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홍치중이 국가의 형정을 바로잡을 것을 아뢰다. 도승지 송성명이 지난번 처분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말하다
임금이 진연(診筵)에 나아갔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을 소견(召見)하여 일을 보살피라고 권면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신(臣)이 인혐(引嫌)하는 것은 한때의 시비를 다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죄명이 아직 자신에 있는데 아직 감처(勘處)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어찌 성교(聖敎)에 돈면(敦勉)하셨다 하여 태연히 무릅쓰고 출사(出仕)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성교에 ‘스스로 정책(政策)한 것을 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私)이고 공(公)이 아니며, 정책한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대우가 자못 다른 것도 사이고 공이 아니다.’ 하셨는데, 이 분부가 참으로 지극히 마땅합니다. 정책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이니, 조금이라도 공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장차 못할 짓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신축년647) 의 신하들이 공을 바랐다 하더라도 그 공을 바라는 것은 당연히 갑진년648) 에 있었어야 할 것인데, 그때에는 김창집(金昌集) 등 네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공을 바라려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밖의 신하들은 일컬을 만한 공이 없으니, 또한 어찌 공을 바라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갑진년 이후의 상소에 이따금 이런 말을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대개 소인의 마음으로 천지의 큰 것을 함부로 헤아려 혹 한편 사람이 등용될까 염려하여 이러한 소장(疏章)이 있었던 것이니, 질투하는 지어미의 말과 같아서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마는, 모두 편론(偏論)의 해독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용사(用捨)하는 도리로 말하면 천지가 만물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지극히 공정하게 마음먹어야 할 것인데, 정책한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대우가 특별하면 어찌 지극히 공정한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쓸 만하여도 혐의 때문에 버리고 쓰지 않는다면 이것도 사이고 성인은 혐의가 없다는 의리에 어그러집니다. 성교에 또 ‘죄가 있는 자는 죄주고 죄가 없는 자는 풀어주는 것이 옳다.’ 하셨는데, 을사년649) 에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도 아울러 모두 풀어 주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사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근년에 이천기(李天紀)의 집에서 상언(上言)하였을 때에도 아뢴 것이 있었습니다. 대저 이번 역번에는 근본이 있거니와, 신축년의 일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종사의 대계에 지나지 않고 선조(先朝)를 위하여 힘쓴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감히 의심할 곳이겠습니까마는, 한세량(韓世良)의 상소 가운데에 있는 남몰래 천위(天位)를 옮긴다는 따위 말은 이미 상리(常理)에 벗어났으며,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는 오로지 세자를 세워 대리하게 하는 것은 찬역(簒逆)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저 세자를 세워 대리하게 하는 것을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하신 일인데 사람들의 말이 의심하여 어지럽히는 것이 이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에게는 본디 효경(梟獍)650) 의 성질이 있는데, 어찌 듣고서 참새처럼 날뛰어 흉역(凶逆)의 마음을 열지 않겠습니까? 이번 역적의 공초(供招) 가운데에 8년 동안 경영(經營)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면 세자를 세운 뒤부터 이미 흉계(凶計)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함할 생각을 내고 마침내는 난역(亂逆)의 근원이 되었으니, 당론(黨論)의 해독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갑진년 국휼(國恤) 때에 경종(景宗)께서 편찮으신 지 이미 오래 되어 탕제(湯劑)를 드신 일도 많으므로 이것은 약원(藥院)651) 의 일기(日記)에 모두 실려 있을 것입니다. 대궐 안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어찌 몰랐겠습니까마는, 방외(方外)의 사람들은 오히려 잘 알지 못하였는데, 승하(昇遐)의 슬픔을 당하고부터 훙역의 무리가 말하기를, ‘대행(大行) 때 처음에는 병환이 없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승하하셨다.’