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의 거창 함락과 이웅보의 글
적이 거창(居昌)을 함락시키니, 현감(縣監) 신정모(申正模)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고 좌수(座首) 이술원(李述源)이 죽었다. 이웅보(李熊輔)는 이인좌의 동생 이웅좌(李熊佐)의 변명(變名)이다. 이인좌가 청주에서 양성(陽城)으로 갈 때 이웅보가 먼저 정희량과 안동(安東)에서 만나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3월 13일에 안동에 이르러 보니 정희량이 안음에 있으면서 오지 않았다. 이웅보가 드디어 안음으로 가서 모집해 놓은 군사를 고현창(古縣倉)에서 일으키고 그 창고의 곡식을 풀어 먹였다. 20일에 적당(賊黨)이 칼을 차고 말을 타고 곧장 안음 현아(安陰縣衙)로 들어가 현감 오수욱(吳遂郁)을 보고는 글을 던지고 갔다. 오수욱에게 던진 그 글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기울어 병민(兵民)이 사방에서 일어나 종사(宗社)가 장차 위태롭게 되었으니, 마치 불이 처음 붙은 것과 같아 그 형세는 반드시 꺼야만 한다. 이러한 때에 그 누가 능히 한 모책(謀策)을 내어 나라를 위한 심장(深長)한 걱정을 하겠는가? 이웅보(李熊輔)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하므로, 마땅히 죽을 힘을 다해 분발해서 위로는 종사를 안정시키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이에 3월 20일에 동지(同志) 한두 사람과 함께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사직(社稷)을 위할 계책을 하는데, 혹 이런 충적(忠赤)을 좌우(左右)에 알려 주지 않아서 포란(暴亂)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감히 이런 충정(衷情)을 알리니, 이 죄를 조금만 용서하여 이 일이 성공되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함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오수익이 두려워하여 병영(兵營)으로 도망했다. 또 거창 현감 신정모에게 투서(投書)하기를,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이제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종사가 망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 못된다. 내가 선파(璿派)의 가계(家系)에서 태어났으니 비단 세신(世臣)일 뿐만이 아니므로, 의리상 나라와 함께 죽어야 한다. 망령되이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고자 하여 밤낮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드디어 동계(同溪)의 후손 정희량(鄭希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종사(宗社)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전케 할 계책을 삼고자 하니, 마땅히 먼저 합하(閤下)에게 나가 충적(忠赤)을 토론하면 거의 양해하여 좌우(左右)로 공제(共濟)할 것 같기에 감히 전진하지 않고 고현(古縣)에 퇴복(退伏)하여 신사(信使)가 왕복하기를 기다리겠다. 이로써 이 놈의 온 가슴속에 충적(忠赤)이 있을 뿐 맹세코 다른 마음이 없음을 밝힌 연후에 함께 죽을 힘을 다해 종사를 붙들기를 원하나, 충심(衷心)을 폭로하지 못하여 두려움이 더욱 깊다. 이는 국가의 일이므로 외읍(外邑)의 수령 역시 범연하게 보거나 대수롭지 않게 듣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된다. 귀읍(貴邑)의 병마(兵馬) 및 제반 군기(軍器)를 혹 빌려준다면 며칠 안에 북상(北上)하여 국난(國難)에 달려갈 것이다."
하였는데, 신정모 역시 두려워하여 담을 넘어 도주하였다. 좌수 이술원(李述源)이 도보로 20여 리를 달려가 산골짝 사이에서 신정모를 뒤좇아가서 그의 소매를 잡고 감개하며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웅보(李熊輔)가 서울을 침범하려고 꾀하니, 이는 신인(神人)이 함께 통분해 하는 바인데 무슨 까닭으로 성을 버리고 부인이나 여자들이 하는 일을 하십니까?"
하였으나, 신정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웅보가 본현으로 들어와 장사(壯士) 50여 인을 보내 이술원을 찾으며 말하기를,
"이술원은 어디에 있느냐?"
하니, 이술원이 칼을 빼어들고 손으로 자신을 찌르려다 포박을 당하자, 이웅보를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네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빨리 나를 죽여라."
하였다. 정희량이 말하기를,
"상형(上刑)을 쓰지 않으면 영(令)을 어긴 자를 징계하기에 부족하다."
하고는 이에 지당(支黨) 나숭곤(羅崇坤)으로 하여금 콧대를 베게 하니, 이술원이 죽음에 임하여 안색을 변치 않고 큰소리로 꾸짖기를,
"정희량이 반역을 하니, 나숭곤 너 역시 반역하느냐?"
