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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6일 병자 9번째기사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이인좌의 공초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임어하여 친국(親鞫)하였다. 이인좌(李麟佐)를 형신(刑訊)하니, 이인좌가 공초하기를,

"한세홍(韓世弘)·이유익(李有翼)·이하(李河)·남태적(南泰績)·남태징(南泰徵)·김중기(金重器)가 이 일을 하였고, 임서호(任瑞虎)·조관규(趙觀奎)·임서봉(任瑞鳳)·임서린(任緖麟)·조덕징(趙德徵)·이배(李培)·이만(李晩)·이의형(李義衡)은 이번에 양성(陽城)에 모여 곧바로 청주(淸州)로 달려갔는데, 그때 모인 자 정행민(鄭行旻)·원만주(元萬周)양성에 살고, 권서봉(權瑞鳳)수원에 살며, 조동규(趙東奎)는 서울 향교동(鄕校洞)에 살았습니다. 권서린(權瑞麟)·권서룡(權瑞龍)·목함경(睦涵敬)양성에 살고, 이지경(李之景)청주에 살며, 위종사관(僞從事官) 유급(柳伋)양성에 사는데 도목(都目)203) 을 가지고 도망하였습니다.

청주에서 변란을 일으킬 때 부원수(副元帥)는 정행민·정계윤(鄭季胤)이 함께 하였는데, 병사(兵使)는 이배가 죽였으며, 영장(營將)은 목함경이 죽였습니다. 권서봉을 청주 원으로 삼고 안성(安城)에 왔고, 가병사(假兵使)는 신경제(申慶濟)의 손자 ·신천영(申天永)으로 정했습니다. 군사는 양성에 있을 때 2초(哨)였는데, 관문(關文)을 내어 징병했더니, 청안(淸安)의 원과 진천(鎭川)의 원은 도주하고, 장교(將校)가 군사를 이끌고 왔으며, 회인(懷仁)의 원 역시 도주했는데, 장교가 군사 15명을 이끌고 오니 박종원(朴宗元)이 투항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급이 흉관(凶關)과 흉격(凶檄)을 썼고, 외원(外援)에 대해서는 한세홍이, ‘호남 변산(邊山) 도적이 2초가 있고, 또 심유현(沈維賢)·박필현(朴弼顯)의 군사가 있으며, 나주(羅州)에서 나숭대(羅崇大)가 가정(家丁)과 족속(族屬)을 이끌고 오고, 평안 병사로 이사성(李思晟)이 들어올 것이다.’하였는데, 한세홍은 평안 병영(兵營)으로 내려갔습니다. 이호(李昈)양성에 사는데 모은 군사가 2초이고, 영남은 정희량(鄭希亮)안음(安陰)에 사는데 이번에는 오지 않았으나 이제 영남에 있으면서 군사를 동원하였으며 정희량의 족속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김홍수(金弘壽)는 상주(尙州)에 사는데 군사의 숫자는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는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무려 1천여 명은 됩니다. 당초에 기일을 3월 초 10일로 기약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습니다. 신은 응병(應兵)이 당도하였기 때문에 15일에 과연 군사를 일으키면서 임서린으로 하여금 탐지하도록 했는데 아직껏 서울에 오지 않았습니다.

