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구 공초
처음에 안동(安東) 사람 권후(權煦)가 국초(鞫招)에 나왔으므로 잡아오라고 명하였는데, 안동 부사(安東府使) 박사수(朴師洙)가 이 고을의 지경 안에 권후라는 이름이 없다며 권구(權榘)를 잡아 보냈다. 권구는 곧 안동에서 명망이 있는 선비로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있었다. 취초(取招) 때 공초하기를,
"이번의 역변(逆變)이 불행하게도 사족(士族)에서 나왔으므로 분하고 슬픈 마음이 다른 도(道)보다도 갑절이나 더합니다. 몇 사람의 사류(士類)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역적을 치는 일로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의 서원(書院)에 모였으므로, 신도 또한 바야흐로 모임에 갔는데, 소호사(召號使)가 글을 보내 서로 의논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신이 ‘소호사는 이미 조정의 명령을 받았으니 마땅히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고 바야흐로 앞으로 나아가려 했는데, 안무사(安撫使)가 또 글을 보내서 불렀기 때문에 이내 부중(府中)으로 갔다가 잡혀서 오게 되었습니다. 을사년284) 무렵에 신이 예천 서원(醴泉書院)에 갔더니, 원장(院長) 및 지방의 장로(長老) 5, 6인이 함께 모였는데, 한 소년이 들어와서 스스로 ‘육임점(六壬占)285) 을 배우려고 합니다.’ 하기에 신이 ‘그대를 보건대, 또한 소년이고 재주가 있으므로 배울 만한 것이 많은데, 어찌 잡술(雜術)을 배우려고 하는가?’ 하였습니다. 뒤에 물어 보니, 이인좌(李麟佐)였습니다. 정희량(鄭希亮)은 순흥(順興)에 살고 이인좌(李麟佐)는 문경(聞慶)에 살며 서로 교통(交通)하여서 한 가지 말과 한 가지 일도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니, 바야흐로 그 변(變)을 일으킬 때 가령 서로 관계되는 일이 있다면 그들이 어찌 서로 통하지 않고서 도리어 김홍수(金弘壽)에게 들었다는 이유로 핑계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늙어 쓸모없는 선비이니, 그들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3월 16일에 한 벗이 와서 신에게 ‘변산(邊山)에 도적(盜賊)이 크게 일어났으니, 처자(妻子)를 가야산(伽倻山) 속에 대피시켜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19일에 신이 권덕수(權德秀)와 함께 갔는데, 저녁 뒤에 절의 중이 와서 청주(淸州)의 변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신이 권덕수와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고 ‘예로부터 역변(逆變)에 어찌 한정이 있었으리오만, 어찌 일시(一時)에 두 수신(帥臣)을 함께 죽인 일이 있었겠는가? 이는 신자(臣子)로서 편안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인하여 권덕수와 함께 산을 내려와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의 집에서 자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 의병(義兵)을 일으켜 역적을 칠 계책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고개 밖에 있으면서 일찍부터 사귀어 좋아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권구가 이재(李栽)·김성탁(金聖鐸)·권덕수(權德秀)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권구라는 이름자가 미심쩍으니, 마땅히 안무사(按撫使)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하여 장문(狀聞)한 뒤에 처리하여야 합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조화(造化)의 신축(伸縮)이 각각 스스로 때가 있으니, 이와 같은 무리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것이 백성들을 권장하여 움직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가서 안무사를 만나본 일로써도 그 마음을 밝힐 수 있고, 항상 이재와 사귀어 좋아한 것으로 또한 그 벗을 가려 사귀는 단서를 알 수 있겠다."
하고, 명하여 특별히 놓아 주게 하였다. 이때 밤이 깊어 궐문(闕門)이 이미 닫혔으므로, 이내 유문(留門)286) 하여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권구가 말하기를,
"이처럼 망극(罔極)한 변을 만났어도 얼굴 빛이 일찍이 변하지 않았는데, 이제 성교(聖敎)를 받자오니 자연히 눈물이 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나장(羅將)과 포졸(捕卒)하게 명하여 호송(護送)케 하였다. 대사간 송인명이 말하기를,
"국옥(鞫獄)의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마땅히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셔야 합니다. 이 뒤로는 간사한 사람이 만약 다시 이런 투를 본따서 스스로 ‘의병(義兵)을 일으킬 마음이 있었고, 아무와 사귀었다’고 한다면 장차 놓아 주시겠습니까? 놓아 주지 않는다면 처분이 공평치 못할 것이고 놓아준다면 간사(奸邪)한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죄인을 유문(留門)하여 내보내는 것은 더욱 사체를 손상시킴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국청의 죄수로 살아 나가는 자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한 사람도 놓아 보낸 자가 없었다."