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흉참(凶慘)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심유현(沈維賢)이 흉악한 말을 한 근원인데, 흉역의 무리와 김일경의 무리가 사사로이 서로 창화(唱和)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이러한 말을 듣고부터 신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을사년 이후의 신하들도 어찌 당론하는 자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심한 혐의를 피하지 않고 징토(懲討)하는 법을 엄하게 하려 한 것은 진퇴(進退)와 득실(得失)을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호(鄭浩)·민진원(閔鎭遠)이 혹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도 하고 상차(上箚)하여 아뢰기도 한 것은 대개 선왕의 성덕(盛德)을 밝히고 또한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정지(情志)가 의심받고 막혔으므로 처음부터 비난하여 배척한 것은 혹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마는, 이제 일이 변한 뒤에 이르러서는 그 심사를 헤아리니, 공심(公心)이라 하겠습니다. 접때 듣건대, 송인명(宋寅明)이 우연히 지나다가 찾아와 이야기할 즈음에 말하기를, ‘그가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 또한 두 신하의 죄를 논하였는데, 역변(逆變)이 있은 뒤에 생각하매 어떤 것은 그 고심(苦心)에 선견(先見)한 데가 있으므로, 이제는 의견이 실로 전일과 다르다.’ 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찌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흉역은 실로 천고의 사적(史籍)에 없던 변입니다. 청주(淸州)의 적변(賊變) 때 흉격(凶檄) 가운데에 역신(逆臣) 이봉상(李鳳祥)이라 말하였는데, 반드시 ‘역(逆)’자를 붙인 것은 그 뜻이 대개 오늘날 전하를 섬기는 자를 다 역적이라 한 것입니다. 신윤조(辛胤祚)의 일로 말하더라도 군사 수백을 모으려 할 때에 먼저 신의 가속을 죽인 것도 또한 이 뜻입니다. 그러므로 흉역의 무리가 세자를 세워 대리시키기를 청한 사람을 가리켜 역적의 괴수라 한 것입니다. 이제 한편으로 역적을 다스리면서 도리어 역적의 무리를 풀어 주니, 이른바 의리라는 것이 고금에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김창집 등 네 사람이 역심(逆心)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빨리 신에게 역적을 감싸 율(律)을 가하여 그 죄를 바루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처분이 있고 나서야 국가의 형정(刑政)이 비로소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조(聖朝)의 관인(寬仁)은 이것으로 신을 죄주지 않더라도 신의 염치가 어찌 태연히 재직(在職)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도승지(都承旨) 송성명(宋成明)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이처럼 누누이 아뢰기는 하나, 접때 처분은 크게 공평하고 지극히 정당하였으니,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정책(政策)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거의 피차(彼此)의 송단(訟端)과 같으니, 모두 마땅히 덜어 버려야 할 부분이다. 송(宋)나라의 범진(范鎭)·한기(韓琦)가 영종(英宗) 때 정책(政策)한 이후에 어찌 당(唐)나라의 문생 천자(門生天子)652) 처럼 조금이라도 공(功)을 바란 것이 있겠는가? 내가 덕(德)이 없기는 하나 피차의 편론에 내가 어찌 참여하겠는가? 경(卿)은 조용히 이해하라. 이른바 노론(老論)·소론(少論)이라는 것을 일찍이 선조(先朝)에서는 감히 사색(辭色)에 나타내지 못하였는데, 병신년653) 에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문제654) 가 일어난 뒤부터 한층 더 격렬하였으니, 이것은 본디 백대(百代)의 공론에 붙여야 할 것이다. 그때 이진유(李眞儒)가 홀로 입대(入帶)하고 유봉휘(柳鳳輝)·정식(鄭栻)이 옥당(玉堂)으로서 상차(上箚)하였는데, 이것이 다 신축년 흉소(凶疏)의 근본이다. 한편 사람이 또 인판(印板)을 헐어 없애는 박절한 일을 하였으니, 당론이 어찌 한층 격렬해 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병신년 이후에는 양립할 수 없는 형세가 되어 한편 사람이 조정을 담당하면 다른 한편 사람은 조정을 같이하는 자가 없고 각각 죽기 살기로 마음먹어 신축년에는 작두를 가지고 대궐 밖에서 상소한 일까지 있었다. 경종께서 인후(仁厚)한 덕으로 이러한 버릇을 매우 다스리지 않으셨으므로 당로(當路)한 사람들이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고 문득 선제(先制)할 계책을 내어 갑자기 국본(國本)655) 을 정하는 의논을 내어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과연 범진·한기의 충성이 있으나 그 심사에 비하면 천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 아니다. 경은 과연 조금도 사의(私意)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순연(純然)하여 잡된 것이 없어야 충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침내 어떤 의사가 섞인 것이 있었으니 결코 충성이 아니다. 내 학문이 깊지는 않더라도 어찌 정책한 공 때문에 한편에 후하고 한편에 박하겠는가? 소론에는 김일경 등의 효경(梟獍)의 성질이 있고 노론에는 정인중 등의 효경의 성질이 있으니, 피차에 어찌 반역이 없는 무리가 있겠는가?