내응(內應)은 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만약 영남·호남에서 군사를 동원하면 연곡(輦轂)의 친병(親兵)이 마땅히 모두 출정(出征)하게 될 것이니, 남태징·남태적이 서울의 일을 하되, 서울은 이유익이 주장하고 영남은 정희량이 하며, 그 나머지 김홍수등 6, 7인이 돕기로 했습니다. 정희량동계(桐溪)204) 의 후손인데, 1백 20명을 모아 이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의 선봉(先鋒) 정중복(鄭重復)양성에 살며, 중군(中軍) 이배(李培), 부장(副將) 정행민(鄭行旻), 진용 도위(進勇都尉) 목함경(睦涵敬)·이의형(李義衡)이 하였습니다. 이유익·한세홍이 항상 밀풍군(密豐君)이 인망(人望)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유익이 가서 보고 말하였더니, 밀풍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년 정월에 신이 상경하여 이하(李河)의 집을 방문했더니, 이하가 말하기를, ‘일은 애안(涯岸)205) 이 없고, 동당(同黨)이 매우 적다.’고 하기에,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그렇다면, 왜 시골에 있는 자를 일으켜 일을 하려 했느냐?’ 하였더니, 이하가 말하기를, ‘이는 마치 언덕에 올라 걷는 것과 같은데 어찌 중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권서린(權瑞麟) 역시 와서 이유익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장차 다 죽고 말 것이다.’ 하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권서린으로 하여금 군인을 거두어 입성시켜 반역하게 하자.’ 하기에, 신은 불가하다고 하였더니, 이하이유익은 말하기를, ‘우리들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를 죽이겠다.’ 하였고, 권서린은 말하기를, ‘영남을 탐지하는 일은 밖으로부터 기병(起兵)을 해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정월에 영남으로 내려가 김홍수정희량의 집에서 탐지했더니, 1백20명의 군사로 하고 날짜는 초 10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이런 일을 알고 돌아와 장차 응병하고자 하여 15일에 과연 거사하였습니다.

호남의 허실(虛實)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신의 동생이 5형제인데, 이웅좌(李熊佐)가 울면서 말렸고 기타 형제는 이준좌(李駿佐)·이기좌(李騏佐)이며, 끝의 동생은 아명(兒名)이 기아(夔兒)입니다. 신의 이름은 본래 현좌(玄佐)였는데 인좌로 고쳤습니다. 신이 봄에 동성(同姓) 5촌(寸)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재작년 상주(尙州)로 이사할 때 보아 잘 압니다. 모의(謀議)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刺客)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睦涵敬)정중복(鄭重復)·정중익(鄭重益) 등 형제이며, 직산(稷山)에 사는 권서린 역시 용력이 있고, 박준(朴晙)죽산에 살며 역시 용력이 있는데 군중에 와 있었고, 정중려(鄭重勵)직산에 삽니다. 이 밖에는 용력이 있는 자는 없습니다. 정행민과는 영(營)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들으니 정행민이 효용(驍勇)한 무사를 뽑아 자객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권서룡은 15일에 서울로 보냈더니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경상도에서 초닷새에 기병한다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신들 역시 지레 먼저 기병한 것입니다. 청주 병사를 반드시 먼저 제거해야 일이 완비되고, 고단(孤單)한 군졸로는 서울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청주를 함락시킨 것입니다. 