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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7권, 영조 4년 4월 1일 신사 5번째기사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우지령과 무주의 고갯길을 먼저 점거하여 역적이 장차 나아가지 못하다

역적 이웅보(李熊輔)정희량(鄭希亮) 등이 함양(咸陽)에서 거창(居昌)으로 돌아와 군사를 나누어 둘로 만들었다. 이웅보우지령(牛旨嶺) 밑에 둔쳐서 장차 지례(知禮)로 향하려 하고, 정희량생초역(省草驛)에 둔쳐서 장차 무주(茂朱)로 향하려 하는데,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금오진(金烏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지령의 험한 곳을 먼저 점거하고, 무주의 고갯길에도 또한 전라도의 군사가 점거하여 지킴이 있으니, 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시번(李時蕃)진주(晉州)에 있어, 성문을 닫고 군사를 가지고서도 끝내 적을 치지 않았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이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에 이르니 문지기가 거절하므로, 우하형이 검(劍)으로 위협하여 드디어 들어가서 이시번을 책망하기를,

"역적의 난(亂)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로서는 마땅히 피를 흘려 얼굴을 씻으면서 토벌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공은 대장(大將)이 되어서 강병(强兵)을 가지고도 나아가지 않으니, 장차 무엇으로써 천주(天誅)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시번은 성품이 나약하여 끝내 감히 나가지 못하고 영장(營將) 이석복(李碩復)을 시켜 우하형 등을 거느리고 먼저 가게 하였다. 이석복산음(山陰)에 이르러 다시 머무르고자 하므로, 우하영이 강개(慷慨)하여 검을 치면서 말하기를,

"적을 치는 일이 날로 급한데, 어찌 노약자를 버리고 정장(精壯)을 가려 뽑아서 빨리 달려가 핍박하여 싸우지 않겠는가?"

하니, 이석복이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그대가 능히 이것을 하겠는가?"

하였다. 우하형이 말하기를,

"내가 능히 할 수 있다."

하고, 드디어 이석복과 군사를 나누어 천총(千摠) 남해 현감(南海縣監) 윤하(尹㵑)기복(起復)227) 한 전(前) 현감(縣監) 하필도(河必圖) 등을 거느리고 이틀 걸을 길을 하루에 걸어서 빨리 달려가고, 이석복은 하동 부사(河東府使) 박도상(朴道常)과 함께 잇따라 나아갔으며, 이시번도 또한 뒤따라 나갔으나 삼가현(三嘉縣)에 이르러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5면
  • 【분류】
    군사(軍事) / 변란(變亂)

  • [註 227]
    기복(起復) : 상중(喪中)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나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하는 일.

○賊熊輔希亮等, 自咸陽居昌, 分兵爲二。 熊輔牛旨嶺下, 將向知禮, 希亮省草驛, 將向茂朱, 善山府使朴弼健金烏鎭兵, 先據牛旨之險, 茂朱嶺路, 亦有全羅道兵據守, 賊懼不敢進。 時, 慶尙右兵使李時蕃晋州, 閉城擁兵, 終不討賊。 昆陽郡守禹夏亨領郡兵至晋州, 閽者辭之, 夏亨脅之以劍, 遂入責時蕃曰: "賊亂至此, 臣子之義, 當沫血致討, 今公爲大將, 擁强兵不進, 將何以逃天誅耶?" 時蕃性懦, 終不敢出, 令營將李碩復, 率夏亨等先行。 碩復山陰, 復欲逗遛, 夏亨慷慨擊劍曰: "討賊日急, 今何不棄老弱, 抄精壯疾趨逼戰?" 碩復囁嚅曰: "君能爲此否?" 夏亨曰: "吾能爲之。" 遂與碩復分兵, 領千摠南海縣監尹㵑、起復前縣監河必圖等, 倍道疾馳, 碩復河東府使朴道常繼進, 時蕃亦隨後出次三嘉縣, 終不進。


  •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5면
  • 【분류】
    군사(軍事)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