당론이 생긴 이래로 지우(智愚)·현불초(賢不肖)의 분간이 없다. 신축년·임인년의 옥사(獄事)는 역적이면 다만 역적이라 하는 것이 옳은데, 광혹(誑惑)이니 효경이니 하여 혼동해서 일색(一色)으로 가리켜 역당(逆黨)이라 하여 원한을 풀고야 말았다. 또 정인중 등의 일을 김일경의 무리는 묘한 기회로 간주하고 조금 당습(黨習)에 물든 자는 김창집을 정인중에게 흔들렸다 하나 김일경에 비하면 경중(輕重)·천심(淺深)이 구별이 있다. 내가 신축년 마지막의 일에 대하여 목메어 하교한 것이 있었는데, 서덕수(徐德修)에 대한 일을 말하자니 입을 더럽힌다마는, 약(藥)이라는 한자가 어디에서 나왔겠으며, 어찌 형장(刑杖)을 견디지 못했다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로 심유현(沈維賢)이 흉악한 말을 한 근본인데, 이런 흉악한 말이 있으므로 박필몽(朴弼夢) 등이 옥사(獄事) 중에 거짓 공초한 것을 스스로 만고의 강상을 붙들어 세웠다 하였으니, 서덕수의 죄를 명백히 밝혀야 내 뜻을 천하와 후세에 밝게 보일 수 있을 것이므로 역안(逆案)에 넣으라는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의천(李倚天) 같은 자는 이것으로 정인중·이천기의 죄를 벗길 생각을 하였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김창집 등 네 사람의 일을 말해야 하겠다. 이이명(李頤命)은 약원에 오래 있었으므로 그 사람을 익히 안다. 내가 지난번 나라를 근심하고 제 집을 잊는다고 허여한 것은 위자(慰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개 또한 화복(禍福)에 흔들림을 면하지 못하였고 아울러 고약한 아들도 두었다. 추대(推戴)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내가 어찌 모르랴마는, 이기지(李器之)의 일이기 때문이다. 김창집은 내가 쓰지 않았어도 그 사람됨을 안다. 그는 사생(死生)·화복에 흔들린 것이 자못 많았다. 추탈(追奪)의 벌은 죽은 자에게 지극한 벌이라 할 수 있으나, 내가 지난번 자못 지나쳤으므로 이번 추탈의 벌에는 역률(逆律)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대개 가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역괴(逆魁) 이집(頤集)656) 이라 하고 한편에서는 모두 충(忠)이라 하니, 어떻게 처치해야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송인명(宋寅明)은 을사년 봄이 바로 탕평(蕩平)의 좋은 기회이었으나 불행히 잃었다고 하는데, 그때에 탕평하려 하였으면 또 사기(事機)가 과연 어떠하였을는지 모른다. 을사년 사람들은 세자를 세운 것을 모두 충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전에 정승을 지낸 세 사람을 모두 역이라고 하고 지금 영상(領相)을 거괴(巨魁)라 대답하려 할 것인데, 역이라는 한자를 보통 이야기로 하는 것이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영상의 일은 그때에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내가 그때 혼란한 가운데 편벽한 의논을 주장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뉘우치는 것이 있다. 경(卿)은 번안(飜案) 때에 같이 입시(入侍)한 것을 혐의하나, 경이 그때 아뢴 것을 내가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그때 경은 도사(都事)를 보내어 이건명(李健命)을 그 곳에서 참형(慘刑)을 집행한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고 말하였을 뿐이고 달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의 마음을 내가 어찌 헤아려 알지 못하랴마는, 이 한 가지 때문에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 있다. 