하였다. 눈과 코를 베어 잠시 후에 곧 죽었는데, 이때 나이 50이었다. 침류정(枕流亭)에서 비전(飛電)이 나왔는데 그 빛이 붉어 본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임금이 어사(御史) 이종성(李宗城)을 보내어 그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증직(贈職)하고, 관찰사(觀察使)에게 명하여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여 포충사(褒忠祠)라 사액(賜額)하였다. 처음에 정희량이 거창현(居昌縣)에 들어가 이술원을 죽이고 또 향임(鄕任) 신명익(愼溟翊)을 붙잡아 장살(杖殺)하니, 신명익의 나이 53세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다. 이때 두 고을의 이민(吏民)과 군졸(軍卒)이 모두 적을 따르니, 적이 창고의 곡식과 공세(貢稅)의 미포(米布)를 더 내어 군민(軍民)에게 흩어주고, 각절의 승도로 하여금 기계(器械)와 기고(旗鼓)를 운반하게 하였으며, 각역(各驛)으로 하여금 마필(馬匹)을 세우게 하니, 위세가 아주 드높았다. 합천(陜川) 사람 조성좌(曹聖佐)는 본군의 대성(大姓)인데, 역시 정희량에게 응하고자 하여 먼저 군수(郡守) 이정필(李廷弼)을 보고 안음(安陰)의 적의 형세를 크게 과장해 공갈하고 위협했다. 이정필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후에야 그가 적임을 알고 가두었으며, 또 본군의 군사를 풀어 객사(客舍) 밖에 진을 쳐 자위(自衛)하니, 좌수(座首) 정상림(鄭商霖)이 조성좌와 함께 적을 따르고자 하여 이정필을 협박하기를,
"안음과 거창의 병세(兵勢)가 극히 성대하여 조석 사이에 합천을 도륙(屠戮)할 것인데, 조성좌 형제의 가동(家僮)이 또 수백 명이나 됩니다. 이제 조성좌를 가두어 이 무리들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니, 공은 진주(晉州)로 가서 병영(兵營)에 구원을 청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정필이 그 말을 믿고 22일 새벽에 도망해 가니, 정상림이 즉시 옥문을 열고 조성좌 등을 석방하고, 군중(軍中)으로 들어가 장교(將校)와 이졸(吏卒)을 거느리고 절을 하였다. 삼가(三嘉) 좌수 신만항(愼萬恒) 역시 현감 이정수(李廷秀)를 내쫓고 그 군사를 가지고 합천의 적에 붙었다. 감사 황선(黃璿)이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爀)에게 격문을 보내 우방장(右防將)을 삼아 성주·지례(知禮)·고령(高靈) 등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을 좌방장(左防將)으로 삼아 의령(宜寧)·함안(咸安)·단성(丹城) 등 고을의 군사를 거느려 좌우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였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은 본진(本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로(北路)를 따라 진군하면서 상주 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을 후원(後援)으로 삼고, 대구 영장 하옥(河沃)은 병이 심하여 황선이 그 군관 김진옥(金振玉)을 가영장(假營將)으로 차출하여 독전장(督戰將)이라 칭하여 여러 고을의 진군하는 군사를 독려하게 했다. 또 안동(安東) 영장 김정상(金鼎相)으로 하여금 속읍(屬邑)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날과 기각(掎角)을 이루어 함께 나가도록 하고, 또 우병사(右兵使) 이시번(李時蕃), 진주(晉州) 영장 이석복(李碩復)으로 하여금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南路)를 따라 진군하게 하였다. 이시번이 ‘마땅히 조정의 지휘를 기다려야 한다.’ 하면서 즐겨 군사를 내지 않으니, 오수욱(吳遂郁)·이정필(李廷弼) 등이 밤새 달려와 군사를 청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황선이 적의 정세가 연속(連續)되어 있다는 것을 조정에 치계하고, 황선이 오수욱·신정모를 잡아 장(杖)을 치고 이정필을 가두었는데, 신정모는 후에 좌죄(坐罪)되어 귀양갔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1면