경중(京中)을 정탐하기 위해 박준(朴晙)을 올려 보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지금은 이유익의 집에 보냈는데 모양은 늑염(勒髥)206) 이고 복색(服色)은 도포(道袍)를 입었으며 18일에 올라왔습니다. 김중만(金重萬) 역시 알았는데 중간에서 약속을 어기고 속였습니다. 권서린은 중간 키에 수염이 조금 나고 얼굴이 얽었으며 백포(白布) 도포를 입었는데 역시 이유익의 집으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징관(李徵觀) 역시 동당(同黨)인 듯한데, 동당과 약속하기를, ‘비록 패하더라도 다시 청주에서 만나 성을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재를 넘어 함께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정행민변산(邊山)의 적과 통하며 금방 올라온다고 하였으나 소식이 없고, 청주에 남아 있는 병사는 모두 관군입니다. 신이 대원수(大元帥)가 된 것은 바로 적도 가운데 권서린 무리가 모두 추존(推尊)하여 삼은 것이며, 홍양산(紅涼傘)207) 은 신이 스스로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일을 한 것입니다. 정행민(鄭行旻)은 바로 고(故) 상신(相臣)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입니다. 이유익조덕징(趙德徵)밀풍군(密豐君)의 집을 왕래한 것은 대개 조덕징밀풍군의 처질(妻姪)이기 때문인데, 이유익이 직접 가지 않고 조덕징을 시켜 탐문(探問)하기를, ‘외간에 이러한 말이 있다.’고 하니, 밀풍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덕징은 나이 스무 살 남짓되며 이삼(李森)은 그 안에 들지 않아서 처음에는 이유익과 더불어 제거할 뜻이 있었습니다. 남태적(南泰績)의 일은 신이 이유익한세홍에게서 들었는데, 남태적은 꾀를 써서 피하였고 남태징은 어리석은 자라서 그 가운데 들었습니다. 이유익이 말하기를, ‘이사주(李思周)밀풍군은 사촌(四寸)이 되므로, 만약 영남으로부터 오게 되면 마땅히 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괘서(卦書)의 일은 이하전라도에 가서 들으니, 나씨(羅氏) 성을 가진 사람과 산음(山陰) 사는 정가(鄭哥)가 했다고 합니다. 나가(羅哥)에게 물으면 알 수 있는데, 나가는 바로 나 숭대(羅崇大)의 7촌숙(七寸叔) 나만치(羅晩致)입니다. 황익재(黃翼再)김홍수(金弘壽)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여서 김홍수는 말하기를, ‘마땅히 함께 일을 할 듯하다.’ 하였는데, 신은 단지 김홍수의 말만 들었지 황익재의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임서호(任瑞虎)는 신이 아는데 역모에 동참(同參)한 것이 확실합니다. 조관규(趙觀奎)는 신이 알지 못하나 임서호가 동참했다고 말하였으며, 조덕징은 신이 알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기 전에 이미 들었습니다. 정월에 왔을 때 이하(李河)의 집에서 동참하여 난만하게 모의하였는데, 그가 비록 나이가 젊어 주장(主張)하지는 못했으나 동참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만(李晩)이의형(李義衡)은 군중(軍中)에 갔으며, 조동규(趙東奎)는 신이 알지 못하고 단지 임서호의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나숭대는 신이 모르는 사이지만 역모한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는데, 2차 형신하였으나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9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203]
    도목(都目) : 관리의 치적을 심사하여 여전 또는 좌천시키는 인사 행정인데, 해마다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음. 여기서는 인사(人事)에 관한 명부(名簿).