경은 또 이천기 등이 환시(宦侍)와 체결한 죄를 말할 때에 엄히 방지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나도 그때에 장세상(張世相)의 일 때문에 하교한 것이 있다. 경이 지난번 말한 것은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제 혼동을 혐의삼으려 하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정인중을 번안(反案)하여도 경은 사진(仕進)하지 못할 리가 없고 네 사람을 추탈하여도 또한 인혐(引嫌)할 일이 없거니와, 이천기·김일경 등을 백 번 번안하더라도 피차가 어찌 역이 되는 줄 모르겠는가? 일전의 일로 말하면 민진원(閔鎭遠)을 특별히 풀어 준 뒤에 조정의 논의가 지난번과 같다면 조정의 신하들이 쟁집(爭執)하는 것이 어떠하였으랴마는, 아직 그 감분(減分)을 한 마디도 말하지 않으니, 마음이 실로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저 네 사람과 심장이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어찌 사진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신은 편론(便論)에 대하여 성질이 서로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벼슬하기 전부터 무릇 논의에 관계되는 것은 마음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천위(天威)를 지척에 대하고 어찌 감히 마음을 속이겠습니까? 신은 당습에 병든 자가 아닌데, 어찌 시세에 얽매여 까닭 없이 사진하지 않을 뜻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시세가 어렵고 위태한 때이겠습니까? 성교가 이처럼 계속되니 성심으로 돈면(敦勉)하시는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인책한 꼬투리는 전과 다름없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아뢴 바가 성심(聖心)에 들지 않은 것을 인퇴(引退)하는 꼬투리로 삼겠습니까? 또한 시배(時輩)의 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네 사람이 화복에 흔들렸는지는 신이 본디 모릅니다마는, 모든 일은 나타난 자취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자를 세워 대리하게 하는 일이 의심할 만한 자취가 있으면 다스리고 죄주어도 안될 것이 없겠으나, 이제 국가의 계책이라 하여 역적을 다스리는 율(律)로 결단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실로 관계되는 것이 있으므로 참 섭한 사람이 아니라도 워낙 벼슬하는 의리에 어려움이 있는데, 더구나 이미 신원(伸冤)을 청할 때에 참섭하였으니, 어찌 감히 무릅쓰고 재직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제신(諸臣)은 변초(變初)에 심사(心事)가 반드시 이러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제 반드시 이진유(李眞儒)를 죽이고 유봉휘(柳鳳輝)에게 역률을 시행하고 사충사(四忠祠)를 중건(重建)한 뒤에야 제신이 조정에 설 수 있는가? 이것은 결코 안될 일인데, 경이 끝내 이렇게 하면 탕평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손을 잡고 분부하기를,
