어졌습니다. 세상에는 천수표(千首表)를 만들어 즉각 글 한 편을 짓되 쉬운 문리(文理)를 이어서 읽어 가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장옥(場屋)에 들어가 한 번 길게 이어서 이것을 부르면 뭇 거자(擧子)가 둘러싸서 이것을 베낍니다. 고관(考官)은 그 주객(主客)과 우열(優劣)을 가리지 못하여 잡되게 뽑고는 ‘이것은 운명이며 운수이다.’ 하며, 노실(老實)한 거자를 뽑는 것은 열 가운데에서 한둘도 안됩니다. 그래서 조정에는 경술(經術)이 있는 재상(宰相)이 적고 유악(帷幄)663) 에는 학식이 있는 강관(講官)이 모자랍니다.

또 과거의 설행이 더욱 잦아져서 인재를 뽑는 길이 점점 넓어지고부터는 요행을 바라는 것이 끝이 없고 분수에 벗어나는 것을 바라서 간사한 폐단이 일어나는 것이 기묘년664) 의 적과(賊科)에서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의논드려 과거를 자주 설행하지 말고 또 액수를 줄이기를 청하니, 숙종께서 따르시어 수년 동안 과장(科場)을 설치하지 않고 혹 임헌(臨軒)665) 하는 과시(科試)가 있더라도 사람을 뽑은 것은 서넛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는 시종(侍從)의 반열(班列)에 있을 문신(文臣)이 모자랐으므로, 붕당으로 말미암아 정국이 자주 변하였더라도 삼사(三司)의 망(望)666) 에는 동색(同色)·이색(異色)을 통틀어 주의(注擬)하였고, 양사(兩司)의 관원은 파산(罷散)되어도 며칠 안되어 곧 특별히 서용되었는데, 이것은 실로 신이 젊을 때에 눈으로 본 것입니다.

아! 국가에서 인재를 뽑는 것이 이미 경학(經學)·재식(才識)이 있는 선비를 얻어서 다스림을 도와 이루지 못하고 한갓 당인(黨人)들이 권세를 얻어 뽐내고 원한을 갚는 밑거리가 될 뿐이니, 과거의 설행이 어찌 다만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뒤로는 다시 단경(單慶)·합경(合慶)으로 증광을 설행하거나 별시를 정시로 바꾸지 말고 모든 경사를 반드시 다 수차를 합치고 수년을 지내어 한 과시(科試)를 설행하되 대비(大比)와 서로 사이에 끼우며 별시에는 강경(講經)을 없애지 말고 변려로 시험하지 말 것이며 알성(謁聖)·춘당대(春塘臺) 등 임헌하는 과시 때에는 부(賦)·표(表)·논(論)·잠(箴)·명(銘)·송(頌)으로 번갈아 출제하여 유생(儒生)이 오로지 한 가지 문체(文體)만 익히지 말게 하기를 신은 바랍니다. 그러면 인재를 뽑는 길이 어지럽지 않고 인재를 찾는 도리가 옳은 것을 힘쓰게 되어 조금은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문과(文科)를 만약 드물게 설행한다면 무거(武擧)도 절로 따라서 줄을 것이고, 과거를 설행할 때에도 반드시 법도를 엄하게 하고 액수를 줄여 전일처럼 넓혀 뽑는 일을 없앤다면 분한(分限)이 조금 엄해지고 원망이 점점 그쳐서 뒷날에 국가의 큰 걱정이 되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고식(姑息)의 은혜로 인정(人情)을 어기지 않으려 하시더라도 인심은 만족할 줄 모르므로, 앞으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에게 죄다 급제(及第)를 내리고 과방(科榜)에 든 사람에게 모두 벼슬을 내리시더라도 마침내는 오히려 불만하여 다시 분수 밖의 것을 바랄 것이니, 신은 전하의 은혜가 다시 이어 갈 수 없어서 걱정이 도리어 깊어질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일을 어렵게 여겨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9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8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註 658]
    대비(大比) : 3년마다 한 번씩 어질고 능한 이를 등용하는 시험. 일종의 식년시(式年試)로 전시(殿試)와 같은 것이었음. 대비과(大比科).
  • [註 659]
    혼조(昏朝) : 광해조.
  • [註 660]
    전시(殿試) :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문과(文科) 33명과 무과(武科) 28명을 임금이 몸소 보이는 과거. 복시의 합격으로 과거의 급제는 결정되고 전시는 다만 급제의 순위를 정할 뿐임.
  • [註 661]
    책문(策問) : 경의(經義) 또는 시정(時政) 등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논술하게 하는 문과 시문(試問)의 한 가지.
  • [註 662]
    변려(駢儷) : 사륙(四六)의 대구(對句)로 쓴 문체.
  • [註 663]
    유악(帷幄) : 경연(經筵).
  • [註 664]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665]
    임헌(臨軒) : 임금이 평대(平臺)에 나와 앉던 일.
  • [註 666]
    망(望) : 천망(薦望:벼슬아치를 추천함).