- 【분류】사법(司法) /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 변란(變亂) / 인물(人物)
○賊陷居昌, 縣監申正模棄城走, 座首李述源死之。 熊輔, 麟佐弟, 熊佐變名也。 麟佐之自淸州赴陽城也, 熊輔先已與希亮, 約會安東, 擧事, 三月十三日, 至安東, 希亮在安陰不至。 熊輔遂赴安陰, 發所募兵於古縣倉, 發倉餉之。 二十日, 賊黨佩劍騎馬, 直入安陰縣衙, 見縣監吳遂郁, 投書而去。 其投遂郁書曰:
國運傾否, 兵民四動, 宗社將危, 若火始燃, 其勢必焇乃已。 於斯時也, 有孰能出一謀發一策, 爲國深長慮耶? 熊輔世受國恩, 義同休戚, 所當戮力感發, 上安宗社, 下保生民。 玆以三月二十日, 與同志一二, 糾合義旅, 以爲社稷之計, 或恐忠赤未喩於左右, 以致暴亂之誅, 齎心兢惕, 敢暴此衷, 庶幾少恕此罪, 以濟此事, 則宗社之幸。
國運不幸, 大亂方作, 宗社之不亡, 未可幸也。 不佞系出璿泒, 非但世臣而已, 義惟與國偕亡。 妄欲隻手扶天, 日夜東下, 遂與桐溪之孫鄭希亮, 倡率義旅, 欲爲安宗社保生民之計, 所當先進閤下, 討論忠赤, 庶幾見諒, 以共濟於左右, 不敢前進, 退伏古縣, 以待信使之往復。 以明此漢之一腔忠赤, 矢靡他然後, 願與戮力, 以扶宗社, 危衷未暴, 戰栗〔戰慄〕 冞深。 此是國家之事, 外邑之倅, 亦不可泛視歇聽, 不爲動念。 貴邑兵馬及諸般軍器, 或能相資, 不日北上, 以赴國難。
正模懼, 亦踰墻走。 座首李述源, 徒步二十餘里, 追正模於山谷中, 執其裾, 感慨而言曰: "吾聞主辱臣死。 今熊輔謀犯京師, 此神人之所共憤也, 何故, 棄城爲婦人女子之事乎?" 正模不聽。 熊輔入縣, 遣壯士五十餘人, 索述源曰: "李某安在?" 述源拔劍, 手自搏擊, 爲所縛, 大罵熊輔曰: "我不能食爾之肉, 亟殺我。" 希亮曰: "不用上刑, 不足以懲違令者。" 乃使支黨羅崇坤, 斬其頞, 述源臨死, 顔色不變, 高聲罵曰: "希亮叛, 崇坤亦叛耶?" 目鼻斷, 須臾立死, 時, 年五十。 有飛電出枕流亭, 其光赤, 縣人異之。 上遣御史李宗城, 賜祭于家, 贈司憲府大司憲, 命觀察使, 立祠宇賜號褒忠。 初, 希亮入居昌縣, 殺述源, 又執鄕任愼溟翊杖殺之, 溟翊, 時, 年五十三。 事聞, 贈左承旨。 時, 兩邑吏民軍卒, 皆從賊, 賊益發倉儲及貢稅米布, 散給軍民, 令各寺僧徒, 輸器械旗鼓, 令各驛立馬匹, 聲勢大熾。 陜川人曺聖佐、鼎佐, 本郡大姓也, 亦欲應希亮, 先見郡守李廷弼, 盛嚇安陰賊勢。 廷弼初不覺, 後知其爲賊而囚之, 且發郡兵, 陣客舍外自衛, 座首鄭商霖欲與聖佐, 從賊脅廷弼曰: "安陰、居昌兵勢極盛, 朝暮屠陜川, 曺聖佐兄弟, 家僮且數百人。 今囚聖佐, 此屬必且作亂, 公莫如赴晋州, 請授于兵營。" 廷弼信之, 以二十二日曉跳去, 商霖, 卽開獄, 釋聖佐等, 入軍中, 率將校、吏卒, 拜之。 三嘉座首愼萬恒, 亦逐縣監李廷秀, 以其軍, 附陜川賊。 監司黃璿撽星州牧使李普爀, 爲右防將, 領星州、知禮、高靈等邑, 草溪郡守鄭暘賓, 爲左防將, 領宜寧、咸安、丹城等邑兵, 分左右而進。 善山府使朴弼健率本鎭兵, 從北路進, 尙州營將韓㻋爲後援, 大丘營將河沃, 病甚, 璿以其軍官金振玉, 差假營將, 稱督戰將, 督諸邑進兵。 又令安東營將金鼎相, 率屬邑兵, 與韓㻋、猗角竝進, 令右兵使李時蕃、晋州營將李碩復, 率邑兵, 從南路進。 時蕃謂當俟朝廷指揮, 不肯發兵, 吳遂郁、李廷弼等, 星夜來請兵, 時蕃終不聽。 璿以賊情連續, 馳啓于朝, 璿拿遂郁、正模杖之, 囚廷弼, 正模後坐謫。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1면
- 【분류】사법(司法) /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 변란(變亂)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