"쾌히 행공(行公)하겠다고 승낙하라."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성교가 이처럼 간절하시니 삼가 잠시 머무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영상과 함께 옥하(屋下)에서 강론하고 결코 젊은 무리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성교가 이이명·김창집을 논단(論斷)한 것은 해와 별처럼 밝아서 천하와 후세에 할말이 있을 수 있다. 저 이이명·김창집의 무리는 이미 범진(范鎭)·한기(韓琦) 같은 충성이 없고 끝내 어떤 불순한 의사를 가졌으니 딴마음을 가진 것은 주벌할 수 있는 법인데, 저 상신(相臣)은 붕당에 아첨하기에 바빠서 방자하게 죄를 씻어 주려고 해명하는 논의를 하였으니, 매우 무엄하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전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고(故)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과 임금 앞에서 을사년의 무옥(誣獄)657) 을 논할 때에 이준경은 말하기를, ‘선류(善類) 중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많습니다.’ 하니, 이이는 말하기를, ‘군자는 다 소인의 손에 죽는데, 상신의 말이 어찌하여 모호합니까?’ 하였습니다. 이제 홍치중이 네 대신의 원통함을 말하고 임금의 뜻과 시론(時論)을 헤아려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를 역적이라 하였으나, 김용택 등이 국가를 위하여 만 번 죽을 처지에 나와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에 힘을 다하였으니 충성한 것은 있거니와, 어찌하여 역적이라 부릅니까? 노론 가운데의 한 무리가 붕당을 없앴을 때에 원경하(元景夏) 등 여러 사람이 이 논의를 이어받아 억지로 충역(忠逆)을 나누어 신축년·임인년에 사사(死事)한 신하에게 50년 동안 해를 끼쳤으니, 홍치중은 실로 죄를 지은 우두머리가 됩니다. 저 사신(史臣)들은 김일경의 무리이어서 세자를 세워 대리하게 하는 것을 찬탈(簒奪)하고 폐립(廢立)하는 것이라 하려 할 것이므로 천하가 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인데 그들에게 어찌 주벌하겠습니까마는, 홍치중으로서도 오히려 붕당에 아첨하기에 바빴으니,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82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註 647]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 [註 648]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註 649]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註 650]
효경(梟獍) : 올빼미와 파경(破獍).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 먹는 새. 파경은 저를 낳은 수놈을 잡아 먹는 짐승. 곧 배은망덕한 악인을 뜻하는 말.- [註 651]
약원(藥院) : 내의원(內醫院).- [註 652]
문생 천자(門生天子) : 당(唐)나라 말엽에 환관(宦官)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황제(皇帝)를 폐지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였는데, 환관이 황제 보기를 시험관이 문생(門生)을 보듯 한다고 하여 생긴 말임.- [註 653]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註 654]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문제 : 숙종 41년(1715) 《가례원류》의 발문으로 인하여 일어난 노·소론간의 당파 싸움을 이름. 이 문제로 이듬해인 숙종 42년(1716)에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부자가 추탈(追奪)을 당하고, 윤선거의 문집(文集)이 훼판(毁板)되었음.- [註 655]