하고, 듣지 않았다. 뒤에 권구의 이름이 또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나, 임금이 전에 이미 특별히 놓아 보냈다는 이유로써 그대로 두고 묻지 않았다. 처음에 박사수가 안동에 이르러 지경 안의 이름이 알려진 인사를 불러 모아 도적 칠 일을 의논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권구만 홀로 이르지 않았다.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권구를 나포(拿捕)하기 위해 부아(府衙)에 들어오자, 비로소 와서 박사수를 뵙기를 청하니, 즉시 붙잡아 서울로 보냈다. 권구가 풀려나자 안동 사람들이 박사수에게 말하기를,
"3월의 변란 전에 이웅보(李熊輔)가 안동의 풍산현(豐山縣)에 이르러 권구를 만나 보고 난(亂)을 일으킬 것을 모의(謀議)하니, 권구가 대답하기를, ‘내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이 일은 따를 수 없다.’고 하여 이웅보가 성내어 갔다."
하였다. 권구가 이런 말을 친국(親鞫) 때에 바로 대답하였기 때문에 풀려났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284]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 [註 285]
육임점(六壬占) : 골패 따위로 치는 점.- [註 286]
유문(留門) : 궁문(宮門)의 개폐(開閉)는 정시(定時)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꼭 나가야 할 사람과 들어올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 개폐를 보류하던 것.○初安東人權煦出鞫招, 命拿來, 安東府使朴師洙, 以本境無煦名, 捉送權榘。 榘, 卽安東望士, 以學行名。 及取招供: "今番逆變, 不幸出於士族, 憤慟之心, 倍於他道。 若干士類, 以倡義討賊事, 會于文忠公 柳成龍書院, 臣亦方赴會, 召號使貽書欲與相議, 臣以爲召號使, 旣被朝命, 當赴其所, 方進去, 安撫使又貽書召之, 故仍前往府中, 就拿以來。 乙巳年間, 臣往醴泉書院, 院長及鄕長老五六人, 共會有一少年入來, 自稱欲學六壬占, 臣曰: ‘觀君亦是少年有才, 所可學者多矣, 何可學雜術耶?’ 後問之, 麟佐也。 希亮居順興, 麟佐居聞慶, 互相交通, 一言一事, 無不相知, 方其作變之時, 設有相關之事, 則渠輩豈不相通, 而乃反托以聞之於金弘壽乎? 臣年老腐儒, 渠輩將安用哉? 三月十六日, 一友人來言臣曰: ‘邊山盜賊大起, 避置妻子於伽倻山中爲好。’ 故十九日, 臣與權德秀同往, 夕後, 寺僧來傳淸州變報。 臣與德秀, 相對隕淚曰: ‘自古逆變何限, 豈有一時, 同殺兩帥臣之事乎? 此非臣子安坐時也。’ 因與德秀, 同下山, 宿於文忠公 金誠一後孫家, 遂還家, 爲倡義討賊之計。" 上曰: "汝在嶺外, 所嘗交好者何人?" 榘以李栽、金聖鐸、權德秀爲對。 諸臣多言: "榘名字未審, 宜令安撫使, 査實狀聞後處之。" 領議政李光佐言: "造化伸縮, 各自有時, 如此之類, 置之度外, 可爲聳動之道。" 上敎以往見安撫使, 可明其心, 常與李栽交好者, 亦可知其取友之端, 命特放。 時夜深, 闕門已閉, 仍命留門出送。 榘言: "遭此罔極之變, 而色未嘗變, 今承聖敎, 自然出涕。" 上又命羅將、捕卒, 護送。 大司諫宋寅明曰: "鞫體至重, 當慮後弊。 此後奸人, 若復踵此套, 自謂有猖義之心, 與某人交, 則將放之耶? 不放, 則處分不平, 放之, 則奸弊無窮, 殿下將何以處之耶? 致於罪人之留門出送, 尤有傷於事體矣。" 上曰: "古者鞫囚多生出者, 今番無一人放送矣。" 不聽。 後榘名, 又出賊招, 上以前旣特放, 置而勿問。 初, 朴師洙至安東, 召聚境內知名之士, 議討賊事, 諸人畢會, 榘獨不至。 及禁都爲拿榘, 入府, 始來請謁師洙, 卽執送京。 及榘被釋, 安東人言於師洙曰: "三月變亂, 前李熊輔至安東 豐山縣, 見榘謀作亂, 榘答云: ‘吾頭可斷, 不可從之。’ 熊輔怒而去。" 榘以此, 直對於親鞫時, 故見釋云。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1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