  • [註 204]
    동계(桐溪) : 정온(鄭蘊)의 호(號).
  • [註 205]
    애안(涯岸) : 한계(限界).
  • [註 206]
    늑염(勒髥) : 구레나룻.
  • [註 207]
    홍양산(紅涼傘) : 붉은 양산, 의장(儀仗)의 하나.

○上御仁政門, 親鞫。 刑麟佐, 麟佐供: "韓世弘李有翼李河南泰績南泰徵金重器欲爲此事, 任瑞虎趙觀奎任瑞鳳瑞麟趙德徵李培李晩李義衡, 今番會于陽城, 直走淸州, 其時所會鄭行旻元萬周陽城, 權瑞鳳水原, 趙東奎居京中鄕校洞。 而權瑞麟瑞龍睦涵敬陽城, 李之景淸州, 僞從事官柳伋陽城, 持都目而走。 淸州作變時, 副元帥鄭行旻鄭季胤, 同爲之, 兵使則李培殺之, 營將則睦涵敬殺之。 權瑞鳳淸州倅, 來安城, 假兵使則以申慶濟孫天永差定。 軍士則在陽城時二哨, 而發關徵兵, 則淸安倅、鎭川倅逃走, 而將校率兵來, 懷仁倅亦走, 而將校率兵十五名而來, 朴宗元投降。 從事官柳伋爲凶關、凶檄, 外援則韓世弘以爲: ‘有湖南邊山盜賊二哨, 亦有沈維賢朴弼顯兵, 羅州 羅崇大率家丁、族屬而來, 平安兵使李思晟入之。’ 而韓世弘下去平安兵營。 李昈陽城, 所聚軍二哨, 嶺南則鄭希亮安陰, 而今番則不來, 方在嶺南動兵, 希亮之族, 多入之云。 金弘壽尙州, 軍數未動兵之前, 不知其幾, 而無慮千餘人。 當初期日以三月初十日爲期, 而尙無消息。 臣則以應兵當到, 故十五日果起兵, 使任瑞麟探知, 而尙不來京中。 內應使臣擧兵, 若自嶺南、湖南動兵, 則輦轂親兵, 皆當出征, 南泰徵泰績爲京中事, 京中有翼主之, 嶺南鄭希亮主之, 其餘金弘壽等六七人助之。 希亮, 乃桐溪之孫也, 收聚百二十名, 欲以此作事。 臣先鋒鄭重復, 居陽城, 中軍李培、副將鄭行旻、進勇都尉睦涵敬李義衡爲之。 而李有翼韓世弘, 常言密豐君有人望, 故有翼往見言之, 則密豐不答云。 今正月, 臣上京, 訪李河家, 言: ‘事無涯岸, 同黨甚少。’ 臣責之曰: ‘如此則胡爲起在鄕者作事乎?’ 曰: ‘此如上岸做步, 豈可中止乎?’ 權瑞麟, 亦來謂李有翼曰: ‘人將盡死。’ 有翼曰: ‘使瑞麟, 收軍入城爲逆臣。’ 以爲不可, 有翼輩以爲: ‘不用吾輩之言, 則吾將殺汝。’ 瑞麟曰: ‘探知嶺南事, 自外起兵爲可。’ 臣正月, 下嶺南, 探知於金弘壽鄭希亮家, 則欲以百二十軍爲之而日字, 則初十日云。 臣知此事而歸, 將欲爲應兵, 十五日果擧事。 湖南虛實, 則不能詳知。 臣同生五兄弟, 熊佐泣諫, 其他兄弟駿佐騏佐, 末弟兒名夔兒。 臣名本以玄佐, 改以麟佐。 臣春間上來, 同姓五寸弘溥家, 弘溥以騷屑事問之, 仍言: "何交朴弼顯, 故致人言?" 以愼之爲戒。 弼顯則再昨年移居尙州時, 見之熟矣。 謀議則皆弼顯所敎, 刺客則必是鄭行旻所送, 可爲刺客者, 睦涵敬鄭重復重益等兄弟, 居稷山 權瑞麟亦有勇, 朴晙竹山, 亦有勇力, 而來到軍中, 鄭重勵稷山。 此外無驍勇之人與鄭行旻各營, 故不能詳知, 聞行旻選驍勇士, 以刺客送之云。 權瑞麟十五日送京, 恐怯不得入而還, 慶尙道訛傳, 以初五日起兵, 故臣等亦徑先起兵矣。 淸州兵使, 必先除去, 事可完備, 不可以孤軍獨卒入京, 故先陷淸州矣。 京中偵探, 則朴晙上送矣, 尙無消息, 今送于李有翼家矣, 狀貌則勒髯, 服色則着道袍, 十八日上來矣。 金重萬亦知之, 中間背約而欺之。 瑞麟則中身少有髯面縛, 着白布道袍, 亦向有翼家, 不逢而還矣。 李徵觀, 亦似同黨, 與同黨約, 雖敗, 復會淸州, 若可守城則守之, 不可守則踰嶺欲同入太白山鄭行旻邊山賊, 今方上來云, 而無消息, 淸州餘存之兵, 皆官軍。 臣之爲大元帥者, 乃賊徒中權瑞麟輩, 皆推尊而爲之, 紅凉傘則臣自爲大逆不道之事。 鄭行旻, 乃故相臣麟趾之後孫。 李有翼趙德徵往來于密豐家, 蓋德徵, 密豐之妻侄〔妻姪〕 也, 有翼不爲直往, 使德徵探問曰: ‘外間有如此之說話。’ 云, 則密豐不答云。 德徵年可二十餘, 李河之壻李森, 則不入其中, 初與有翼, 有剪除之意。 南泰績事, 臣聞之於有翼世弘, 而泰績用謀避之, 泰徵, 愚者亦入其中。 有翼以爲: ‘李思周密豐爲四寸, 若自嶺南來, 則似當爲之。’ 云。 掛書事, 李河全羅道聞之, 則羅姓人及山陰 鄭哥爲之。 若問於羅哥則可知, 羅哥, 乃羅崇大七寸叔晩致黃翼再金弘壽, 一而二, 故弘壽言: ‘似當同事。’ 云, 而臣只聞弘壽之言, 不聞翼再之言。 任瑞虎, 臣知之, 而同參逆謀的實。 趙觀奎, 臣不知, 而任瑞虎以爲同參, 趙德徵, 臣知之, 而未見之前, 已聞之。 正月來時, 同參於李河家, 謀議爛熳, 渠雖年少, 不能主張, 同參的實。 李晩李義衡往軍中, 趙東奎臣不知, 只聞任瑞虎之言。 羅崇大臣不知謀逆的實。" 刑二次, 供如前。


  •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9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