국본(國本) : 세자.- [註 656]
이집(頤集) : 이이명·김창집.- [註 657]
을사년의 무옥(誣獄) : 명종(明宗) 즉위년(1545)에 일어난 을사 사화(乙巳士禍)를 이름. 명종의 외숙(外叔)이며 소윤(小尹)의 거두인 윤원형(尹元衡)과 대윤(大尹)의 거두인 인종(仁宗)의 외숙 윤임(尹任)의 불화로,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등극하자, 문정 왕후(文貞王后)가 수렴 청정(垂簾聽政)하게 됨을 이용하여 소윤이 음모를 꾸며 대윤인 윤임(尹任)의 일가 및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이고 많은 명사를 몰아낸 일.○辛未/上御診筵。 召見左議政洪致中, 勉以視事。 致中曰:
"臣之引嫌, 非如一時是非所爭, 而罪名尙在身上, 未蒙勘處, 豈可以聖敎之敦勉, 晏然冒出乎? 向日聖敎中, 有曰: "自以定策爲有功, 私也, 非公也, 謂之有定策之功, 而待之頗異, 亦私也, 非公也。" 此敎誠爲至當。 定策旣是宗社大計, 若有一分要功之心, 是將爲無所不至者矣。 設令辛丑諸臣, 謂之要功, 其若要功, 當在甲辰, 而伊時金昌集等四人, 已身死矣, 雖欲要功, 其可得乎? 此外臣僚無可稱之功, 亦豈有要功之人乎? 甲辰以後疏章, 往往有以此爲言者, 此蓋以小人之腹, 妄度天地之大, 或慮一邊人進用, 有此等疏章, 有同妬婦之言, 不足取信, 而無非偏論之害矣。 至若人主用捨之道, 如天地之裁成萬物, 當以至公爲心, 謂之有定策之功, 待之有別, 豈至公之道乎? 然其人可用, 而以嫌疑之故, 捨而不用, 此亦私也, 非聖人無嫌之義也。 聖敎又曰: "有罪者罪之, 無罪者伸之可也。" 而乙巳竝與鄭麟重、金龍澤而一倂請伸, 豈有如許事理? 臣於頃年天紀家上言時, 曾亦有所陳白矣。 大抵今番逆變, 有根本, 辛丑事, 豈有他意? 不過宗社大計, 爲先朝分勞。 此豈敢疑之處, 而如韓世良疏中, 陰移天位等說, 已是常理之外, 一鏡之疏, 專以建儲代理, 歸之簒逆。 夫建儲代理, 卽祖宗已行之事, 而人言之疑亂, 至於如此。 彼失志怨國之徒, 本有梟獍之性, 豈不聞而雀躍, 以啓凶逆之心乎? 今番賊招中, 有八年經營之說, 以此觀之, 則自建儲後, 已有凶圖矣。 初出傾陷之計, 終爲亂逆之源, 黨論之害, 可勝言哉? 甲辰國恤時, 景廟未寧之候已久, 湯劑進御亦多, 此必俱載於藥院日記。 闕內出入之人, 夫豈不知而方外之人, 猶未詳知, 自遭天崩之慟, 凶逆輩以爲: "大行朝初無疾恙, 而昇遐於一夜之間。"云, 其意豈不凶慘乎? 此所以爲維賢凶言之根抵矣, 凶逆之徒, 與一鏡之黨, 私相唱和, 略無顧忌, 自聞此等之說, 臣子之心, 當如何? 乙巳以後, 諸臣亦豈無黨論者? 而不避已甚之嫌, 欲嚴懲討之典者, 非爲進退得失而然矣。 鄭澔、閔鎭遠, 或筵白或箚陳, 蓋爲明先王盛德, 而亦欲防禍亂之源也。 情志疑阻, 故初頭非斥, 或不是異事, 到今事變之後, 則諒其心事, 可謂公心矣。 頃聞宋寅明, 偶然過訪談話之際, 以爲: ‘渠在臺閣時, 亦論兩臣之罪矣。 逆變後思之, 或者其苦心, 有先見處, 今則意見實異於前日。’云, 其心豈不公平乎? 今番凶逆, 實千古史牒所無之變也。 淸州賊變時, 凶檄中有曰: ‘逆臣鳳祥。’ 必加之以逆字者, 其意蓋以今日事殿下者, 皆謂之逆也。 雖以辛胤祚事言之, 將聚兵數百, 先屠臣之家屬, 亦此意也。 是故, 凶逆之輩, 以請建儲代理之人, 指爲逆魁矣。 今一邊治逆, 而反伸逆輩, 所謂義理, 古今寧有此理? 若以金昌集四人, 謂有逆心, 亟加臣護逆之律, 以正其罪, 如以爲冤, 更有處分, 然後國家之刑政始明矣。 不然則聖朝寬仁, 雖不以此罪臣, 臣之廉隅, 其可晏然在職乎?
都承旨宋成明曰: "大臣雖如是縷縷仰達向日處分, 大公至正, 可以有辭於天下後世矣。" 上曰: "所謂定策云者, 何也? 此殆同彼此訟端, 俱宜脫略處也。 宋之范鎭、韓琦, 於英宗定策之後, 豈有一毫要功, 如唐之門生天子者乎? 予雖不德彼此偏論, 予何與焉? 卿其從容恕諒焉。 所謂老論、少論, 曾在先朝, 不敢形於辭色, 自丙申《家禮源流》之後, 一倍層激, 此固當付之百代公議者也。 伊時李眞儒, 獨爲入對, 柳鳳輝、鄭栻以玉堂陳箚, 此皆辛丑凶疏之本也。 一邊人又爲毁板迫切之擧, 黨論安得不層激乎? 丙申以後, 有勢不兩立之形, 一邊人當朝, 一邊人輒無同朝者, 各以死生爲心, 辛丑年間, 至有持斫刀陳疏闕外之擧矣。 景廟以仁厚之德, 不爲深治, 此等之習, 當路之人, 自懷不安之心, 遽出先制之計, 闖生定國本之議, 以爲止息邪說之計, 此果有范鎭、韓琦之忠, 而比其心事, 不啻霄壤矣。 