○判決事朴師洙上疏, 略曰:

國制, 三年大比之外, 卽位之慶, 有增廣, 皇帝登極、太子誕生、王妃ㆍ王世子冊封、世子入學ㆍ嘉禮、元子ㆍ元孫誕生、親耕、親蠶、祔太廟、尊崇、討逆之慶, 皆有別試。 以蕞爾國而科擧名目, 若是衆多, 取人之道, 固未始不廣也。 增廣之科, 額數等大比, 兼取生員、進士, 舊制, 卽位慶外, 不別設。 至宣廟朝, 相臣柳永慶, 以在位四十年稱慶, 無異初卽位, 建議設行, 而增額四十人名, 爲大增廣。 至於昏朝, 則又合祔廟、尊崇、冊禮等諸慶, 合設大增廣, 仁廟以後, 承訛襲謬, 仍成故典, 肅廟末年, 至以單慶設增廣, 又古所未曾有也。 上候平復, 稱慶設科, 昉自中世, 而又從以慈殿、中宮、東宮平復之慶, 皆設別試。 別試, 則猶有四書、一經之講, 而殿試又試策問, 士得以熟講經書, 肆力學問, 而中間別試, 變爲庭試, 試以騈儷之語, 人皆以剽竊字句, 媲對靑白爲務, 而讀書績文之種子絶矣。 世有做千首表, 立刻成篇, 而不能連續淺近文理讀過者。 及入場屋, 一接長唱之, 衆擧子圍匝而謄之。 考官不辨其主客優劣, 而雜取之曰: "是乃命也, 數也。" 其拔老實擧子, 什不一二。 於是乎廊廟少經術宰相, 帷幄乏學識講官。 且自科擧之設益數, 而取人之路漸廣, 僥倖無限, 希覬匪分, 奸弊之生, 極于己卯賊科。 故相臣南九萬獻議, 請勿頻設科, 且簡額數, 肅廟從之, 數年不設科場, 雖或有臨軒之試, 取人不過三數。 于時從班文臣乏人, 雖有黨局之數變, 三司之望, 未嘗不通同異色而擬之, 兩司之官, 罷散未數日, 旋有別敍, 此實臣之少時所目見也。 噫! 國家取人, 旣不能得經學、才識之士, 以輔成治理, 徒爲黨人輩招權報怨之資, 科擧之設, 豈但使然哉? 臣願自今以後, 勿復以單慶、合慶, 設增廣別試, 變爲庭試, 凡諸稱慶, 必皆合數次, 過數年而設一試, 與大比相間, 別試勿除講經, 勿試騈儷, 謁聖、春塘臺臨軒之時, 以賦、表、論、箴、銘、頌, 交互出題, 俾儒生, 毋專習一文。 庶取人之路不淆, 而搜材之道尙可, 爲一分救弊之道矣。 從今以往, 文科若能罕設, 武擧自當隨省, 而雖於設科之時, 亦必峻其規矩, 簡其額數, 無或如前日之廣取, 庶分限稍截怨詛漸熄, 不至爲異日國家之大患矣。 殿下縱欲以姑息之惠, 弗咈人情, 人心無厭, 將來雖盡一國之人, 而賜第, 擧一榜之人而錫爵, 其終則猶必不滿, 復望分外, 臣恐殿下之恩, 無以復繼, 而爲患反深矣。

上難其事, 不從。


  • 【태백산사고본】 16책 19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8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