卿果謂之無一毫私意乎? 純然無雜然後, 方可謂之忠也。 此則終有甚麽意思之參錯者, 決非忠也。 予之學問, 雖不深, 豈以定策之功, 厚一邊薄一邊乎? 少論有一鏡輩梟獍之性, 老論有麟重輩梟獍之性, 彼此豈有無逆之黨乎? 自有黨論以來, 無智愚、賢不肖之分。 辛壬之獄, 逆則只謂之逆可也, 誑惑、梟獍, 混指一色, 謂之逆黨, 甘心後已。 又以麟重輩事, 鏡黨看作奇貨, 稍稍染黨者, 以金昌集謂之撓惑於麟重, 而比之於一鏡, 有輕重、淺深之別矣。 予於辛丑間末梢事, 有嗚咽下敎者矣, 德修事, 言之汚口, 而藥之一字, 從何處出耶, 其可謂之不忍杖乎? 此實維賢凶言之本也。 有此等之凶言, 弼夢輩以其獄事中誣招, 自謂扶得萬古綱常, 明正德修之罪, 然後可以明示予意於天下後世, 故有仍置逆案之敎矣。 如李倚天者, 以爲伸脫麟重、天紀之計, 豈不駭然乎? 金昌集四人事, 當言之矣。 李頤命則久在藥院, 熟知其人矣。 予於向時, 以憂國忘家許之, 非爲慰藉也。 蓋亦不免動於禍福, 而兼有怪惡之子矣。 若其不入於推戴, 予豈不知之? 而但以器之之故也。 金昌集, 予不爲任使, 亦知其爲人矣。 其動於死生、禍福者頗多矣。 追奪之罰, 於死者, 可謂極罰, 而予於向時, 頗有過中, 故今番追奪之罰, 非施逆律, 蓋以低仰之者也。 一邊稱逆魁頤、集, 一邊純謂之忠, 未知何以處之, 然後可以有辭於天下後世矣。 宋寅明, 以乙巳春, 正是蕩平好機會, 而不幸失之云矣。 其時若欲爲蕩平, 則又未知事機之果如何矣。 乙巳人, 以建儲, 純謂之忠, 而必欲爲對, 以曾經三事者, 俱謂之逆, 以卽今領相謂之巨魁, 逆之一字, 是爲常談, 豈不駭然乎? 領相事, 雖伊時亦不撓奪矣, 予於其時, 坑坎中偏僻之議, 不免主張, 心有所悔恨矣。 卿雖以翻案時, 同爲入侍爲嫌, 卿之伊時陳達, 予豈不記有乎? 伊時卿但曰: ‘發遣都事, 莅斬李健命, 前古所無而已。’ 他不爲對。 卿心, 予豈不諒知? 而以此一着, 亦有所傍照者矣。 卿且言天紀輩締結宦侍之罪, 以嚴防限爲言, 予亦於伊時, 以張世相事, 亦有所下敎者矣。 卿之向日所言, 不過如此, 而今欲混同爲嫌, 寧不慨然? 反案麟重, 而卿無不仕之理, 追奪四人, 而又無引嫌之事, 雖百番反案, 天紀、一鏡輩, 彼此豈不知爲逆乎? 以日昨事言之, 閔鎭遠特放之後, 朝論若如向時, 廷臣之爭執當如何, 而尙無一言, 其減分可知, 心實喜之。 大抵若不與四人, 心腸相連, 則豈有不仕之理乎?" 致中曰: "臣於偏論, 性不相近。 自在韋布, 凡係論議, 心所不喜。 咫尺天威, 其敢欺心? 臣非痼於黨習者, 寧有拘於時勢, 無端不仕之意? 況時勢艱危之日? 聖敎如是縷縷, 非不知誠心敦勉之意, 而引罪之端, 與前無異。 臣何敢以所陳之不槪聖心, 爲引退之端? 亦非動於儕流之言也。 四人之動於禍福與否, 臣固不知, 凡事當觀顯著之跡。 建儲代理, 若有可疑之跡, 治之罪之, 固無不可, 今以爲國家之計, 斷之以治逆之律, 豈不冤痛乎? 此事實有關係, 雖非參涉之人, 固有難於從宦之義, 況旣已參涉於請伸之時, 何敢冒沒在職乎?" 上曰: "卿何如是爲言乎? 諸臣於變初, 心事必不如是矣, 今必殺李眞儒, 施逆律於柳鳳輝, 重建四忠祠, 然後諸臣可以立朝耶? 此則決不成之事, 卿若終始如此, 蕩平無可望矣。 仍命進來, 握手敎曰: "以快爲行公, 爲諾焉。" 致中曰: "聖敎若是勤摯, 謹當姑留矣。" 上曰: "卿須與領相, 屋下講論, 別生義理, 切勿動於年少輩之言也。"
【史臣曰: 聖敎之所以論斷頤、集者, 昭如日星, 可以有辭於天下後世矣。 彼頤、集輩, 旣無范鎭、韓琦之忠, 而終有甚麽意思之參錯, 則無將之心, 可得以誅之。 彼相臣者, 急於媚黨, 肆爲伸解之論, 無嚴甚矣。" 臣謹按, 昔先正臣李珥, 與故相臣李浚慶, 論乙巳誣獄於上前, 浚慶言: "善類, 多冤死者。" 珥曰: "君子皆死於小人之手, 相臣之言, 何糢糊也?" 今致中雖稱四大臣之冤, 揣上意與時論, 以金龍澤、李天紀爲逆, 龍澤輩爲國家出萬死, 效力於宗社大計, 忠則有之, 何名曰逆? 老論中一隊蕩黨, 如元景夏諸人, 祖述是論, 强分忠逆於辛壬死事之臣, 流害五十年, 致中實爲罪之首。 彼史臣輩, 鏡黨, 而必欲以建儲代理爲簒奪廢立, 滔滔乎無能出是圈者, 於渠何誅, 而以致中猶以爲急於媚黨, 其亦可冤也已。】
- 【태백산사고본】 16책 1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82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註 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